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은 정동지와 아산으로 봄나들이 갔다.

요즘은 몸이 편치 않아 꼼짝하기 싫지만, 오래 전부터 한 약속이라 어쩔 수 없었다.

장터나 유적지로 떠나는 촬영 길이 아니라, 모처럼 김선우를 만나러간 것이다.

 

양햇살이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전갈도 있었지만, 겨우 내 한 번도 가보지 못했으니, 어찌 궁금하지 않겠는가

선우와 만나기로 한 장소는 집터가 있는 곳이 아니라 한우로 유명한 염치면 식당이란다.

 

도착하니 김선우, 양햇살, 김창복씨가 먼저 와 있었다.

햇살은 폐차시킬 정도의 큰 사고였으나, 천만다행으로 턱만 조금 찍혔지 다른 곳은 멀쩡했다.

'하나님이 보호하사'였다. 아이쿠! 그 날 햇살이가 이름 바꾸었다고 알려주었으나 깜빡 잊어 버렸네.

육회비빔밥을 시켜 아침 겸 점심을 맛있게 먹으며, 이야기 듣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다.

 

2년 전 아산 현충사 둘레 길 한적한 곳에, 어느 목수가 살던 오래된 헌집을 샀다기에 구경 간 적이 있는데,

그 집을 개보수하여 미술관으로 만든 것이다.

어떻게 변신했는지 보고 싶어 김창복씨 따라 현장으로 달려갔다.

 

입구에는 백암길185 미술관이란 조그만 현판이 붙어 있었고,

오래전 수박 먹던 마당에는 여러 명이 쉴 수 있는 휴식공간도 만들어 놓았더라.

폐가나 다름없는 허름한 시골집이 아담한 갤러리로 변신한 것이다.

 

현관문을 열어보니 이전과는 전혀 다른 구조의 갤러리가 되어 있었는데,

벽에는 인사동 나무화랑에서 전시했던 정영신의 어머니의 땅사진 26점이 걸려 있었다.

 

하잘 것 없는 자재도 버리지 않고 재활용한 알뜰함이야 말 할 것도 없고,

바닥에는 황토와 콩기름 먹인 장판지가 깔려 있었는데, 어릴 때 살던 고향집 방바닥을 떠올리게 했다.

선우의 추진력과 섬세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돈만 있다면 건축업체에 맡겨 그보다 더한 것도 만들 수 있으나, 돈 들이지 않고 힘 모아 만들어 더 애착이 갔다.

요즘은 건축자재비보다 인건비가 더 비싸 업자에게 맡겼으면 당연히 허물고 새로 지었을 것이다.

 

청년 공감문화 플랫폼을 끌어가는 김선우는 작은 여장부다.

공동체의 김창복씨가 다방면에 경험 있는 전문가이긴 하나,

남의 일손은 전혀 끌어들이지 않고, 연약한 햇살이 까지 달라붙어 함께 만들었다고 한다.

 

아산 온천동 상가의 공유공간 마인에 이어 두 번 째 만든 백암길185 미술관은 현충사 산책길이라,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하는 아산의 명소가 될 것으로 짐작된다.

 

뒤늦게 김온도 나타났는데, 전시된 사진을 바라보며 따뜻한 방바닥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가족들이 둘러앉아 정담 나누던 아련한 추억까지 떠올랐다.

 

그런데, ‘백암길185 미술관으로 끝나지 않고, 다음 달부터 본거지에 내가 머물 집을 짓겠다는 말에 겁이 덜컹 났다.

정선 작업실이 불난 후 여러 지인이 후원금을 보내주어, 함께하는 공간을 만들어 초대하겠다는 약속은 했지만,

다 버려야 할 때 집은 지어 무엇 하겠는가?

 

화재 보험에서 나온 이천만원을 보태어 조그만 거처를 만든다지만, 마음의 여유가 전혀 없었다.

물질과는 거리 둔지 오래지만, 사진과 좋아하던 사람까지 싫어지는 판에...

 

요즘은 전시장 나들이는 물론 웬만한 모임에도 가지 않고 동자동에서 지내는데,

정동지 사는 녹번동보다 아무도 없는 쪽방이 더 편하다.

 

'버려진 사람의 초상' 사진 찍으며, 쉼 없이 죽어가는 사람처럼 눈 감고 싶다.

 

사진, / 조문호

 

 

 

사진 / 혜선스님

 

정영신씨가 아산 김선우씨로부터 전화를 받았단다.

엊그제 정선화재 현장에 찾아 온 선우씨가 일을 흐리멍텅하게 처리하는 나를 보며 한 말 중에 할 말을 잃게 했던 말은 무슨 일이던지 원칙을 따라야 한다는 말이었다. 아무리 사람이 우선이지만, 원칙이라는 말에는 더 이상 할 말을 잃었다. 내가 여지 것 줄 창 주장해 왔던 일도 원칙이 아니던가? 그동안 가까운 지인들 까지도 원칙을 어기는 잘못된 일은 공개적으로 공격하여 많은 분들이 등을 돌리지 않았던가? 잘못한 일에 남과 내가 어디 있겠는가? 다들 듣기 좋은 소리만 하고 잘못된 일은 두루 뭉실 넘어가니 세상이 이 지경이 아니던가?

그렇지만 이번 일은 돈 즉, 스스로의 이익과 관련된 문제라 좋게 해결하려고 했던 것이다.

 

 

 

지난 17일 아침, 정영신씨와 정선 만지산 화재 현장으로 떠났다. 당장 기거할 컨테이너 박스라도 구해야 했지만, 다음 날 보험사 직원과 손해사정사가 만나자고 했기 때문이다. 지난 번 화재 현장에 갔을 때는 윤인숙씨가 보험 던 게 없다고 했는데, 뒤늦게 확인한 바로는 본인은 탈 수 없지만, 피해자에게 보상해 줄 수 있는 손해보험이 있다는 연락을 한 것이다. 그럴 줄 알았더라면 그때 꼼꼼히 증거 자료를 찾아 두어야 하는데, 이미 일부의 폐기물은 버려졌고, 남은 것도 포크레인으로 헤집어 찾기가 어려워 진 터라 걱정되었다.

 

 

 

화재 난 다음날 현장에 갔을 때도 불 탄 현장에 포크레인이 와 있었는데, 어떻게 화재원인도 규명하지 않고 현장을 헤집어 놓았는지 모르겠다. 보험금을 받아내려면 어떤 자료를 어떻게 소명해야 하는지를 몰라 아들 햇님이에게 손해사정사 한 분을 연결해 달라고 부탁해 둔 것이다.

 

 

 

정선으로 가다 양평 쯤에서 ‘성심건업’이라는 이동주택 제작소가 있어 한 번 들려 보았다.

농막에서부터 크고 작은 다양한 견본주택을 만들어 놓았는데, 생각보다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건축허가 없이 갖다 놓으려면 6평짜리 농막밖에 없지만, 사람이 기거할 수 있는 주택형 농막은 최하가 2천만원 대였다. 심지어 일억이 넘는 이동주택도 있었다. 완전 우물 안 개구리인 셈이었다. 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주변인들이 보내 준 성금이 천만원이나 들어 와 그 돈으로 농막이 아니라 ‘예술창고’라는 집을 지을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좀 더 생각해 보기로 하고 나왔는데, ‘예술창고’를 제대로 지으려면 손해보상을 한 푼이라도 더 받는 방법밖에 없었다. 마침 윤인숙씨가 정영신씨에게 전화를 걸어 와 불난 방안에 명품가방이나 돈 나가는 물건이 많았다고 진술하라며 부추겼지만, 집에 없는 명품을 어떻게 거짓말 할 수 있단 말인가? 명품보다 우리에게 더 가치 있는 것은 필름 원판이라며 자위했으나, 손해사정사 말도 손해배상 규정에 필름은 가치가 인정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동안 전시하고 남은 작품도 집안 창고에 수 없이 많았는데, 그 사진 판매금액을 책정해 배상을 청구하란다. 사진은 원판만 있다면 다시 제작할 수 있지만, 필름이 없으면 사진을 만들 수가 없는데, 이런 개떡 같은 보상법이 어디 있는가?

 

 

 

배상한도가 일억이라는데, 그런 식으로 산출하려면 아무리 계산해도 얼마 받지 못할 것 같았다. 손해가 돈으로 따질 수 없는 지경인데, 이제 보험사를 상대로 싸워야 할 문제가 남았다.

 

 

 

일단 정선 집보다 읍내부터 들렸다. 올해는 농사를 짓지 않기로 했지만, 빈 땅에 노력이 덜 가는 옥수수라도 심으려면 모종도 사야하고 농기구도 구입해야 되기 때문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 듯 마침 정선장이었다. 나물이 많이 나는 요즘 철에는 정선장에 엄청 많은 인파가 몰렸으나 코로나 때문인지 장터가 썰렁했는데, 이제 정선장도 봄날은 간 것 같았다.

 

 

 

비는 부슬부슬 왔지만 필요한 물건들을 산 후, 아침 겸 점심을 먹기 위해 ‘정선아우라지’식당에 들어가 곤드레밥을 시켰다. 주인아주머니가 반갑게 맞아주며, 올 해는 작년보다 손님이 더 없다고 불만을 털어 놓았다.

 

 

 

만지산 집에 도착하니 산 위로 구름이 몰려다녔다. 습관적으로 카메라를 꺼낼 수밖에 없었는데, 카메라앵글 속에 불난 화재 현장이 나오니 또 다시 울화가 치밀었다. 가까이 가보니 철재는 모두 수거해 갔고, 나머지 폐기물도 일부 치우고 없었다. 타다 남은 책들만 폐기물 자루에 담겨 길가에 첩첩이 쌓여 있었다.

 

 

 

옥수수 심을 땅에 잡초를 뽑고 있는데, 정영신씨가 아산 김선우씨가 손님 한 분을 모시고 정선으로 오고 있다는 전화를 받았단다. 제2의 공유공간 만드는 일에서 부터 할 일이 태산 같은 사람이 만사를 제쳐두고 그 먼 길을 온다기에 몸 둘 바를 모르겠더라.· 좀 있으니 잘 아는 농막 짓는 분을 모시고 찾아왔는데, 화재현장을 둘러보며 타다 남은 잔재들에 관심을 가졌다.

 

 

 

마침 귤암리 노인회장 이었던 서덕웅씨도 오셨다. 얼마 전 최종열씨에게 회장직을 넘겨주었다며, 내일 아침 노인회 회의에서 작은 성의나마 도울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위로해 주었다

 

 

 

김선유씨가 모셔 온 건축 전문가에게 들어보니, 집 짓는 일이 생각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먼저 밭을 택지로 용도변경부터 해야 하고 설계도면 등 인허가 과정이 까다롭다고 했다. 정화조 설치에서부터 준비해야 할 과정을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다.

 

 

 

집 지을 장소와 임시 기거할 농막 위치까지 알려주었는데, 당장 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며 서둘 일은 아니라고 했다. 우선 당사자 간의 합의가 우선이지만, 보상받을 예산이 정해져야 시작할 수 있지 않겠냐는 말이었다.

 

 

 

창수 엄마로 부터 올라 오라는 연락을 받아 정동지 더러 손님 모시고 먼저 올라가라고 했다. 일찍부터 저녁상을 준비해 두었는지, 가자말자 빨리 오라는 전화가 걸려왔다. 비 오고 흐린 날 파종을 마무리해두어야 잘 자랄 것 같아 먼저 식사하라고 말했는데, 선우씨가 데리러 오기 까지 했다. 좌우지간, 일을 시작하면 끝장을 보아야 하는 더러운 습관 때문에 여러 사람 힘들게 한다.

 

 

 

식사 후에 윤인숙씨와 합의하기 위한 요구조건이나 앞으로의 복안을 설명하며 환담을 나누기도 했는데, 아산까지 가야 할 선우씨 일행은 먼저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술이 한 잔 들어 간 창수엄마 이선녀씨 노랫소리가 분위기를 바꾸어 놓았다. 노래자랑에 나가도 손색없는 실력인데, 서덕웅씨가 정선 아리랑도 한 번 부르라고 부추겼다.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 든다”

 

 

 

한 바탕 놀고 나니 서덕웅씨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때부터 정영신씨의 일이 시작되었다.

요즘 그녀가 하고 있는 ‘길 위의 인문학’ 프로젝트였다. 얼마 전 어머니 인터뷰 대상을 장터에서만 찾기에 사연이 많은 만지산 이선녀씨가 어떠냐고 권한 적이 있었는데, ‘맞다“고 맞장구 쳤다. 이 번 기회에 인터뷰를 하려고 장비까지 챙겨 온 것이다.

 

 

 

예전에 이선녀씨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만지산에서 있었던 시집살이였다면 이번에는 시집오게 된 내력과 우리가 몰랐던 또 다른 애환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이야기가 흥미로웠지만, 먼저 자리에 누울 수밖에 없었다. 요즘 들어 술만 마시면 신체적 장애가 생기는 일이 부쩍 잦아졌다. 이제 술도 그만 마시라는 신호일까? 아니면 그만 살라는 말일까? 아무튼 다리에 힘줄 땡기는 통증까지 찾아와 곤욕을 치르다 잠들었는데, 인터뷰는 잘 끝냈는지 모르겠다.

 

 

 

그 다음 날은 오전 일곱 시밖에 되지 않았는데, 창수가 아침 먹으라며 깨웠다. 덕분에 일찍부터 일 할 수 있어 좋긴했는데, 밖에 나와 보니 구름이 여전히 장관을 이루었다.

 

 

 

호박 심을 구덩이를 파고 있었는데, 귤암리 노인회장 최종열씨가 찾아 와 성금이라며 이십만원을 전해 주었다. 나는 주민등록이 서울 동자동으로 되어있어 이곳 주민이 아닌지라 줄려면 귤암리에 주민등록을 옮겨놓은 정영신씨에게 주어야 할 돈이었다. 나중에 만나면 전해주겠지만, 성의를 고맙게 받아 들였다.

 

 

 

마침, 윤인숙씨가 해선스님께서 한 번 만나고 싶어 한다는 말을 전해 주었다. 무슨 일인지 궁금해 바로 찾아 갔는데, 절 쪽에서 보는 우리 집 전경도 근사했다. 스님께서는 불 난 밤에 이 곳 절에서 지켜보며 핸드폰으로 사진과 동영상까지 찍었다고 했다. 불난 현장을 보지 못해 궁금했는데, 스님 덕에 그날의 생생한 현장을 볼 수 있었다.

 

 

사진 / 혜선스님

 

십여 년 전에 보여 드린 적 있는 ‘한국불교미술대전’ 전집 이야기도 꺼내시며, 그 때 갖고 싶었지만 한 질 뿐인 책이라 차마 사고 싶다는 말을 못 꺼냈는데, 차라리 샀더라면 불에 타지 않았을 거라며 안타까워 하셨다. 그 책은 이십 여 년 전, 이년에 걸쳐 사진을 찍어 원고를 제공했으나 출판사가 부도나는 바람에 천만 원이 넘는 원고료를 받지 못한 책이 아니던가? 도록도 마지막 남은 책이었지만, 이제 필름까지 타 버렸으니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사진 / 혜선스님

 

보살님이 내 온 차를 마시며 내 의중을 물어 오셨다. 짐작컨대 옆집 윤인숙씨가 쓰리쿠션을 친 것 같았다. 그래서 윤인숙씨 에게 이야기하듯 소상하게 말을 전했다. 두 집이 본래 한집이었던 집을 잘라 판 것이 문제였다며, 여간 불편하지 않다고 하소연 했다.

 

 

 

우리마당을 자기네 주차장처럼 사용하는 거야 그럴 수도 있지만, 여러 마리의 개가 오가며 여기 저기 똥을 싸거나 농작물을 짓밟는 등 피해를 주어왔고, 그물망을 쳐 방목하는 수많은 닭소리 조차 또 하나의 공해였다. 그리고 수시로 찾아오는 손님들도 문제라고 말했다. 화재 난 그날도 네 사람이 찾아와 밤늦도록 고기를 구워 술을 마셨다는데, 매번 그냥 오는 손님이 아니라 그들이 받아들이는 영업의 일환이었다. 얼마전 불 난 집 터 옆에 있는 밭을 사서 농막까지 만들어 두었으니, 지금의 집터는 양보하고 그 쪽으로 옮겨 살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

 

 

 

우선 불편에 앞서 오래전부터 구상해 온 복안도 설명했다. 내가 펴낸 ‘동강백성들’ 포토에세이 집과 ‘두메산골 사람들’ 사진집을 바탕으로 동강사람들의 애환이 담긴 ‘동강사람들’ 자료관을 만들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 내가 소유한 400여 평으로는 땅이 부족하기도 하지만, 옆집의 가축 방목이나 영업행위가 걸림돌이 아닐 수 없었다. 내가 집 지을 여력이 없어 땅과 자료만 정선군에 넘겨주면 건축은 정선군에서 추진하는 기획안까지 만들어 놓았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그 정도의 요구면 충분히 들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다시 일하러 내려 왔더니, 보험회사 직원이 찾아와 서류를 작성하기 시작했고, 뒤 이어 아들이 선임해 준 손해사정사 김민수씨도 도착했다. 김민수씨는 물증을 찾기 위해 불난 현장을 헤집기 시작했는데, 나와 정동지 모두 동원되어 그를 도와주었다. 그러나 이미 대부분의 흔적들이 소실된 후라 별로 찾아내지 못했다.

 

 

 

김민수씨가 찾은 중요한 것은 120필름 열다섯 장이 붙어 있는 비닐 파일이었다. 내가 찾은 것으로는 화가 강찬모씨 그림으로 추정되는 캔버스 천을 비롯하여 일세기가 지난 뷰카메라 필름케이스 가림막으로 보이는 알미늄 철판만 주웠을 뿐 필름용 카메라와 암실장비 등의 부품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그 외는 85년‘동아미술제’ 대상받은 상장 잔재와 불타다 남은 나무액자 조각뿐이었다.

 

 

 

지난번에 왔을 때 주워 보관하고 있는 90년도에 전시했던 11X14인치 규격의 ‘전농동588’ 사전첩 일부는 소중한 물증인 셈이다. 이웃 주민이 기념으로 챙겨 간 ‘87민주항쟁’ 사진첩 일부도 다시 받아와야 할 처지가 되었다. 더 이상 찾아내기가 힘들어 찾은 자료만 촬영해 두고 맡겨놓았다.

 

 

 

일 억 정도 보상받으려면 3억 정도의 자료가 나와야 한다며 보상 받게 될 금액이 얼마 되지 않을 것이라는 부정적인 소견을 상세히 들려주기도 했다. 윤인숙씨 더러 불난 집터를 양보하고 다른 곳으로 옮겨 살 의향이 없냐고 물어 본 모양인데, 전혀 그럴 생각이 없다며 잘라 말했다고 한다. 소실된 집기나 비품 명세를 적을 용지를 전해주며 다시 연락하겠다며 김민수씨도 떠나버렸다.

 

 

 

우리도 일을 마무리하고 돌아 올 수밖에 없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가해자나 마찬가지인 윤인숙씨가 피해보상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모든 책임을 보험사에 떠넘기며 일체의 대꾸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동안 주위에서 변호사를 선임해야 한다는 충고를 끈임 없이 했지만, 이웃의 정리를 생각해 마다하지 않았던가?

 

 

 

운전 중에 아산의 김선우씨가 정영신씨에게 전화를 걸어 와 변호사를 선임해야 할 이유를 조목 조목 이야기하며 다시 설득하는 것 같았다. 변호사가 선임되어야 소실된 자료의 중요함을 변호해 보험사로부터 적정한 보험금을 받아 낼 수도 있지만, 배 째라는 윤인숙씨의 재산추적까지 가능하다는 것이다. 정영신씨는 나더러 의견을 물어 왔지만, 법적으로 갈 생각은 없기도 하지만, 피해 입은 땅이 정영신씨 땅이니 당신이 판단하라고 미루었다.

 

 

 

사실상, 화재현장에는 그동안 정영신씨가 전시해 온 장터 작품도 모두 보관해 두는 함께 사용하는 공간이기도 했지만, 그 집 땅 역시 정영신씨 소유나 마찬가지다. 5년 전 내가 동자동으로 들어오며 정영신씨와 이혼할 때, 돈이 없어 위자료 조로 넘겨 준 땅이기 때문이다. 당시 양해각서만 작성해 두고 아직까지 명의 이전을 못해 준 것은 신용카드대금 천 백오십 만원을 연체하여 채권추심사인 ‘미래신용’에 땅이 압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몇 개월 전 ‘신용회복위원회’에 채무 조정을 신청해 정해진 납입금을 여섯 차례 납부했으니, 머지않아 압류만 풀리면 등기 이전해 주어야 할 땅인지라 그가 결정할 문제였다.

 

 

밤늦게야 도착해 잠들었는데, 이틀 날 다시 김선유씨로 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이번엔 나도 들으라고 전화소리가 들리도록 외장 스피커를 켜두어, 전화내용을 상세히 엿들을 수 있었다. 변호사를 선임해야 하는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하며, 왜 원칙을 지키지 않느냐며 나무라는 말에 더 이상 고집부릴 수가 없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휴일인 부처님 오신 날이지만, 정선으로 떠난다는 것이다. 버리려고 쌓아 둔 타다 남은 포대기들을 실고 와 뒤져보기 위해 트럭을 대절했다는 것이다.

 

 

 

‘공유공간 마인’에 내 전시를 유치했다는 연유로 저토록 자신의 일처럼 지극정성으로 돕는데, 어찌 뒷짐만 지고 있을 수 있겠는가? 결국 모든 걸 김선유씨에게 위임한다며 두 손 들고 말았다. 밤늦게는 포대를 다 실고 돌아왔다는 전화를 걸며 트럭 대절비나 부대비용은 나중에 청구하겠다는 것이다. 마치 자기 일처럼 흥분하며 적극적으로 나서서 끝장을 보고 마는 대단한 여장부였다.

 

 

 

김선유씨에게 큰 빚을 지게 되었는데, 다 끝난 인생 말년에 무엇으로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무튼, 다들 마음 상하지 않고 일이 잘 마무리되어 약속대로 정선 만지산에 멋진 ‘예술창고’가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도움 주신 모든 분들에게 다시 한 번 고맙다는 인사를 전해 드린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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