금융인 강동수(65세)씨의 생일을 맞은 지난 15일, 서울 프라자호텔에서 가족 만찬이 있었다.

그 오붓한 가족 모임에, 유일하게 친구로 초대되어 생일을 축하해 줄 수 있는 보람된 시간을 가졌다. 
한 가족의 행복한 모습들을 지켜본다는게, 이산가족처럼 떠도는 필자로서는 감회가 남다를 수 밖에 없었다.

강동수씨는 청년시절인 40여년 전, ‘김해농협’의 동료로 만나게 된 오래된 친구다.
김해농고를 졸업하고, 수석으로 농협에 들어 온 그의 첫 인상은 깐깐해 보이면서도 명석하게 보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사회에 첫 발을 디딘 그의 눈빛도 빛났지만, 그의 지혜로움과 따뜻한 인정은 상대의 신뢰를 얻기에 충분했다.

 

그 이후 강동수씨는 '경남은행'으로 스카웃되어 최고의 지위까지 올랐고,

퇴직한 후로는 감정평가사로 활동하는 등 평생을  금융업에 몸바쳐 왔다.
서로 다른 길을 걷게되어 긴 세월 연락이 끊기기도 했지만, 가끔 만나 대폿잔을 기울이며 옛 추억을 들추기도 했다.

 

그는 한 번 결정한 목표나 일은 전력을 다해, 기어이 관철시키는 의지의 사나이다.
한 때 비즈니스로 시작한 골프도 최고 실력까지 올라 골프인들의 부러움을 샀으나

몸의 상태가 더 이상 진전하지 않겠다는 것을 알고는 곧 바로 골프채를 놓는다는 선언을 해 주변을 놀라게 했다.

그만큼 신념도 강하고 판단력에 의한 실행도 빠른 사람이다.

몇 년 전엔 등산을 시작하겠다며 아내와 정선을 찾아 온 적이 있었다.
백두대간에 도전한다는 이야기를 했으나, 건강을 위한 산행 쯤으로 예사롭게 들었다.

그 이후 산행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없었으나, 이번 만남에서 또 한 번 놀라게 한 것이다.

백두대간 종주는 물론 국내의 명산들을 두루 섭렵한 후 외국의 높은 산들도 수차례 등정했다고 한다.

더 놀라운 사실은 백두대간을 종주하던 중 14미터나 되는 높은 벼랑에서 추락한 적도 있다는 것이다.

이른 새벽녘, 발을 헛디뎌 돌 더미에 떨어졌으나 전혀 몸을 다치지 않는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다고 한다. 
정말 하느님께서 그를 보살핀 것 같았다.

알피니스트로 변신한 친구의 또 다른 삶이 아름답고, 그 끝없는 도전정신과 투지력이 존경스럽다.

 

 

 

 

 

 

 

 

 

 

 

 

 

 

 

 

 

 

 

 

 

 


글·윤제학 월간山 편집기획위원
사진·이경호 차장

 

바위꾼에서 산사진 작가로 변신한 재미교포 선우중옥씨


산악인 선우중옥(74)씨가 4월 16일부터 22일까지 서울 종로구 인사동의 ‘인사아트센터’에서 ‘High Country’라는 제목으로 사진전을 연다. 그가 사진으로 담은 풍경은, 말 그대로 대부분 높은 산이거나 높은 산에서 바라본 산의 표정이다. 너무도 당연하게, 산을 오르지 않으면 마주할 수 없는 풍경이다. 그런데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진을 찍기 위해 산을 오른 건 아닙니다. 그러나 카메라는 나에게 또 다른 세상을 보여 주었습니다.”

영화를 보다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정지화면을 맞닥뜨렸을 때처럼, 그의 말은 판단중지와 동시에 수많은 생각의 켜를 수직벽으로 쌓는다. 어떤 경우에도 산을 ‘수단시’하지 않겠다는 염결한 태도의 표명으로 들리기도 하고, 이제는 더 이상 산을 오를 힘이 없어 사진으로 산을 ‘줌인’하는 것으로 오해하지 말라는 결기로 비치기도 한다. 그런데 그가 말한 ‘또 다른 세상’이란 무엇일까?


중학교 시절 선우중옥씨 ▲ 중학교 시절인 1955년 9월 인수봉 기슭에서 민용기씨와 함께 미소짓고

있는 선우중옥씨(오른쪽). 친형인 선우문옥씨와 민용기씨는 ‘소년 클라이머’에게 사부 역할을 해주었다.

 

 “카메라를 품고 산을 올랐을 때, 산은 더 아름다웠습니다. 분명히 같은 산인데 더 아름답다고 말하는 건 모순입니다만, 카메라는 나에게 산의 내밀한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하는 눈을 뜨게 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바라본 산은 나에게 또 다른 세상이었습니다. 산이 좋아 산에 가다 보니 사진을 찍게 되었고, 또 다른 세상도 만나게 되었습니다.”

젊은 날 선인 박쥐, 인수 취나드길 초등

10대 때부터 도봉산, 북한산의 암벽을 오르던 그가 70대 중반의 나이가 되어 바위를 잡던 손으로 카메라의 셔터를 누른다. 무엇이 같고 다른가? 그의 두 발이 여전히 산에 밀착돼 있다는 점이 같다. 바위를 잡던 손이 오로지 오르기 위한 것이었다면, 카메라를 잡은 손은 산의 아름다움을 읽어 내고 포착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이 다르다. 그렇다고 아주 다른 것은 아니다.

단 한 번이라도 바위를 올라본 사람은 안다. 바위를 잡는 손은 억세기만 하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미세한 바위의 숨구멍 속으로 스며들 수 있을 만큼 섬세해야 한다는 것을. 그는 지금 바위 속으로 스며들던 그 손으로 셔터를 누른다. 15분의 1초, 30분의 1초, 60분의 1초…. 바위로 스며들던 그 섬세한 손의 감각으로 찰나의 시간 속으로 스며들어 산의 새벽 공기를 카메라에 담아 내는 것이다.

클라이머에서 포토그래퍼로 변신한 것이 아니라, 산악인의 기반 위에서 시간과 공간을 교직하는 사진을 찍는 것이다. 그렇게 찍은 사진들을 모아 이번 전시회를 연다. 산에 대하여, 사진에 대하여 할 말이 아주 많을 것 같았다.

“옛날, 산에 다닌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얘기하지 맙시다.”

난감하다. 정치인을 만났는데 정치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말자는 것만큼이나 황당하다. 짐작컨대 과거 화려했던(?) 등반 경력을 프레임으로 자신의 사진을 바라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그것이 자신의 사진에 대한 자신감에서 하는 얘기도 아닌 것 같다. 그저 보이는 그대로 봐 달라는 뜻으로 이해한다. 그래도 그의 등반 이력에 대해서 전혀 얘기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에게 산과 삶 그리고 사진은 트라이앵글처럼 서로를 지탱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산에 좀 다녔다는 사람, 특히 암벽 등반을 즐기는 사람 가운데 ‘선우중옥’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도봉산 선인봉의 상징적 암벽 루트인 ‘박쥐길’을 초등한 사람이 바로 그다. 1960년의 일이다. 1963년, 북한산 인수봉의 취나드 A, B코스도 선우중옥과 이본 취나드가 함께 열었다. 선우중옥씨의 등반 경력에 대해서는 본인의 뜻도 있고 하니 이쯤에서 그친다.

“1990년대 말쯤 가족과 함께 몽골을 여행할 때였어요. 유목인들의 게르에서 차를 대접받는 일이 여러 번 있었지요. 그들의 삶은 볼수록 놀라웠어요. 첫째 가족애가 대단해요. 그 다음은 자연에 대한 그들의 태도예요. 겨울에 추워서 가축이 얼어 죽는 경우가 있어요. 그래도 그들은 그 가축을 건드리지 않습니다. 자연사한 가축은 그냥 하늘나라로 보내요. 양을 잡아서 주식으로 삼지만 말이지요. 대단한 절제력과 품위를 갖춘 사람들이에요.

사냥매를 대하는 그들의 태도는 숭고하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예요. 사냥매가 보통 30년 정도 산다면, 2~3년 정도 훈련시켜서 5~15년 정도 사냥매로 부리다가 15년 정도 되면 놔 준다고 해요. 그 정도 자신들을 위해 살았으면 나머지는 자유롭게 살다 가라는 거죠. 최소한 이 정도는 돼야 자연스런 삶이라 할 수 있지 않겠어요.”

인사동을 걸으면서 지나가는 말처럼 그가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바람결에 들었다. 문득 그의 삶과 산의 관계가, 몽골인들과 사냥매의 관계와 묘하게 유사한 부분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 잃은 슬픔, 사진으로 극복

중학생 시절부터 인수봉과 선인봉을 오르내리던 그는 대학 1학년 때 박쥐길을 초등할 정도로 암벽 등반에 깊이 빠졌다. 이후 앞서 얘기했던 이본 취나드와의 인연으로 1971년 미국으로 갔다. 취나드가 운영하는 미국 등산학교 강사로 초청 받은 것이다. 이후 몇 년간 파타고니아사에서 일하며 취나드와 함께 등반했다.

그때 결혼했고, 아이들이 태어났다. 책임져야 할 일이 산처럼 무거워진 것이다. 그때부터 독자적인 사업을 시작했다. 한때 산에 미쳤던 것처럼 일에 몰두했다. 산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일이 단순 소일거리가 아닌 것처럼, 산 또한 그에게는 심심풀이의 대상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10년을 보냈다. 어느 정도 기반을 잡았다. 산을 마주할 여유도 생겼다. 1981년, 미국 산친구들과 함께 북미 최고봉 매킨리를 올랐다. 이듬해에는 한국팀과 두 번째로 매킨리 정상에 섰다. 이 무렵 한국 클라이머들이 요세미티의 거벽 등반에 눈길을 주기 시작했는데, 선우중옥씨는 기꺼이 그리고 즐겁게 이들의 후견인이 되어 주었다. 사진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매킨리 등정 후 등반 과정을 담은 슬라이드 필름을 들고 LA의 한 사진 현상소를 찾았다. 그런데 그곳을 운영하는 사람이 유명한 한국인 사진작가였다. “사진 좋네요.” 사진작가의 이 한마디 칭찬에 사진 속으로 한 발짝 더 들어갔다. 선우중옥씨를 사진으로 인도한 것은 아이 같은 단순함인지도 모른다. 본래 무모함과 단순함은 일란성 쌍둥이 같은 것이니까. 이때부터 길고도 혹독한 ‘홀로’ 사진 공부가 시작되었다. 네팔, 파키스탄, 파타고니아를 떠돌았다. 60대 중반의 나이에 에베레스트를 도전한 것도 알피니스트로서의 열정만큼 사진에 대한 열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바위를 잡던 손으로 카메라를 잡게 된 것은 그에게 물 흐르듯 자연스런 일이었다.

한편으로 그는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세계 곳곳의 아름다운 풍경을 찾아다녔다. 그러던 그에게 커다란 불행이 찾아왔다. 2005년 12월 아내와 함께 킬리만자로를 등반하기 위해 아프리카를 여행하던 중이었다. 심장마비로 그만 아내가 하늘나라로 가고 말았다. 목숨을 내놓는 일쯤은 아무 것도 아닐 정도로 사랑했던 아내를 잃은 아픔은 컸다. 그 아픔을 딛고 일어서게 한 것이 사진이었다. 그래서 그는 더 혹독하게 자신을 몰아붙였는지도 모른다. 히말라야의 눈 속에서 천막을 치고 보름씩 홀로 버텼다. 파타고니아의 피츠로이에 자신을 감금시켰다.

일출 장면을 찍기 위해 겨울 파타고니아에서 비박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물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음해 겨울 다시 파타고니아를 찾았다. 낮에는 진눈깨비, 밤에는 눈이 내리는 날이 일주일이나 계속되었다. 그 큰 산에 사람이라고는 선우중옥 한 사람뿐이었다. 일주일 만에 눈은 그쳤지만 날씨는 좋아지지 않았다. 그냥 내려오기에는 홀로 버텨낸 시간이 아까웠다. 결코 우호적이지 않은 시간과 한편이 되어 무작정 버텼다. 열흘째 되던 날 혼절할 만큼 아름다운 일출을 만났다.

“파타고니아의 분위기가 너무 마음에 들어요. 산의 공기와 풍경은 신선하고 아름답습니다. 남극에서 곧바로 오는 햇살은 진짜 황홀해요. 그 색감, 그 공기의 질감을 사진에 담기 위해 한밤중 산에서 깨어나는 건 아주 설레는 일입니다.”

사소한 일조차도 아내에게 ‘칭찬’ 받기를 좋아했던 그는 오직 아내에게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 주기 위해 사진을 찍은 게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제 그 사진을 보여 줄 아내는 없다. 그런데 그는 지금 사진전을 연다. 누구보다도 현명했던 그의 아내가 아마도 그에게 이렇게 속삭였을 것이다.

‘이제는 나 말고 더 많은 사람들과 아름다운 사진을 나누고, 더 많은 얘깃거리를 만드세요. 그 모습이야말로 나에게는 아름다운 그림이에요.’

아내를 떠나보낸 후 선우중옥씨에게 사진을 찍는 행위는 치유의 과정이기도 했다. 분신 같던 아내가 부재하는 시간 자체가 고통이었다. 이런 시간을 버티게 해준 건 사진이었다. 이 시간 동안 네팔 히말라야를 5번, 파키스탄 히말라야를 3번 찾았다. 파타고니아는 매년 그의 친구가 되어 주었다.

에베레스트의 석양에 넋을 잃고 하산 시간을 놓쳐 버린 적도 있다. 홀로 남은 그를 칼라파타르의 어둠이 에워쌌을 때, 오히려 안도했다. 산과 온전히 하나가 되었다는 충만감에 전율했다. 그 순간 선우중옥은 사진을 찍는 사람이 아니라 산 사람이었다. 사진가로서 선우중옥의 능력은, 산에서 보낸 무수한 시간의 힘에서 나온다. 그는 천생 산악인이다.

“그 두근거림이 사진을 찍게 해요”

이제 그는 할아버지다. 원로 소리를 들을 나이다. 하지만 그는 원로 대접 같은 것들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도인 흉내는 물론, 달관의 언어도 사용하지 않는다. 그와 1문 1답 식의 인터뷰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이 글은 함께 인사동, 종로, 광화문을 걷다가 커피를 마시고 막걸리 잔을 기울이면서 지나가는 말처럼 나눈 얘기들을 마음 가는 대로 옮긴 것이다.

그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전철 창으로 스며드는 봄 햇살이 고왔다. 그 빛을 따라, 사진을 찍는 지금의 심경을 얘기하는 선우중옥씨의 목소리가 귓속으로 흘러들었다.

“미국으로 가서 처음 요세미티를 봤을 때, 경이로웠습니다. 그리고 두려웠습니다. 저 암벽을 어떻게 올라야 할까? 그것을 먼저 생각했으니까요. 젊었을 때 산을 보면 늘 그런 식이었습니다. 산을 보는 순간, 나의 모든 근육과 혈관은 뇌가 그리는 등반선을 따라서 꿈틀거리곤 했습니다. 물론 지금도 요세미티를 보면 경이롭습니다. 그러나 두렵지는 않습니다. 설렙니다. 봄에 보면 여름, 가을, 겨울에는 또 어떤 아름다움을 보여 줄까, 하는 생각에 내 가슴은 두근거림으로 가득합니다. 그 두근거림이 나로 하여금 사진을 찍게 합니다.


	[화제ㅣ사진전 'High Country' 여는 산악인 선우중옥] "사진을 찍기 위해 산을 오른 건 아닙니다. 그러나 카메라는 나에게 또 다른 세상을 보여 주었습니다."

선우중옥
1940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1960년, 도봉산 선인봉의 상징적 암벽 등반 루트인 ‘박쥐 코스’를 초등했다.
1963년, 이본 취나드와 함께 북한산 인수봉의 ‘취나드 코스(A, B)’ 초등했다.
1981년, 매킨리를 등정(미국팀)했고, 이듬해에는 한국팀과 매킨리를 올랐다.
1992년, 남가주산악회 트랑고타워 원정대장으로 등반을 이끌었다.
1982년, 분단 후 처음으로 금강산 집선봉을 암벽 등반으로 올랐다.
2003년, 2004년 연속으로 에베레스트를 등반한 후, 사진 찍는 일에 깊이 빠져들었다. 이후 네팔과 파키스탄 그리고 파타고니아를 떠돌면서 고산에서의 풍정을 카메라에 담아 왔다. 이 사진전은 그 과정의 한 부분이다


사업가로 에베레스트 완주한 산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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