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영 Projection

김영희展 / KIMYOUNGHEE / 金英姬 / painting 

 

2021_0707 ▶ 2021_0713

 

김영희_Another Landscape - City 1_캔버스에 유채_97×145.5cm_2019

 

초대일시 / 2021_0707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갤러리 H

GALLERY H

서울 종로구 인사동9길 10

Tel. +82.(0)2.735.3367

www.galleryh.onlineblog.naver.com/gallh

 

 

예술은 어떻게 위로하는가 ● 어떤 의미에서, 모든 그림은 자화상이다. 더구나 그것이 화가의 첫 개인전임에야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아이가 모든 타자에게 자신을 반영하듯, 첫발을 내딛는 화가의 모든 그림에는 그 자신이 있다. ● 하지만 타자는 어찌해도 결국 타자인 것처럼, 그 어떤 작품도 완전한 의미에서의 자화상이 될 수는 없다. 아무리 자신을 소환하여도 언제나 손가락 사이로 새어 나가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영리한 화가는 색다른 오브제로 자신을 그린다. 화가, 김영희에게는 그것이 병이다.

 

김영희_Another Landscape - City 2_캔버스에 유채_60.6×90.9cm_2020
김영희_Another Landscape - City 3_캔버스에 유채_117.6×72.7cm_2020
김영희_Another Landscape - Hommage 2_캔버스에 유채_90.9×60.6cm_2021

병(Bottle) ● 화가는 무엇으로 그리는가? 투영(投影, projection)이다. 사실, 이 질문에는 화가의 수만큼이나 많은 대답이 있겠지만, 그 모든 대답에는 그것들이 투영된 것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대상이 무엇인지, 계기가 어떠했는지는 중요치 않다. 그 오브제에 자신을 투영하였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김영희 작가에게는 그것이 병이었다. 우연히 들어선 철물점에서 변기를 발견한 뒤샹이 그러했듯 화가는 병을 선택하여 자신을 투영하였다. ● 그래서 화가는 자신의 병을 일컬어 "존재"라고 일컫는다. 물론, 병 또한 존재임이 당연하므로, 화가가 말하는 "존재"는 오히려 현존재(現存在, Dasein)에 가까울 것이다. 적극적으로 존재하기를 선택한 존재인 것이다. 화가의 그림에서 병들이 굳건히 서 있는 이유가 그것이다. 대지에 발을 붙인 사람처럼, 화가 그 자신처럼, 분연히 존재를 모색한다. 그 모색 끝에 병은 캔버스에 다다랐다. 현존재란 시간을 내밀히 품어와 지금 여기(da)에 이른(sein) 존재인 것처럼, 화가의 병도 시간을 품어 여기까지 이르렀다. 그래서 화가의 병은 언제나 시간을 안고 세계를 점유하여 그의 앞에 당도한 빈 병이다. ● 다행이다. 빈 병이어서. 여기까지 이르며 비워진 병들은 대신 세상을 담아왔다. ● 때론 피는 꽃을 담기도 했고, 때론 지는 꽃잎을 담기도 하였다. 가끔 병이 지낸 시간을 담기도 했고, 간혹 닮고자 하는 어떤 예술가를 담기도 했다. 그리고 화가를 둘러싼 도시를 담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을 여기서 논할 수 없으니 여기에서는 도시에 관해 말해보자.

 

김영희_Another Landscape - Hommage 1_캔버스에 유채_91×45.5cm_2021
김영희_Another Landscape - Time 1_캔버스에 유채_91×45.5cm_2020
김영희_Another Landscape - 봄(See) 1_캔버스에 유채_117×72.7cm_2021

도시 ● 도시는 글이다. 건물은 단어이고, 거리는 문장이다. 김영희 작가의 도시는 그가 말하고자 하는 글이다. 그 글은 병에 담긴 편지처럼, 병에 담겨 캔버스에 옮겨졌다. 그러나 편지는 기록이 아닌 추억이며, 추억이란 언제나 왜곡을 동반한다. 병에 담긴 풍경도 왜곡되어 있다. 우리의 삶이 그런 것처럼, 병에 담긴 화가의 풍경도 명료하지만 왜곡된 기억이고, 또렷하지만 부분적인 세상이다.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선택해야만 한다. 모든 것을 사랑하는 전체주의자가 될 수는 없다. 병에 길어 올려진 풍경은 평범한 우리와 같은, 하지만 좀 더 세심하고 예민했던 화가가 선택한 풍경이고, 경험한 세상이다. ● 그래서인지 화가의 그림은 고요하고 적막하다. 폴 발레리(Paul Valery)가 시를 두고 "소리와 의미 사이의 긴 망설임"이라고 했던 것처럼, 김영희 작가의 그림 속 고요함을 보고 있자면, 미술이란 시각과 지각 사이의 긴 여운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의 그림은 그 여운을 떠올리기라도 하듯 고요함에 침잠하여있다. ● 이 슬픔과도 같은 고요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김영희_Another Landscape - 봄(See) 2_캔버스에 유채_72.7×53cm_2021
김영희_Another Landscape - Still life 1_캔버스에 유채_117×72.7cm_2020
김영희_Another Landscape - Slow_혼합재료_162.2×112.1cm_2021

 

병(病) ● 예술가란 사람들은 말과 이론을 다루는 비평가와는 다르다. 그들은 앓는 사람이거나, 앓았던 사람이다. 아스팔트에 수많은 생채기를 입은 그림 속의 병처럼, 살아오는 동안 많이 다친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쓰지 않고는 사는 법을 모른다던 「혼불」의 최명희처럼, 그들은 그리지 않고 사는 법을 모른다. 그 시기가 언제인지는 화가마다 다를 테지만, 결국 그린다. 이것은 스스로를 치유해가는 과정이다. 그들은 아파도 그리고, 아파서 그린다. 그래서 김영희 작가의 병은 치유하는 공간이다. 업다이크가 예술은 영혼이 숨을 쉴 수 있는 여유 공간을 제공한다고 말했던 것처럼, 그의 빈 병은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을 내어준다. ● 그렇다. 우리는 쉬어야 한다. 쉬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작가의 작품 중 몇몇 병이 누워있는 것은 그런 연유에서일지도 모른다. 쉼.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사명이다. 나는 가진 것이 탄식밖에 없어 글로 탄식하여 작가를 위로하지만, 작가는 그림으로 우리를 위로하며 쉴 공간을 만들어 주고 있다. ● 그는 포기하지 않고 우리를 끌어안으며 쉬게 해준다. 화가의 작품이 하이퍼리얼리즘에 가까우면서도 망막에 피로감을 주지 않는 이유는 그런 쉼이 있기 때문이다. 화가는 아마 앞으로도 포기하지 않고 세상을 껴안을 것이다. 그가 껴안는 품이 얼마나 넓어질지, 그리하여 병 속의 세계가 얼마나 따뜻해질지 기대가 된다. ■ 문성준

 

 

Vol.20210707e | 김영희展 / KIMYOUNGHEE / 金英姬 / pain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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