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알린 바와 같이 정선 작업실이 전소되었습니다. 그 내용을 화가 박 건씨가 알고 도움을 청하는 글을 올린 것이 계기가 되어 많은 분들이 도와주셨습니다. 공개적인 구걸이 부끄럽기 그지없는 일이나, 그 따뜻한 마음을 고맙게 받아들였습니다. 그에 따른 조그만 보답이라도 될까 싶어 부족하나마 저의 사진 한 점씩 보내드리려고 견본 사진 5점을 제시하며 사진번호와 보낼 주소를 보내달라고 전화번호를 알려드렸습니다.

아쉽게도 알린지가 한 달 가까이 되었으나 주소와 사진번호를 보내 주신 분은 네 분밖에 없네요.

혹시 그 안내를 보지 못했거나 뒷수습으로 경황이 없을 것으로 판단해 천천히 연락하려 보류한 분도 계실 것입니다, 더러는 알리기가 편치 않거나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 저 역시 사진 보내는 일에만 매달릴 수 없어 한꺼번에 작업하기 위해 기다리다 주소를 알려 주신 분까지 보내드리지 못해 송구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며칠 전 네 분 사진만 먼저 프린트해 보내드렸습니다.

 

나머지는 오는 10일까지 기다렸다 일괄 프린트(규격 42cmx 29,7cm)하여 액자에 넣어 보내 드릴 작정이오니, 사진번호와 주소를 정영신씨 핸드폰(010-2955-8926)으로 보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혹시 견본사진 외에 마음에 드는 사진이 있다면 가능하오니 알려주십시오.

만약 10일까지 연락 없는 분들은 그 뜻을 존중하여 개인전을 소개하거나 행사사진을 촬영 해 드리는 등 다른 방법으로 도와 드리겠습니다. 이 번 온정의 손길은 두고두고 보답하겠습니다.

정선에 예술창고를 만들어 함께 공유하려는 계획도 아직까지 원만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아 다소 시일이 지체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보험사로부터 제대로 보상받아 기대에 부응하는 공유공간을 만들게 되면 알려드리겠습니다.

도와주신 분을 밝혀 일일이 고마움을 전하는 것이 마땅하나 행여 온정이 노출되는 것을 꺼리는 분도 계실 것 같아 성함 중 한자를 생략하였으니,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아래는 후원해 주신 분 명단과 전해드릴 사진 견본이오니 참고하셔서 연락 주세요.

-후원금 보내 주신 분 명단- (밑줄 친 분은 사진을 발송하였습니다)

화가 : 이*엽 5만원, 이*민 10만원, 나*희 20만원, 정*엽 10만원, 김*홍 10만원, 류*복 10만원, 강*구 100만원, 두*영 5만원, 정*수 10만원, 안*홍 100만원, 박*동 20만원, 김*구 10만원, 박*태 10만원, 이*구 5만원, 이*정 3만원, 천*석 5만원, 김*열 10만원, 한*진 10만원, 김*하 20만원, 이*열 10만원, 조*옥 10만원, 박*원10만원, 이*철 20만원, 주* 20만원, 최*영 50만원, 사진가 : 최*균 30만원, 박*호 20만원, 노*향20만원, 전*훈50만원, 이*수 10만원, 변*철 10만원, 박*만 200만원, 박*환 5만원, 양*영 20만원, 홍*원 10만원, 최*석 20만원, 김*호 10만원, 김*진 10만원, 마*욱 10만원, 최*화 10만원, 이*갑 10만원, 김*길 10만원, 김*섭 50만원 문학인 : 조*영 30만원, 서*란 20만원, 장*숙 5만원, 김*지 20만원, 이*흠 10만원, 김*성 10만원, 조*인 10만 음악인 : 김*현 10만원, 전*철 10만원 마임, 무예가 : 유*규 10만원, 하*웅 10만원, 사회 활동가 : 박*윤 10만원, 김*부 5만원, 홍*길 10만원 ‘공유공간 마인’ : 김*우 10만원, 김*온 10만원, 양*살 10만원, *민화 5만원, 천*명 10만원, 정선 귤암리 : 노인회 20만원, 해선스님 20만원, 잘 모르는 분 : *범현 10만원, 윤*숙 10만원, *미경 10만원, 힘내세요 3만원, 김강* 5만원,

합계 1291만원

사진1번 만지산1

그 동안 있었던 일을 요약해 정리해 본다

이번 화재로 40여년 동안 일해 온 자료는 모두 잃었지만, 대신 많은 사람을 얻었다.

아산에서 ‘공유공간 마인’을 운영하는 김선우씨는 자신의 일보다 더 적극적으로 나서서 일을 처리해 주었다. 정선 화재현장에 버려진 쓰레기를 트럭으로 실고 가 물증 찾는 일에 혼신을 쏟아왔고,  그와 함께 서울 변호사 사무실까지 찾아 와 자문해 주며 사회의 모순된 구조 개선에 대해 좋은 말씀을 들려 준 사회운동가 김창복씨, 오랜 시간동안 사건에 대한 전모를 들으며 무료로 자문해 주신 ‘법률사무소 휴먼’의 류하경 변호사님, 일면식도 없는 분에서부터 지인에 이르기까지 온정의 손길을 보내주신 60여명의 후원자를 비롯하여 걱정해 주신 많은 분들의 고마움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마치 폭풍이 휩쓸고 간 후의 따스한 햇살처럼 큰 위안이었다. 얼마 남지 않은 여생, 도움 준분들에게 보답하며 살아야겠다는 각오를 다지기도 했다. 그래도 아직은 살만한 세상이란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정작 도움의 손길을 주어야 하는 지자체에서는 나몰라라 했다. 도처에 토목공사 때 사용하는 컨테이너박스가 널렸는데, 갑자기 집을 잃은 군민이 거처할 임시숙소 하나 빌려주지 못하는가? 고작 대한적십자사에서 보내 온 담요와 비상식량 뿐이었다. 이런 놈의 동내를 위해 몇십 년 동안 마음을 쏟아 부은 것을 생각하니, 분통이 터진다. 다시는 주민 복지라는 말만 꺼내면 똥바가지를 덮어 쒸울 것이다.

그리고 화재현장인 정선 집에 대한 앞으로의 대처 방안도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처음 불이 붙었던 옆집도 분명 피해자의 한 사람이다.  그러나 같이 살고 싶은 이웃이 아니란 것은 오래전 알았다.

그 집은 미국에서 온 노성수씨가 구입해 살았는데, 2015년 불의의 사고로 갑자기 목숨을 잃은 것이다. 술이 취해 방문의 유리에 동맥이 끊기는 끔찍한 사고를 당한 갑작스런 변에 아내가 무서워 못살겠다며 급히 집을 내놓았는데, 그 집을 산사람이 이번에 불을 낸 윤씨다.

 

사진2번 만지산2

이사 온 뒤로 윤씨의 남편처럼 행세한 한 남자는 재 측량한다며 남의 집 마당에 빨간 막대를 꽂아두는 등 처음부터 불쾌하게 만들었다. 우리 집 마당을 자기 주차장처럼 사용하는데다, 자기 땅 두고 남의 땅에 고추를 심는 건 도대체 무슨 심보일까?

서울서 살러 온 사람들이 지역주민들과 종종 마찰을 일으키는 것도 이러한 개인주의적인 이기심 때문이다. 예전엔 떠돌다 힘들면 마음 편이 쉬려 정선에 갔으나, 이젠 만나기 싫은 사람 때문에 일할 때만 정선가는 꼴이 되어버렸다. 집이 붙어있어 수시로 들락거려 불편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 동내 소문도 일조했다. 이상한 소문이 동네에 퍼져 가까이 하지 말라는 동네 사람들의 충고도 뒤따랐다, 그녀가 이사 온지 2년쯤 후 인사동에서 ‘유목민’을 운영하는 전활철씨와 홍천의 양서욱씨가 우리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옆집의 그녀가 찾아와 술자리에 합류하게 되었는데, 급기야 전활철씨 와는 친구사이로, 양서욱씨와는 남매로 둔갑하는 친한 사이가 되어버렸다. 그녀의 친화력에 고개가 꺼덕여졌다. 사람 사는데 친화력보다 더 좋은 게 없으나, 시골 사람들에게는 사람을 잘 꼬드기는 것으로 인식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야 가끔 가기에 자주 만날 수는 없지만, 그 집을 더나들던  사내들의 뒷소문도 무성했다. 언젠가부터 정선 북실리에 사는 년하의 남자와 동거하기 시작하며 더 이상의 잡음은 들리지 않았다. 한씨는 토목공사 하는 분이라 전기에서부터 레미콘에 이르기까지 못하는 일이 없으니 그에게는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창수엄마 이야기에 의하면 한 때는 본처가 경찰을 데리고 현장에 찾아와 한씨가 도망쳐 올라와 숨겨 준 일도 있었다는 것이다.

 

사진3번 만지산3

모두 남의 사생활에 불과한 이야기이지만, 문제는 주변을 너무 불편하게 한다는 것이다.

우리마당을 자기네 주차장으로 사용하며 여러 마리의 개를 풀어놓아 여기 저기 똥을 싸거나 농작물을 짓밟는 등 피해를 주었고, 그물망으로 방목하는 수많은 닭들의 소음도 또 하나의 공해였다. 그리고 친환경을 내세워 수시로 끌어들이는 손님들도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어느 날 우리 집 마당에 레미콘 한 차를 부려놓은 사진 한 장을 정영신씨 핸드폰으로 보내왔다. 지난 번 만났을 때, 도로 포장하는 사람 오면 움푹 파진 도로 입구 좀 때워 달라며 부탁한 적이 있다는데, 온 마당을 뒤덮어버린 것이다. 마당을 자기 내 주차장으로 사용하니 레미콘 비용의 반은 자기가 부담하겠다는데 무슨 말을 하겠는가?

이미 엎질러진 시멘트라 쓸어 담을 수도 없어 아무 소리 못하고 20만원을 주었는데, 아마 인부들이 공사장에서 빼돌려 싼 값으로 깔아준 것 같았다. 자연환경이 좋아 사는 나로서는 마당을 차지한 점령군처럼 눈에 거슬리는 흉물에 불과했다.

또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한 때 이웃 최종대씨와 지하수 분쟁으로 세상을 시끄럽게 한 적도 있었다. 그 당시에는 지하수로 갑 질하는 최종대씨의 잘 못이라 공개적으로 최씨를 나무랄 수밖에 없었으나 긴 세월 이어 온 정이라 윤씨보다 최씨가 더 가까운 사이였다.

그 때부터 서울만 왔다 가면 전기 차단기가 내려져 냉장고에 있는 음식이 다 상해있었다. 한 번도 아니고 매번 그 일이 반복되어 아예 냉장고를 사용하지 않고, 최씨와의 왕래를 끊어버린 것이다. 그 이후부터 다시는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았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가? 누구의 짓인지는 뒤늦게 알아챘다.

 

사진4번 두메산골 사람들

그 날 불난 날도 서울에서 손님이 네 사람 찾아와 마당에서 불을 피워 밤늦도록 고기를 구워 술을 마셨다는데, 주민들 말과는 달리 누전으로 둔갑해 버린 것이다. 뒤늦게 듣기로는 얼마 전 윤씨가 불 난 집 터 옆의 조씨네 밭을 사서 농막까지 옮겨 두었는데, 그 위에 있는 밭을 공동 투자하여 사들이기 위해 온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처음에는 보험 든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다며 죽는 소리를 해 화재현장의 물증확보에 신경도 쓰지 않고 돌아 왔는데, 뒤늦게 보험 든 게 있다는 연락을 해온 것이다. 이미 보름이나 지나 다시 찾아갔을 때는 모든 게 파헤쳐지고 치워버려 물증확보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정신을 놓아 치밀하게 대처하지 못한 나의 실책이었다.

또 하나 윤씨의 말을 믿을 수 없는 것은 처음에는 방안의 현금을 칠백만원이나 두어 모두 탔다고 말한 것이다. 한국은행에서 보상 받기 위해 잿더미를 뒤적거려 이백만 원 정도의 흔적을 찾았다고도 했으나, 두 번째 들렸을 때는 돈은 타지 않았다며 말을 뒤집었다.

 

사진5 서울역지하도

나의 모든 것을 앗아가도록 원인을 제공한 그녀를 두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것이 솔직한 나의 바램이다. 그녀만 보면 울화가 치미니 스스로의 명을 재촉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솔직히 그 곳을 떠나고 싶은 생각도 들지만, 어머니 무덤도 무덤이지만, 동자동 일이 끝나면 이제 어디 가서 쉬겠는가? 그리고 그녀가 좋아 하도록 판 깔아 주기는 더 더욱 싫었다.

그래서 윤씨와 합의하기 위한 제안으로 지금의 집터를 양보하고 새로 구입해 둔 위 쪽으로 옮겨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했으나 거절했다. 

지난 1일 정오 무렵 서초동에 있는 ‘법률사무소 휴먼’의 류하경 변호사를 찾아갔다. 아들 햇님이 안내로 정영신씨를 동반해 갔는데, 그곳에는 아산에서 이 일을 돕고 있는 김선우씨와 사회운동가 김창복씨도 참석하여 그동안의 일에 대한 도움말을 듣고 준비할 앞으로의 대책도 세웠다. 일단은 손해사정사의 보상 금액이 결정되는 것을 보며 소송을 시작하자는 것이다.

도움주신 분들의 뜻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해 좋은 예술창고를 만들 것을 약속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사진, 글 / 조문호 

 

 

“아! 너무 허무하다.” 모든 게 한 순간이구나.

 

어제 오전 7시 무렵, 녹번동 정영신씨로 부터 전화를 받았다.

정선 만지산 집에 불이 나 모든 게 타 버렸다는 비보였다.

 

그 순간 눈앞이 캄캄했다.

“설마, 누군가 빨리 오라는 장난 전화를 했겠지”라고 위안했으나

부리나케 정동지를 만나 정선으로 떠난 것이다.

 

연락에 의하면 밤1시 40분 경 옆집에서 불이 나

우리 집으로 옮겨 붙었는데, 원인은 누전이란다.

옆집 한씨가 전기기술자인데, 누전으로 불났다는 건 이해되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 집은 동강 변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옛집이 아니던가?

동강 댐이 무산되어 주민들에게 주택건설비를 지원할 때

동강 변에 있던 집들은 모두 헐려나가며 국적불명의 주택이 들어섰다.

 

집만 아니라 그 안에는 동강 사람들의 삶의 변천사가 담긴 자료는 물론,

긴 세월 수집해둔 소중한 사진자료들이 차곡차곡 보관되어 있었다.

한 달에 두 번씩 정선 갈 때마다 새로 생긴 자료들을 챙겨가

정선 집은 자료 창고나 마찬가지였다.

 

처음부터 부엌 헛간을 개조해 암실과 작은방까지 만들어 두었으나

방은 물론 암실 기자재 위에도 숱한 짐이 쌓여 창고가 되어버린 것이다.

 

가장 큰 걱정거리는 그 곳에 남겨 둔 필름 박스였다.

필름 박스 두 개 중 한 개는 스캔받기 위해 녹번동으로 옮겼지만,

한 개는 만지산 집에 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자동에 들어 간 이후 몇 년 동안 필름박스를 손도 대지 못했다.

그 일만 끝냈다면 나머지 것과 바꾸어 필름 이미지는 건졌을 것이다.

 

그 집에는 동강자료 뿐만 아니라 나는 물론 정영신씨가 전시한

수 많은 사진 작품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스캔된 이미지야 다시 만들면 되겠지만 사라진 이미지는 어쩌냐?

 

그리고 둘 만의 작품만 아니라 다른 작가들의 그림이나 도자도 있었다.

강용대 그림에서부터 초창기의 강찬모 그림과

수안스님, 최울가, 이존수, 신동여, 이청운작가 등 십여 점이 보관되어 있었고

나를 그려 준 박재동선생 그림을 비롯한 초상화도 여러 점 있었다.

그리고 통도사에 계신 수안스님께서 방문하여 ‘몽암’이라는 현판까지 달아주셨다.

꿈의 암자라고 이름 지었는데, 결국 꿈으로 끝나고 말았다.

 

정선 만지산에 도착하니, 옆 집 두 채와 우리 집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포크레인만 불탄 현장을 지킬 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화재 규명은 물론 불탄 필름 흔적이나 피해 자료를 찾아야 하는데,

왜 포크레인이 현장에 들어 와 헤집어 놓았을까?

한 쪽에선 불씨가 남았는지 연기가 피어오르고, 굶주려 지친 개들만 여기 저기 퍼져 있었다.

 

불탄 잔해를 살펴보니 그동안 아무리 찾아도 없었던

90년도 만든 ‘전농동588번지’ 전시 팜프렛 잔해도 보였다.

그렇지만 건져낼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윗만지 창수네 집으로 올라갔다.

고사리 꺾던 이선녀씨는 하던 일을 제쳐두고 술상부터 차렸다.

마음을 위안해 줄 게 술 밖에 더 있겠는가?

 

막걸리가 몇 잔 들어가니 한결 마음이 편하더라.

들려준 바에 의하면 동네사람들이 밤잠을 설쳤고, 소방차가 일곱 대나 동원되었단다.

다들 산으로 번지지 않도록 막았을 뿐, 속수무책이었다고 한다.

 

누전이란 것은 어떻게 알았냐고 물었더니, 아니란다.

어제 손님 네 분이 윤인숙씨 집에 와 묵었는데, 늦도록 고기 구워 술을 마셨다고 한다.

동네 사람들은 불씨가 살아나 옮겨 붙은 것으로 추정한단다.

 

불난 집 이야기에서 웃기는 이야기로 불이 옮겨 붙었다.

살러 온 색시마다 도망쳤다는 뱃사공 유춘식씨 이야기에서부터

한 밤중 일 치던 내외가 석유병을 들기름으로 착각해

거시기에 불이 붙은 비화 등 배꼽 잡을 옛날 이야기들이 나왔다.

 

자리에서 일어나니, 이선녀씨가 따 놓은 두릅을 두 보따리나 챙겨주었다.

두릅 값으로 신사임당 한 장을 꺼내주었더니, 감동적인 말을 했다.

“인정을 돈으로 계산하지 말자”는 거다.

 

마을 이장 처럼 항상 보살펴주는 최연규씨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다들 불난 집에 와 있단다.

 

 

내려 가보니, 동내 사람들이 술 한 잔 마시며 당시의 긴박한 상황을 이야기했다.

나야 보험이라고는 자동차 보험 밖에 없지만, 옆집도 화재보험에 가입하지 않았다고 한다.

요즘 집 공사 중이라 현금을 칠백만원이나 두었는데, 그 것까지 홀랑 태웠다는 것이다.

보상 받기 위해 잿더미를 뒤적거려 이백만 원 정도의 흔적은 찾았다고 한다.

 

자칫했으면 생사람 잡을 뻔 했더라.

숨이 막혀 일어나니 연기가 차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는데,

돈이고 뭐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팬티 바람으로 튀 쳐 나갈 수밖에 없었단다.

천만다행인 것은 그날 밤 바람이 한 점도 없었다는 점이다.

불이 산으로 옮겨 붙었다면 대형 산불로 번질 가능성이 많았다.

동원된 소방관들도 불이 윗쪽으로 번질 것을 대비해 포진했지만,

일방통행인 만지산 길에 물 공급이 원활하지 않아 진화가 더 더뎠다고 한다.

 

늦게 불붙은 우리 집은 소방관들이 조금만 빨리 출동했어도 옮겨 붙지 않았을 거고,

물 공급만 원활했어도 자료의 반이라도 건져낼 수 있었다고 한다.

산불이나 마찬가진데, 소방헬기는 왜 동원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지난날을 돌이켜보니 만감이 교차했다.

동강 댐으로 시끄러울 때 왔으니, 어언 이십 오년의 세월이 훌쩍 넘었다.

환경 사진가들이 만지산에 둥지 틀고 물고기나 곤충, 들꽃 등 각자 전문분야를 기록했는데,

난, 동강 변에서 살아 온 사람들의 삶을 기록한 것이다.

지금 불탄 집이 그 당시 캠프로 사용했던 집이다.

 

2000년, 동강 사람들의 눈물겨운 이야기를 담은 ‘동강 백성들’ 사진 산문집과

조해인시인의 ‘어라연 뱃사공 이해수씨’라는 동강 시집이 나올 무렵에는

‘동강주민을 위한 굿마당’을 옛 귤암분교에서 열기도 했다.

 

김명성씨가 주동이 된 ‘창예헌’ 예술가들이 버스 몇 대에 나누어 타고 찾아 와

밤늦도록 주민들과 어울렸는데, 이원창 사또 나리께서 늦게 나타나는 바람에

좁은 도로가 마비되는 등 조용했던 동네에 한바탕 소동을 일으켰다.

 

그 무렵은 다들 동강 댐 찬성하는 주민들을 나쁜 놈으로 몰아세웠다.

댐을 만들라는 목소리를 낼 수 밖에 없는 속 사정은 일언반구도 없이

여론몰이 하는 형태는 지금의 기레기나 하나도 다를 것이 없었다.

‘환경운동연합’과도 반대의견을 낸 것은 사람이 살아야 동강도 살수 있다는 말이다.

 

빚에 쪼들려 물에 투신하거나 농약먹고 자살하는 등

동강 사람들이 여럿 죽어나가자 주민들과 함께 서울로 올라갔다.

명동성당 앞에 진을 쳤는데, 날씨마저 얼마나 추웠는지 모른다.

그 당시 충무로에 있던 ‘현대사진가회’ 강의실을 비워 귤암리 노인들을 모셔놓고

밤 세워 전단지 만들고 보도자료 보내느라, 사진단체 사무실이 동강사람들 전진기지가 되었다.

이틀 날 ‘문화일보’ 사회면에 동강주민 살리라는 사회면 특집기사가 실린 것이다.

 

주민대표 이영석씨를 비롯한 몇 명이 김대중 대통령 호출로 청와대에 불려갔다.

피해주민에게 주택자금 지원과 부대시설을 지원하기로 약속받는 등 난제를 해결했다.

그 때 출판한 ‘동강환경사진집’과 ‘동강 백성들’ 산문집으로 환경단체 프로젝트는 끝났지만, 

두메산골사람들’과 '산'을 주제로 사람과 자연 환경을 찍으며 혼자 눌러 앉았다.

 

그 곳은 자연 환경도 아름답지만, 절처럼 마음이 편안해 떠나기 싫었다. 

몇 년 지난 후 프로젝트에 같이 참여한 사우가 그 집을 자기가 사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울며 겨자 먹기로 빚내어 사게 된 것이다.

그 많은 짐을 옮길 곳도 없었지만, 하던 작업이 끝나지 않아서다.

오죽했으면 역마살이 끼어 한군데 오래 정착하지 못하는 버릇을 알아

돌아가신 어머니까지 만지산에 묻었겠는가?

 

20년 전 평당 팔만원에 400평을 샀다.

당시의 시세가 평당 만원정도 했으니, 바가지도 그런 바가지가 없었다.

 집도 밭에다 지은 무허가 농가였다.

문제는 한 집이었던 옆집을 다른 사람에게 잘라 팔며 절집 같이 고요한 만지산의 낙원도 끝나버렸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거나 지나치는 사람들로 정동지가 정선 집에 가기 싫어했다.

욕실도 없고 화장실도 멀리 떨어져 있어 밖에서 목욕을 하거나 소변을 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예 우리 집 마당을 주차장으로 사용하며 들락거리니, 나 역시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옆 집은 한 때 대학로에서 카페를 운영 했다는 박진기씨가 살았으나

땅 살 형편이 못 되자 미국 사는 친구를 끌어들여 사도록 부추긴 것이다.

옛 말을 믿을 수는 없으나, 그 집에 우환이 생긴 원인은 집 구렁이 때문이 아닌가도 추정된다.

 

2002년 여름, 우리 집 모퉁이에 팔뚝 굵기의 능구렁이가 똬리 틀고 있었다.

최종대씨가 얼른 잡아 옆집 부엌의 빈 장독 속에 넣어둔 것이다.

그 당시만 해도 옆집은 최종대씨 장인인 이관옥씨가 오가면 사용한 집인데,

이튿 날 뱀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고 한다.

집 구렁이를 잡아서 안 된다는 옛말이 생각나 늘 마음이 꺼림직 했다.

 

이번에 불난 발화지점이나 사람 죽은 방도 그 부근이었다.

비록 그 일 때문은 아니겠지만, 우환은 오래도록 이어졌다.

그 집을 산 성수씨가 어느 날 술이 취해 부얶 방에 들어가다 깨진 방문 유리에

동맥이 찔려 죽는 변을 당하는가하면, 처음 잠깐 살았던 박진기씨도 아내와의 불화로

집에서 석유를 몸에 붓고 불을 붙여 자살한 것이다.

 

성수씨가 갑작스런 변을 당하자 아내가 무서워 못살겠다며,

이사 가려고 급히 집을 내놓았는데, 그 집을 산사람이 이번에 불 난 윤인숙씨다.

세상을 하직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구렁이를 잡은 최종대씨도 나이에 비해 일찍 세상을 떠났다.

이어지는 우환이 우연치고는 심상치 않다는 것이다.

 

우리 집은 일찍부터 ‘사진 굿당’이란 이름을 내걸고 여러 가지 일을 벌였다.

산삼 심는 ‘농심마니’ 팀들을 초대하여 만지산에 산삼을 심었고,

사진굿당 앞 서낭당에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때로는 굿당 축제에 무세중씨나 정선 무당을 모셔 와

밤 세도록 징소리 울리며 동네 사람들과 어울려 굿판을 벌이기도 했다.

 

일 년에 한 번씩 축제를 연 것도 동강사람들 자료관으로 자리잡기 위해서였다. 

타지의 예술인들을 불러 모아 수시로 놀이판을 만들어 문화적 역량을 키워나갔다.

그리고 동강과 사람들에 대한 숱한 자료들을 모아 왔으나, 그 꿈은 순식간 화마에 휩쓸려가고 말았다.

 

우연치고는 근래에 생긴 일들도 예사롭지 않았다.

여지 것 그 집을 전혀 손대지 않았던 것은 돈도 없지만,

집 자체를 그대로 보존하기 위해서였다,

불편함을 토로하는 정동지의 불만을 깔아뭉갠 것이 미안할 뿐이다.

 

그런데, 보름 전 느닷없이 옆집에서 우리 집에 신식차양을 달아주겠다는 제안을 한 것이다.

호의를 거절할 수도 없었지만, 좋아하는 정동지를 보며 어찌 반대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다음 주에 정선군청에 들어갈 작정으로 구체적인 기획안까지 만들어 두었다.

그 집에 보관된 동강자료는 물론 집 자체를 정선군에 넘겨주기 위해

실무자를 만나 손 털 계산을 한 것이다.

 

또 하나는 인사동에 대한 자료를 정리하기 위해 몇 년 동안 손대지 않고

쳐 박아 둔 녹번동 필름박스를 정리하기로 작정했다는 점이다.

그 필름을 스캔 받은 후 정선 필름과 바꾸어왔다면 이미지는 살아남지 않았겠는가?.

한꺼번에 일어난 이 일련의 갑작스런 변수들이 화재와 연관은 없었을까?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할 지 걱정이 태산 같다.

아무래도 윗만지산의 마지막 우환은 내 차례가 될 것 같다.

이년 쯤 후에는 동자동 쪽방 일도 마무리 될 것으로 여겨진다.

재건축이 끝나 다들 한 곳에 머물게 되면 더 이상 할 일은 없다.

그 때쯤 집터에 오두막 지어 살다 만지산에 뼛가루를 뿌리게 할 예정인데, 뜻대로 될지 모르겠다.

 

동네 주민들이 위로 차 여럿이 모여 술잔을 돌렸으나

예전부터 살던 주민은 최연규 내외와 김순배씨 뿐이었다.

 

다들 낯설거나 안면 정도 있었는데, 술 마시는 분위기가 무거워 노래 한 곡 불렀다.

그런데, 웃기려 불렀던 성냥공장 노래마저 노동가처럼 비장감이 뚝뚝 흘렀다.

 

“만지산 성냥공장

성냥 만드는 아저씨

하루에 한 갑 두 갑

낱 갑이 열두 갑

바지 밑에 감추고서

정문을 나오다

바지 밑에 불이 붙어

자지털이 다 탔네

만지산 성냥공장

아저씨는 백자지 백자지“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