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의 떡 Rice cake of painting

김형민/ KIMHYUNGMIN / 金炯旻 / painting

2023_0906 2023_0919

김형민_그림의 떡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0×110cm_2023

김형민 인스타그램_@gom.artstudio

 

초대일시 / 2023_0906_수요일_04: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지아트 갤러리

G-ART Gallery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34

Tel. +82.(0)2.722.7955

cafe.naver.com/gartgroup

 

''은 음식의 한 종류를 지칭하는 단어이지만 본래의 의미와 다르게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떡값', '떡고물'과 같이 서로 떡을 나누어 먹던 사회적 맥락에서의 특징을 표현하기도 하고 '떡 치다'와 같이 묘한 어감과 통속적인 이야기를 담은 속된 표현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이번 개인전의 제목 그림의 떡은 혼밥의 시대가 된 오늘 다시 한번 떡이 지닌 의미들을 상기하고자 한다. 이사나 신장개업 또는 결혼이나 돌잔치 등 이웃과 손님에게 돌렸던 떡. 하지만 이러한 나눔의 문화를 상징했던 떡은 '떡판' '떡대' 등 최근 사람을 놀리는 용도와 부정적인 의미 또한 포함하게 되었다.

 

김형민_그림의 떡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1×61cm_2023

김형민_그림의 떡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50×60.5cm_2023
김형민_그림의 떡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17×91cm_2023
김형민_그림의 떡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3×91cm_2023
김형민_그림의 떡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3×91cm_2023
김형민_그림의 떡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2×130.5cm_2023

김형민_그림의 떡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93.7×130.2cm_2023

혼밥족과 1인 가족이 늘어나면서 직접 떡을 지어 먹는 가정은 극히 일부분이고 적은 양의 떡을 전문점에서 구입해서 먹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의 개인주의 확장과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는 이웃과는 말도 섞지 않으려는 모습 그리고 팽배해진 공허함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전시 그림의 떡은 떡은 있되 나눔이 없는 현대사회의 아쉬움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작가노트 중에서) 김형민

 

 

< 명량 > 에 대한 감상평은 극과 극으로 갈린다. 문화예술인과 유명인들이 이 영화를 어떻게 보았는지 12인의 감상평을 모아보았다. 이순신이 오늘 우리 사회에 주는 의미를 말하기도 했고, 영화를 둘러싼 사회현상을 논하기도 했다.

김훈 (소설가· < 칼의 노래 > 저자)

재미있는 영화지만 서사 구조가 매우 약했고 스토리라인 또한 빈약했다. 무엇보다 인간의 내면이 잘 드러나지 않았다. 특히 적장을 장수답게 그려주었으면 했는데 희화화했다. 대수롭지 않은 존재로 그려서 아쉬웠다.

노 젓는 격군들에게까지 시선을 준 것은 좋았다. 노를 젓는 대목은 아주 잘 만든 대목이다. 그들의 고통과 인내심 그리고 용기와 감격이 나타났다. 배는 노를 젓는 격군들의 힘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전투가 벌어지면 명령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그들은 잔혹하게 훈련을 받는다.

백병전 등 사실과 맞지 않는 내용이 있는데, 그 자체가 치명적 결함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보다는 기왕 그렇게 많은 돈을 들였으니 명량해전에서 이순신 함대의 전술 전략이 무엇이었는지 전모를 보여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게도 국지적 스펙터클에 주력했다. 그때 일자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왜 전투 전날 벽파진에서 전라우수영으로 이동을 했는지, 그 의미를 좀 더 풀어줬어야 했다.

 

 

                                                        노를 젓는 격군들에 시선을 준 것이 영화 < 명량 > (사진)의 장점으로 꼽히기도 한다.

이순신이 이슈만 되면 정치인들이 12척으로 330척을 물리치겠다며 설치고들 하는데, 제발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다. 12척 가지고 나가면 백전백패한다. 이순신이니까 이긴 것이고, 이순신이니까 병사들이 따라간 것이다. 그들이 12척 가지고 따라오라면 따라가지도 않는다. 12척밖에 없는 사태가 발생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 현대의 영웅이다. 현대에 적용할 수 있는 삶의 방식으로 생각하면 큰 잘못이다.

김제동 (방송인)

치열한 해상전투 장면보다 그 밑에서 노에 줄을 감고 노를 젓는 격군들의 모습이 더 인상적이었다. 두려움과 고통에 맞서면서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나간 그들이 바로 초인이고 영웅이었다. 이순신 장군을 구하기 위해 치마를 흔들고 어선을 전선처럼 위장해 대기하며 응원한 백성들 모습이 오히려 관객의 뭔가를 건드린 것 같다. 그들은 또 다른 이순신이었다.

그들의 처지라면 어땠을까? 그들에게 이순신은 어떤 존재였을까? 임금도 도망가고 모두가 도망가는데 누군가 끝까지 함께하고 있구나. 저 사람은 우리와 함께 빠져 죽을지언정 우리를 두고 도망가지는 않겠구나, 그런 생각에, 명령 체계가 아니라 신뢰에 따라 움직였던 것 같다.


김갑수 (시인·방송인)


처음 문제 제기를 했던 진중권 교수의 평이 적합하다고 본다. < 명량 > 의 최대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인물의 복합성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인물의 도식화가 너무 심하다. 일본 왜장들의 면모가 소년소녀 명랑소설의 악역 정도로 그려졌다. 이순신은 압도적인 영웅으로, 왜장들은 간악한 인물로 너무 단순하게 그렸다.

그런데 왜 인기일까? 리더십에 대한 염원을 시의적절하게 제시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사회는 위기에 처해 있고 난파하는 중인가' 하는 의구심이 전 사회적으로 퍼져 있다. 심지어 정권 자체가 위기를 조장한다. 위기를 강력하게 조장하면 사람들이 주류에 기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 명량 > 에는 위기를 돌파하는 모습이 처절하게 그려져 있어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다. 일종의 메시아니즘인 것 같다.


김성수 (문화평론가)


대중은 문화 상품의 소비를 통해 메시지를 전한다. < 명량 > 에 대한 이상 소비 현상은 스크린 독과점이나 '국뽕(국가와 히로뽕을 합친 말로 국수주의를 조롱하는 속어)'만으로 도저히 해석해낼 수 없는, 그 자체가 우리 사회를 향한 강렬한 메시지다. 확실한 사실은 < 명량 > 이 시대적 요구에 충실한 서사를 구현해냈다는 점이다. 이순신을 죄책감에 시달리는 상처받은 위기의 장수로 그려놓고, 먼저 죽고자 나서는 그에게 강한 공감을 느끼게 하는 < 명량 > 의 작전은, 전태일 서사의 현대적 해석이기도 하다.

우리는 마피아를 파문하고 자본주의에 사형선고를 내리고도 방탄차를 타지 않는 프란치스코 교황이나 33일이 넘게 단식을 하면서 쓰러져 죽겠다고 청와대로 향하는 유민 아빠에게서 그 리더십의 작동 원리를 확인한다.


조선희 (서울문화재단 대표이사·전 < 씨네21 > 편집장)


며칠 전 서울 인사동의 술자리에 앉아 있는데, 어느 순간 돌아보니 옆자리, 뒷자리, 앞자리에서 모두 "이순신" "울돌목" 어쩌고 하며 < 명량 > 얘기를 하고 있었다. 우리 일행 셋도 모두 < 명량 > 을 본 사람들이었다. 그때부터 우리도 < 명량 > 에 대해 떠들기 시작했다. 이런 걸 '대세'라 한다.

< 군도 > 처럼 캐릭터나 스타일이나 스타 마케팅까지 신경 쓴 웰메이드 영화도 있었지만 대중은 < 명량 > 을 선택했다. < 명량 > 은 캐릭터의 진정성·영웅성으로 단도직입, 초지일관했고 연기와 연출이 그것을 구현해내는 데 성공했고 그리하여 그것이 대중에게 전달됐다는 얘기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요인은 실제 이순신이라는 인물의 영웅성이 워낙 압도적이라는 점이다.

박정희 시대가 정체성 확보와 대국민 전략 차원에서 광화문에 이순신 동상을 세웠고 그가 세종대왕이 나오기 전까지 수십 년간 수도 서울의 상징적 공간을 독점해왔지만 다행히 이순신은 그럴 자격이 있는 것이다. 요사이 우리 사회가 배와 사람과 명예를 초개처럼 버리고 도망친 선장 때문에 좌절하고 있었기 때문에 < 명량 > 에 더욱 꽂힌 건지도 모른다. 맞아, 우리에겐 이순신이 있었지… 하며.

김혜준 (전 부천문화재단 대표·전 영화진흥위원회 사무국장)

< 명량 > 은 '공감력' '도덕적 상상력' '시적 상상력'을 대입해볼 수 있는 영화다. 누구 하나 다른 사람보다 덜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했느냐 여부로 이순신의 승리와 왜군의 패배가 갈렸다. 책임지려 하지 않고 자기만 살겠다고 꽁무니를 빼거나 전리품을 앞에 두고 제 몫 챙기기에 바쁜 족속들에 대한 반감. 관객은 영웅에 주목했다기보다, 평범한 사람들과 똑같은 처지에서 쓰라린 아픔을 딛고 자신의 모든 걸 걸었던 실사구시형 지도자의 진정성에 공감했다. 결국 < 명량 > 은 이순신의 공감력이 관객의 공감으로 이어진 영화다.


김형민 (다큐멘터리 프로듀서)


배우 최민식이 이순신에게 압도됐다고 했는데 나는 이순신에게 압도된 것은 최민식이 아니라 시나리오였다고 생각한다. 이순신이라는 절대적 카리스마 앞에서 영화 시나리오가 굴복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는 뜻이다. 이순신은 끝내 인격화하지 못한 성웅 이순신으로 남고 말았고, 나머지 백성과 장수와 졸병들은 그 성웅이 비춰주는 햇살에 감읍하는 산천초목의 풀잎사귀에 그치고 말았다. 그리고 적군들은 그 빛을 더욱 강하게 하는 명도 대비용 숯검정들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영은 (웅진서가 대편집자)


330척에 맞서 죽기 위해 12척의 배에 오르는 그 경험을 제공하는 영화. 그 두려움을 실감나게 하는 디테일. 영화 < 명량 > 의 핵심은 '두려움을 용기로 바꾼다'는 것을 표방하면서 세대 전쟁의 전선을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라고 본다. 가상 전투게임 세대와 현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가투(가두투쟁)' 전략을 짜던 세대, 나라가 사라질지도 모르던 풍전등화를 겪은 그 윗세대 간의 전선이 달랑 12척의 배에 오르는 순간 사라지고 하나가 되게 만드는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 이 영화의 숨은 의도처럼 느껴졌다. 이런 제작, 연출 의도가 성공한 것이 흥행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 명량 > 은 330척의 왜선(위)을 격파하는 해상전투 장면에 상영 시간 절반을 할애했다.


이준석 (새누리당을 바꾸는 혁신위원회 위원장)

영화 < 명량 > 의 흥행 이후 기성 정치권 인사들이 '이순신'에 스스로를 비유해서 언급하려 하지만 사실 국민은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을 보면서 서인과 동인의 붕당을 떠올릴 수도 있다. 우리 편 상대 편 가르지 않고 12척의 배가 모두 하나의 목적을 위해 힘을 합치는 모습을 국민은 보고 싶어한다.

김헌식 (문화평론가)

< 명량 > 을 둘러싼 현상이 흥미로웠다. 보수는 질서 유지 차원의 논리를 강화하려 국가와 공동체 가치 차원에서 이순신을 끌어안고, 진보는 개인주의적 자유주의 논리를 강화하다 보니 이순신에게 대중이 투영하는 욕망을 놓치고 있다. 이 때문에 많은 대중이 진보의 자기중심적인 평가의 획일성과 폐쇄성에 염증을 느낀다. 오히려 다양성을 용인하지 않고 있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어느새 보수는 나라와 사회를 염려하는 세력으로, 진보는 자기의 관점과 세계관을 고수하며 다른 이들에게 강요하는 존재가 되었다.

고필헌 (만화가·필명 메가쑈킹)

내가 지금껏 알고 있었던 이순신 장군은 탈영병의 목을 베는 일본식 사무라이의 모습은 아니었다. 최민식이라는 배우를 좋아하긴 하지만 이순신 장군 역할을 맡기엔 너무 뜨거운 배우가 아니었나 싶다. 김명민이 더 어울렸을 것 같다. 냉철한 사고를 지닌 장군, 그게 내가 기대했던 이순신 장군의 모습이다. 해전 장면이 전법적으로 너무 소홀하게 다뤄진 것 같다. 그래도 영화 상영 시간의 절반을 해상전투 신에 할애한 감독의 뚝심은 칭찬하고 싶다.


벵자맹 주아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연구원)


이 영화가 왜 인기가 많은지 이해하지 못하겠다. 애국심이 너무나 무겁게 그려져 있다. < 태극기 휘날리며 > 나 < 해운대 > 처럼 한국에서 1000만명 이상 관객이 든 영화들은 유독 애국심을 강조하는데 그 이유가 궁금하다. 시나리오도 좋지 않은 것 같다. 이야기의 힘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리 싸우는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다고 할지라도 누가 만드느냐에 따라 예술이 되고 신화가 된다. 구로사와 아키라가 그렇다. 그런 재능을 이 영화에서는 보지 못한 것 같다.

시사 IN / 고재열 기자 / scoop@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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