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영 Projection

김영희展 / KIMYOUNGHEE / 金英姬 / painting 

 

2021_0707 ▶ 2021_0713

 

김영희_Another Landscape - City 1_캔버스에 유채_97×145.5cm_2019

 

초대일시 / 2021_0707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갤러리 H

GALLERY H

서울 종로구 인사동9길 10

Tel. +82.(0)2.735.3367

www.galleryh.onlineblog.naver.com/gallh

 

 

예술은 어떻게 위로하는가 ● 어떤 의미에서, 모든 그림은 자화상이다. 더구나 그것이 화가의 첫 개인전임에야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아이가 모든 타자에게 자신을 반영하듯, 첫발을 내딛는 화가의 모든 그림에는 그 자신이 있다. ● 하지만 타자는 어찌해도 결국 타자인 것처럼, 그 어떤 작품도 완전한 의미에서의 자화상이 될 수는 없다. 아무리 자신을 소환하여도 언제나 손가락 사이로 새어 나가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영리한 화가는 색다른 오브제로 자신을 그린다. 화가, 김영희에게는 그것이 병이다.

 

김영희_Another Landscape - City 2_캔버스에 유채_60.6×90.9cm_2020
김영희_Another Landscape - City 3_캔버스에 유채_117.6×72.7cm_2020
김영희_Another Landscape - Hommage 2_캔버스에 유채_90.9×60.6cm_2021

병(Bottle) ● 화가는 무엇으로 그리는가? 투영(投影, projection)이다. 사실, 이 질문에는 화가의 수만큼이나 많은 대답이 있겠지만, 그 모든 대답에는 그것들이 투영된 것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대상이 무엇인지, 계기가 어떠했는지는 중요치 않다. 그 오브제에 자신을 투영하였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김영희 작가에게는 그것이 병이었다. 우연히 들어선 철물점에서 변기를 발견한 뒤샹이 그러했듯 화가는 병을 선택하여 자신을 투영하였다. ● 그래서 화가는 자신의 병을 일컬어 "존재"라고 일컫는다. 물론, 병 또한 존재임이 당연하므로, 화가가 말하는 "존재"는 오히려 현존재(現存在, Dasein)에 가까울 것이다. 적극적으로 존재하기를 선택한 존재인 것이다. 화가의 그림에서 병들이 굳건히 서 있는 이유가 그것이다. 대지에 발을 붙인 사람처럼, 화가 그 자신처럼, 분연히 존재를 모색한다. 그 모색 끝에 병은 캔버스에 다다랐다. 현존재란 시간을 내밀히 품어와 지금 여기(da)에 이른(sein) 존재인 것처럼, 화가의 병도 시간을 품어 여기까지 이르렀다. 그래서 화가의 병은 언제나 시간을 안고 세계를 점유하여 그의 앞에 당도한 빈 병이다. ● 다행이다. 빈 병이어서. 여기까지 이르며 비워진 병들은 대신 세상을 담아왔다. ● 때론 피는 꽃을 담기도 했고, 때론 지는 꽃잎을 담기도 하였다. 가끔 병이 지낸 시간을 담기도 했고, 간혹 닮고자 하는 어떤 예술가를 담기도 했다. 그리고 화가를 둘러싼 도시를 담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을 여기서 논할 수 없으니 여기에서는 도시에 관해 말해보자.

 

김영희_Another Landscape - Hommage 1_캔버스에 유채_91×45.5cm_2021
김영희_Another Landscape - Time 1_캔버스에 유채_91×45.5cm_2020
김영희_Another Landscape - 봄(See) 1_캔버스에 유채_117×72.7cm_2021

도시 ● 도시는 글이다. 건물은 단어이고, 거리는 문장이다. 김영희 작가의 도시는 그가 말하고자 하는 글이다. 그 글은 병에 담긴 편지처럼, 병에 담겨 캔버스에 옮겨졌다. 그러나 편지는 기록이 아닌 추억이며, 추억이란 언제나 왜곡을 동반한다. 병에 담긴 풍경도 왜곡되어 있다. 우리의 삶이 그런 것처럼, 병에 담긴 화가의 풍경도 명료하지만 왜곡된 기억이고, 또렷하지만 부분적인 세상이다.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선택해야만 한다. 모든 것을 사랑하는 전체주의자가 될 수는 없다. 병에 길어 올려진 풍경은 평범한 우리와 같은, 하지만 좀 더 세심하고 예민했던 화가가 선택한 풍경이고, 경험한 세상이다. ● 그래서인지 화가의 그림은 고요하고 적막하다. 폴 발레리(Paul Valery)가 시를 두고 "소리와 의미 사이의 긴 망설임"이라고 했던 것처럼, 김영희 작가의 그림 속 고요함을 보고 있자면, 미술이란 시각과 지각 사이의 긴 여운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의 그림은 그 여운을 떠올리기라도 하듯 고요함에 침잠하여있다. ● 이 슬픔과도 같은 고요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김영희_Another Landscape - 봄(See) 2_캔버스에 유채_72.7×53cm_2021
김영희_Another Landscape - Still life 1_캔버스에 유채_117×72.7cm_2020
김영희_Another Landscape - Slow_혼합재료_162.2×112.1cm_2021

 

병(病) ● 예술가란 사람들은 말과 이론을 다루는 비평가와는 다르다. 그들은 앓는 사람이거나, 앓았던 사람이다. 아스팔트에 수많은 생채기를 입은 그림 속의 병처럼, 살아오는 동안 많이 다친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쓰지 않고는 사는 법을 모른다던 「혼불」의 최명희처럼, 그들은 그리지 않고 사는 법을 모른다. 그 시기가 언제인지는 화가마다 다를 테지만, 결국 그린다. 이것은 스스로를 치유해가는 과정이다. 그들은 아파도 그리고, 아파서 그린다. 그래서 김영희 작가의 병은 치유하는 공간이다. 업다이크가 예술은 영혼이 숨을 쉴 수 있는 여유 공간을 제공한다고 말했던 것처럼, 그의 빈 병은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을 내어준다. ● 그렇다. 우리는 쉬어야 한다. 쉬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작가의 작품 중 몇몇 병이 누워있는 것은 그런 연유에서일지도 모른다. 쉼.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사명이다. 나는 가진 것이 탄식밖에 없어 글로 탄식하여 작가를 위로하지만, 작가는 그림으로 우리를 위로하며 쉴 공간을 만들어 주고 있다. ● 그는 포기하지 않고 우리를 끌어안으며 쉬게 해준다. 화가의 작품이 하이퍼리얼리즘에 가까우면서도 망막에 피로감을 주지 않는 이유는 그런 쉼이 있기 때문이다. 화가는 아마 앞으로도 포기하지 않고 세상을 껴안을 것이다. 그가 껴안는 품이 얼마나 넓어질지, 그리하여 병 속의 세계가 얼마나 따뜻해질지 기대가 된다. ■ 문성준

 

 

Vol.20210707e | 김영희展 / KIMYOUNGHEE / 金英姬 / painting

Formless
이영수展 / LEEYOUNGSOO / 李榮洙 / painting
2018_0815 ▶︎ 2018_0821


이영수_넬슨 만델라 꼬마영수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0.6×72.7cm_2017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70517c | 이영수展으로 갑니다.

이영수 블로그_blog.naver.com/han20s



초대일시 / 2018_0815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갤러리 H

GALLERY H

서울 종로구 인사동9길 10 4관

Tel. +82.(0)2.735.3367

blog.naver.com/gallh



'꼬마영수를 그려라! Draw the Little Lee'는 시민참여형 프로젝트로 2014년부터 일반인 참여자들에게 꼬마영수 캐릭터를 본인의 해석을 담아 그려달라고 해서 받은 그림들로 관계미학을 지향하는 커뮤니티 아트의 결과물입니다. 꼬마영수를 통해 사람들의 모습과 바램, 상상과 희망 등이 녹아있는 결과물들을 작가의 작품과 함께 전시합니다.



이영수_이영수_석가모니 꼬마영수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2.7×60.6cm_2017

이영수_이영수_꼬마영수의 일생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2.9×91cm_2018


꼬마영수(Little Lee)는 작가 개인을 대변하는 것을 넘어 특정인물이 아닌 보편성을 지닌 캐릭터로 2000년부터 만화, 수묵화, 애니메이션, 오브제, 사진, 커뮤니티아트, 회화작업 등을 통해 장르를 넘나들며 활동해왔습니다. ● '꼬마영수를 그려라!'는 관계미학을 지향하는 커뮤니티 아트의 일환으로 캐릭터 자체를 본인과 동일시하거나 상상하여 재창조하거나 모방하는 등의 방법론을 통해 예술가와 일반인이 함께 참여하는 프로젝트입니다. ● 이는 자본의 논리에 의해 분리되어진 예술과 일반인들과의 정서적 거리를 조금이라도 좁힐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명제에서 시작되어진 프로젝트이고, 동시에 꼬마영수가 고정된 캐릭터가 아닌 보편성을 지닌 열린 개념의 캐릭터라는 설정을 더욱 확장하기 위한 실험입니다. 예술이 특정계층의 향유물이 아닌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것임을 잊지 않도록 상기시키는 것은 예술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중요한 초석입니다. ■



이영수_꼬마영수를 그려라! 참가작품_박승빈

이영수_꼬마영수를 그려라! 참가작품_오주희

이영수_꼬마영수를 그려라! 참가작품_홍은영

이영수_꼬마영수를 그려라! 참가작품_홍은영

이영수_꼬마영수를 그려라! 참가작품_김지현


꼬마영수(Little Lee)의 확장성 ● 노자(老子)는 물을 최고의 선(上善)으로 보았다. 물은 형태를 고집하지 않는다. 둥근 그릇에선 둥글고 모진 데선 모지다. 많이 모여도 물이요, 작게 갈라놓아도 물이다. 끊여서 수증기로 증발해도 물이요, 얼어 고체가 되어도 물이다. 물은 고집하지 않지만 끝내 자기를 잃지 않는다. 유약한 듯 하지만 강하고, 모든 것을 포용한다.



이영수_꼬마영수를 그려라!_김해 가야초등학교 벽화

이영수_꼬마영수를그려라!_송산초등학교

기독교에서는 삼위일체(trinitas, 三位一體)라고 해서 성부(聖父), 성자(聖子), 성령(聖靈)을 하나로 보았다. 하나님과 예수님 성령님을 하나로 보았다. 형태는 다르지만 본질은 하나인 것이다. 마치 노자의 사상처럼 물과 얼음과 기체는 다르지만 같은 것이다.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개념의 형태나 시공에 얽매이는 존재가 아닌 것이다. ● 꼬마영수(리틀리)의 확장된 개념은 '노자의 물'과 기독교의 '삼위일체'에서 영향을 받았다. ● 나 자신이면서 너이고 우리이다. 남자이기도하고 여자이기도하며, 아이이면서 어른이기도 한 것이다. 노자의 물이나 삼위일체처럼 규정지을 수 없는 아이콘으로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 이영수


Vol.20180815c | 이영수展 / LEEYOUNGSOO / 李榮洙 / painting



비천한 길(본디 나비는 꽃을 찾지만
이 나비는 무엇을 찾는지 알수 없다!)

박재철展 / BAKJAECHOL / 朴在喆 / painting
2018_0627 ▶ 2018_0710



박재철_가시꽃을 받다_한지에 수묵채색_60×60cm_2018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61019h | 박재철展으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후원 / 광주은행 광주화루

관람시간 / 10:00am~06:00pm



갤러리 H

GALLERY H

서울 종로구 인사동9길 10 4관

Tel. +82.(0)2.735.3367

blog.naver.com/gallh



오래된 매체 ● 요즘은 동양화 전공 작가들마저 지필묵 대신 캔버스와 아크릴물감으로 그림을 그린다. 지필묵은 오랜 동양화의 재료다. 과연 이 오래되고 낡은 매체가 이 시대에 어울릴 새로운 회화로 가능할 것인가 이런 질문은 오랜 동안 지속되어왔다. ● 시대 변화에 따라 항상 새로운 매체가 등장하는게 미술이다. 같은 표현을 하더라도 새로운 매체에 담으면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신선한 미적 쾌감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새로운 매체라도 새로운 시선으로 회화를 담아내지 못한다면 일시적인 매체변화에 따른 새로움이지 그 이상의 것은 아닐 것이다. 반대로 낡은 매체라도 작가 스스로 살아가는 사회와 자신을 돌아다보고 변화하는 사회와 인간의 삶을 해석한다면 지필묵일지라도 새로운 회화의 가능성은 열려있지 않을까. ● 학업을 마치고 작가로서 시작은 동양화로 교육받은 그리기의 모든 것, 전통 필법과 기법을 모두 머리에서 지워내는 것에서 시작했다. 고루하게 학습된 전통기법은 전통사회의 급속한 붕괴와 유럽과 미국문화가 일상이 된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나 자신의 환경과 그에 따른 생각을 그려내기에 그다지 적합하지 않다고 결론 내렸다. 이어서 관념적으로 학습된 전통회화의 그리기를 부정(전통회화 자체의 부정이 아니라 시작점으로서 지우기이다.)하고 머릿속에서 온전히 지워냈을 때 뭐가 남아있을지 궁금했다. 즉 지필묵의 역사적 시간성을 지우고 사회적 공간성의 지점에서 회화를 시작했다. 시간이 지워진 공간성 안에서 지필묵은 개인에게 더 이상 낡은 매체가 아닌 낯설고 새로운 매체로 남는다. 역사적으로 오래된 매체지만 지필묵은 물성자체로 받아들일 때 개인에게 항상 새로운 매체이다.(이런 지필묵의 해석은 20년 전 작가로써 회화를 시작할 때 이미 정리해두고 시작한 이론이다.) 내 회화 저변에는 늘 이러한 지필묵 개념이 깔려 있고 연장선에서 지필묵이 다루어지고 있다. 다만 현재의 내 회화는 이런 지필묵 개념을 의식하거나 의도적으로 접촉하는 시기는 지난 것 같다.


박재철_가시꽃이 놓인 길_한지에 수묵채색_162×130cm_2017


그림의 주제 ● 아파트 단지에 조경해놓은 나무는 가지와 뿌리가 절단되고 심어진다. 아마도 운반의 편리와 아름답게 보일 목적으로 다듬어졌을 것이다. 아이러니한건 이렇게 상처 낸 나무를 다시 살아나게 하려고 천을 감고 쓰러지지 않게 버팀목을 지지하고 영양제를 꽂아 놓는 일이다. 아이러니로 서있는 이런 나무에서 강요된 삶을 살을 살아온 자신을 보았다. 상처투성이 나무에서 봄날 화사한꽃을 보려고 인간은 얼마나 처절한 노력을 하는가. 나무는 그 꽃을 피우기 위해 얼마나 고통스럽고 아팠을까. 결국 그렇게 핀 꽃은 인간의 욕망이자 가식이자 자본일 것이다. ● 가족이라는 집단은 개인에게 소속감으로 삶을 안정시키지만 관습화된 가족형태는 개인에게 어떤 역할을 강요한다. 이런 가족공동체의 지나친 의무감은 개인적 삶을 크게 거세시키는 형태로 드러나기도 한다. 상처투성이 거세는 가족이라는 이름의 가식이거나 허영이자 욕망일 것이다. ● 나의 그림은 가족공동체로서 강요된 삶과 거세된 상처에 관심을 갖는데서 출발한다. 「비천한 길」은 가족공동체의 상처에서 다른 세계로 향하는 의지이다. 살아오는 동안 불멸의 경전처럼 신뢰했던 관념이 오히려 자신을 무너뜨렸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순간 다른 세계로 시선은 향한다. 이런 것이 가족공동체를 해체하는 길인지 아니면 새로운 공동체일지 의심스럽지만 어차피 혼자 살지 않는 한 다른 형태의 공동체일 것이라는 쪽이 안도감을 준다. 어쨌든 새로운 공동체나 사회적 관계체나 삶은 스스로 그만두지 않는 한 받아들이고 가야만하는 「길」이다.



박재철_돈꽃이 핀 나무_한지에 수묵채색_162×130cm_2017


그림의 해석 ● 동양화에서는 여백이라는 독특한 양식이 전해 내려온다. 그려지지 않았지만 그림의 일부분으로 작용해 그려진 것의 미적 가치를 충만하게 하는 그림 아닌 그림이다. 내 그림에서 빈공간은 여백이기보다는 주제에 따른 사물을 충분히 생각해내지 못하거나 채우지 못한 공간이다. 또는 사각의 화면에서 어쩔 수 없이 남겨진 미처 완성하지 못한 공간이다. 회화에서 화면을 채우는 일은 너무도 당연시여기지만 나도 알지 못하거나 의미 없는 사물로 꾸역꾸역 화면을 채워 넣기보다 차라리 비워두는걸 택했다. 바꾸어 생각해보면 반드시 화면을 촘촘히 채우는 회화가 정당한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까 내 그림에서는 여백과 공간의 차이로 남아있다 ● 그림에 등장하는 사물은 의자는 쉬는 것, 지폐는 자본을, 보도블럭은 길을 상징하는 등 각자 보편적 의미가 있는데 나는 사물 본연의 보편적 의미를 변형되고 접합된 의미로 그림을 펼쳐나간다. 즉 의자와 빈의자, 나무와 잘려진 나무, 보도블럭과 가시꽃, 지폐와 나뭇가지에 꽂힌 지폐가 될 때 본연의 의미와 다른 의미(이건 내가 말로 설명하기 좀 복잡하고 어렵기도 하고 글로 구질구질 설명하는 촌스러움을 피하고자 하는 것)들이다, ● 나는 절대적인 문제나 학습된 지식은 신뢰하지 않는다. 어떤 사건을 접할 때 몸이 반응하여 체험된 것과 사건의 반복과 연속성 속에 몸속 사유된 인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판단한다. 따라서 내 그림은 세상과 반응한 결과체로 내 몸이 습득한 인식(사상이나 이념 따위의 관념이 아닌 현실 속 몸의 실천 결과들)을 중심으로 그림의 영역을 전개하려고 한다.


박재철_봄_한지에 수묵채색_60×60cm_2018


박재철_비천한 길Ⅰ_한지에 수묵채색_162×130cm_2017


옛 화론에 「사물의 형상을 빌려 내 심경을 표현한다」는 문인화 이론을 나는 참 좋아한다. 문인화란 사실을 재현하는 목적이 아니라 사물을 그려 작가의 내면을 표현하는 그림이다. 선비정신이라 여기고 그려온 사군자의 뜻 그림이나 세속을 벗어나 자연을 즐기려는 산수화는 사실대로 표현하기보다는 자신의 감정을 담아 그렸던 그림들이 그렇다. 내 그림은 얼핏 자본주의 속 인간의 욕망과 상처 등 모순의 문제를 다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특정 체제나 제도, 사회의 모순 이전에 인간의 불완전한 삶을 얘기해보는 방식을 더 선호하고 이것은 내 회화영역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아마도 내 비극적 가정사(아버지의 자살)이후 늘 머릿속에 떠도는'사는 게 무엇이기에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 「비천한 길」은 오랜 기간 갇혀 있던 관념이나 도덕에서 벗어난 인식으로 향하는 삶의 전환 과정의 문제를 되도록 「몸」이라는 물질이 세계와 마찰되는 지점에서 느끼고 사유하여 바라보려고 했다. 그림 속 사물은 어떤 낱말이고 사물의 변형과 교차된 사물은 형용사처럼 낱말을 꾸며주고 사물과 사물의 관계는 문장으로 이어진다. 그림이란 눈으로 보는 즐거움을 주는 시각언어일 수 있지만 그려진 내용을 눈으로 읽어가며 생각의 연속으로 머릿속 관념을 환기시키는 미적 언어이기도 하다. 내 그림은 후자인 그림을 읽어가며 관념을 환기시키는 회화적 방식에 좀 더 기울어 있다. 내 그리기는 「그리기」라는 방식에서 나타나듯이 회화에서 흔히 쓰이는 아주 고루한 방식이다. 촌놈들이 대부분 그렇듯, 나 역시 새롭거나 낮선 것에 대한 호기심보다는 두려움이나 어색함이 먼저다. 이런 습성은 현존하는 미술의 미적 태도를 문제 삼아 깨뜨리는 진보적 방식의 미술은 생물학적 습성으론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고루한 회화를 선택했고 고루한 회화는 안도할 수 있는 영역이다. ■ 박재철



박재철_비천한 길Ⅱ-00_한지에 수묵채색_162×260cm_2017


박재철_잠시 머뭇거리다_한지에 수묵채색_91×116.7cm_2017


An Ancient Medium ● These days even artists who specialize in Oriental painting are painting pictures on canvas with acrylic paints in lieu of paper, brush, and ink, the age-old materials of Oriental-style painting. People have continued to ask questions regarding whether or not this ancient medium can work as a type of new painting that matches our time period. ● New mediums have continued to emerge in art with the passing of time. They tend to bring aesthetic pleasure to viewers even though they are used to express the same thing. If a new medium is unable to incorporate a fresh perspective, any sense of novelty we might feel is nothing more than the feeling of newness that derives from change. In contrast, if an artist reflects on his society or himself and interprets changing society and humanity's life even through an ancient medium, the artist can still open up new possibilities of painting even though they are using paper, brush, and ink. ● After completing my studies, I began erasing every traditional technique of Oriental painting from my consciousness. This was my departure point as an artist. I concluded that traditional techniques are hardly suitable for realizing my ideas in my surroundings and contemporary society in which European and American cultures are pervasive. I wondered what would be left if I were to reject the traditional painting methods I had learned to execute to an ideal standard and decided to erase them thoroughly from my mind. (This is not a rejection of traditional painting itself; it is the use of this painting genre as a starting point.) I began painting from a point of social spatiality after ridding myself of the historical temporality of paper, brush, and ink. I no longer consider these tools to be outdated; they have become unfamiliar, new mediums in spatiality without temporality. The historically ancient materials of paper, brush, and ink will always be new to every artist if they accept them in terms of their material property. (I established my own theory on paper, brush, and ink roughly 20 years ago when I first started my career as a painter.) My painting has always been based on these concepts of paper, brush, and ink and it has addressed them as an extension of such concepts. However, I currently eschew intentionally being conscious of or trying to approach such concepts. ● Subjects of My Paintings Landscape trees in an apartment complex have boughs and roots which need to be cut and trimmed. They are probably trimmed to make them easier to transport or to make them look beautiful. Ironically, people swathe trees fraught with scars in cloth, prop them up with wooden supports, and inject them with tonics in order to breathe a new life into them. I discover my forced life in them. How much of an effort are we humans desperately making to see these trees make splendid flowers? How painful must it have been for them to produce blossoms? After all, these flowers are the results of our desires, pretenses, and capital. ● A family group stabilizes our lives by having us feel a sense of belonging while a conventional family type compels each individual to assume some sort of role. The sense of duty imposed on each member of a family community does not allow them to live an individual life. ● My painting begins from my concerns about forced living and the wounds it can create. An Abject Way intimates one's will to go forward to another world, overcoming wounds caused by a family community. We turn our eyes away to another world the moment we realize some of the ideas we have put our faith into as if they were undying scriptures have caused us to collapse. I wonder if this is an act of deconstructing a family community or forging a new community. Regardless, it gives us a sense of relief in that it is also another form of a community that is created with a throng of people. We have to accept a new community or a social body. ● Interpretations of My Paintings Oriental painting is particularly marked by its blank space which is characteristic of this genre of painting. Such blank space enhances the aesthetic value of painted objects, working as part of the painting even though nothing is depicted. In my painting a blank space is an area I cannot fill with images of objects as I have yet to conceive them. We tend to take the act of filling a canvas with images for granted, but I have chosen to keep the canvas blank rather than filling it with unknown or unidentified things. It may very well be conventional to densely fill a canvas. However, in this case many parts are left as blanks or spaces. ● Things in my paintings have their own meanings: a chair symbolic of relaxation; bills symbolic of capital; and precast pavers symbolic of a sidewalk. I apply their universal meanings to my pictures through their alteration or combination. Things, such as chair and empty chair, tree and trimmed tree, sidewalk and spineflower, and bills and bills hung at the ends of twigs have their original and different meanings (it's a bit intricate and hard to explain in words as well as rather indigent to explain in writing) in my paintings. ● I have a mistrust of absolute issues or learned knowledge. I used to see and judge aspects in the world through what I have experienced through my body and what I have perceived in the repetition and continuity of events. Accordingly, my paintings are the results of my reactions to the world. I try to lay out my works, focusing primarily on the perceptions I come to have through my body (the outcome of practice with my body in reality, not by any thought or ideology). ● I am partial to a theory on literati painting in which one expresses his or her mental state through an appropriation of the images of things. Literati painting is not to represent real objects, but to express one's inner world by portraying the images of things. Paintings of the Four Noble Plants and mountain-and-water paintings are all painted to represent one's emotions rather than to depict objects realistically. At first glance, my paintings seem to address the issues of contradiction in capitalistic society such as desire and wounds but I prefer them to lay out narratives on specific institutions and systems as well as humanity's imperfect lives. This is a seminal section of the sphere of my painting. It is perhaps caused by a question pertaining to how we can choose death. Such a query has lingered in my mind for a long time after my father's tragic death by suicide. ● In this exhibition, I intend to feel and meditate on a shift in perception escaping from notions and conventions I have been wedded to for a long time at the place where the material of my body comes across the world. Things in my paintings can be thought of as words transformed, crossed things modified like adjectives, and the relations between things stand for some sentences. ● A painting can be said to be either a visual language that gives pleasure to our eyes or an aesthetic language that calls notions to mind through a chain of thinking while reading images. My painting is something like the latter, a pictorial manner to recollect notions while reading images. My painting depends on a very old-fashioned manner commonly used in other paintings. Like most country folks, I feel scared about having to come into contact with something new rather than having curiosity. Thus, it is almost impossible for me to take any progressive stance and break down preexisting aesthetic attitudes due to my biological nature and habit. So, I have chosen old-fashioned painting, feeling a sense of relief in this. ■ Park Jae-chol

Vol.20180627e | 박재철展 / BAKJAECHOL / 朴在喆 / pain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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