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OCI YOYNG CREATIVES

정해민_유쥬쥬展 

2017_0817 ▶ 2017_0909 / 일,월요일 휴관

초대일시 / 2017_0817_목요일_05:00pm

정해민 『Could not complete your request』展유쥬쥬 『마더랜드』展


작가와의 대화 / 2017_0826_토요일_02: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수요일_10:00am~09:00pm / 일,월요일 휴관



OCI 미술관

OCI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우정국로 45-14(수송동 46-15번지)

Tel. +82.(0)2.734.0440

www.ocimuseum.org



회화의 종말, 종말 이후의 회화 ● 정해민은 파괴와 폭력, 환란, 파국의 장면을 멀리 공중에서 비스듬히 내려다본 시점으로 그린다. 짙은 어둠을 배경으로 숱한 인간 군상이 격돌하거나 혼란스럽게 뒤엉켜 있는 모습이 어스름한 불빛이나 분출하는 화염 사이로 흘깃흘깃 보이는데, 다분히 묵시록적인 이러한 장면을 그리기 위해 정해민은 '포토샵(Photoshop)' 프로그램을 사용한다. 때에 따라 미디어와 인터넷에 유통되는 기존의 이미지를 콜라주하여 조합하기도 하고, 포토샵의 페인팅 툴로 직접 그리기도 한다. 그리고 기존의 이미지나 작가가 포토샵으로 그린 이미지는 모두 작가의 묵시록적 비전을 구성하는 단위가 되어 그의 컴퓨터에 저장되었다가 전체 화면에 부분적으로 소환된다. ● 그의 작업실에는 캔버스와 붓과 물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넓은 파노라마 장면을 펼쳐놓을 수 있는 광폭의 모니터와 대용량의 고성능 컴퓨터가 있다. 작가의 첫 개인전이 되는 이번 전시를 위해 정해민은 높이 2미터, 길이 30미터에 달하는 장대한 묵시록적 장면을 구상했는데, 이는 OCI미술관의 1층 세 벽면에 설치될 것이다. 관람자는 세 벽면의 대형 회화 안에서 정해민의 종말론적 장면을 마주하게 되는데, 작가는 이러한 장면을 그리기 위해 오랫동안 포토샵 프로그램과 씨름했으며, 그것을 출력한 2m 높이의 캔버스는 대형 이미지를 출력할 수 있는 프린터의 사양에서 비롯되었다.



정해민_Playground_디지털 페인팅_215×3040cm_2017_부분


짙은 어둠을 배경으로 강한 에너지가 폭발하고, 엄청난 힘이 분출하며, 파괴와 폭력의 기운이 교차하는 이 심상치 않은 장면을 그리기 위해 정해민은 붓과 물감이 아니라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했고, 포토샵을 이용한 그리기 과정에는 레디메이드 이미지의 차용은 물론 붓질의 느낌을 살린 회화적 터치가 함께 사용되었다. 그리고 수평으로 오랫동안 연이어 그린 긴 파노라마 장면을 캔버스 천 위에 출력해 놓았다. 그 출력물이 부분적으로 매우 회화적이라 이것이 컴퓨터 출력물이라는 사실에 일견 놀라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묵시록적인 장면이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지 궁금해진다. ●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아이들의 청군 백군 게임이 어느덧 실전을 방불케 하는 혈투로 돌변하고, 보이스카우트의 체력 단련이 치명적인 부상과 상처를 수반하며, 불꽃 튀는 미술대학의 입시 경쟁이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장까지 연장된다. 대낮 광화문 광장에서는 약육강식의 야생 드라마가 매일처럼 자행되며, 길거리의 흔한 편의점에서는 스크럼을 짠 시민들이 공권력과 대치하고 있다. 맥도널드 매장에 제복 차림의 북한군과 부채춤을 추는 무용수들이 병존하고, 일상의 때를 씻는 공중목욕탕에서는 서민들의 애환과 함께 서슬 퍼런 물고문의 기억이 환기된다. 한가로운 수영장에 돌연 소용돌이가 일어 대형 여객선이 침몰하고, 흥미로운 볼거리처럼 관객들의 시선이 집중된 무대 위에서는 생체를 난도질하는 수술이 집도되고 있다. 평상시처럼 다세대 주택의 계단참을 돌면 돌연사 현장을 검시 중인 경찰과 과학수사대의 요원들을 볼 수 있고, 인간의 구원과 대속을 이야기하는 피에타 상의 성모 마리아가 사격 중인 미군 병사의 얼굴을 움켜쥐고 있다.



정해민_Playground_디지털 페인팅_215×3040cm_2017_부분


기독교 신앙을 가진 정해민은 20대 초에 신비체험을 경험하고 종교를 가지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새로운 천년, 밀레니엄에 대한 기대와 회한이 한참 회자되던 2003년의 일인데, 정해민은 이런 자전적 경험과 미술학도로서의 고민을 묵시록적인 그림을 그리고 재생산하는 일에 오버랩시킨 것으로 보인다. 천년을 주기로 회자되는 기독교의 종말론은 구원에 대한 강한 열망을 배경으로 하는데, 지난 세기 말에는 인간 세상의 종말보다 예술의 종말, 특히 회화의 종말이 매우 절박하게 천명된 것으로 보인다. ● 20세기 말 회화를 중심으로 한 전통적인 예술은 비장한 종말이 선언되었다. 그러나 서력기원 후 첫 천년을 지나면서 종말을 두려워하던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또 다음 천년을 살았듯이, 회화의 종말이 선언된 이후에도 여전히 살아서 그림을 그려야 하는 미술인들은 천국도 지옥도 아닌 연옥처럼 계속되는 이 세상에서 끝도 없이 '포스트-' 시대의 이미지를 양산해야 하는 운명에 처했다. 첫 밀레니엄에 인류를 두려움에 떨게 한 기독교의 종말론과 두 번째 밀레니엄에 예술인들을 무기력한 '포스트-'의 시대로 밀어 넣은 회화의 종말론이 정해민의 컴퓨터에서 조우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컴퓨터는 두 종말론이 만나 묵시록적인 장면으로 재생산되는 터미널인 셈이다.



정해민_Playground_디지털 페인팅_215×3040cm_2017_부분


그러나 정해민이 강박적으로 사로잡혀 있는 종말의 이미지는, 처음 천년 뒤에 아무렇지도 않게 지속된 인간의 삶이 허망하듯이 두 번째 천년 뒤에도 아무 일 없듯 지속되는 회화를 더 이상 진실되거나 유의미한 예술의 경로로 대할 수 없는 무력한 패배주의를 동반하고 있다. '분명한 무엇'으로 체험된 그의 신비체험은 종교의 거대서사에서 분리되어 동시대의 오락이나 게임, 이단적 대중문화의 이미지와 불온하게 결합하고, 오랫동안 미술의 제왕이었던 회화의 기법은 디지털 페인팅, 콜라주, 몽타주, 다중의 복제술과 자유롭게 혼성을 이룬다. '종말론'이나 '묵시록'이란 말에서 불가피하게 유일신 종교의 체취가 환기되지만, 게임이나 영화 등 컴퓨터 그래픽 이미지에 익숙한 21세기 사람들의 눈에 정해민의 대형 디지털 회화는 종교와 오락, 예술과 게임의 경계를 넘나드는 모호한 혼성의 지점에 위치한 것으로 보인다. ● 회화의 종말은 선언되었지만 종말 이후에도 그림을 그려야 한다면 회화는 이렇게 밖에 존재할 수 없는지 모르겠다. 종교와 예술은 지나간 시대의 향수가 되었으며, 컴퓨터로 그린 이미지(CGI)와 파운드 푸티지(found footage)가 보편화되고, 짤방과 움짤로 외계인의 음모론을 이야기하는 시대에 정해민의 디지털 회화는 각종 이종 이미지와 결합하여 혼성의 생명체로 증식한다. '다가올 끝'을 '무한히 큰 것'으로 그리고 싶다는 정해민의 디지털 회화는 회화를 닮았지만 '유사 회화'에 해당하며, 고통스런 현실에서 벗어나려는 피억압인들의 염원이 종말을 통한 새로운 시작에 대한 열망으로 흘러간 것을 생각하면, 파괴와 폭력, 환란, 파국의 장면을 반복적으로 그리는 정해민이 자신의 회화를 '유사 사회참여'라고 부르는 점에 동의할 수 있겠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끝날 것을 두려워하기 보다는 파국과 구원이라는 극적인 종결을 통해 새로운 시작을 갈망하는 종말론의 어법이 "결국 변하는 것은 없고 모든 것은 종말을 향한다"는 정해민의 현세진단에 대한 근저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혹은 회화 자체가 불가능한 시대에 회화의 틀을 환기하는 회화 흉내내기에 매진할 수밖에 없다는 그의 현재의 회화 진단의 근거가 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정해민_Playground_디지털 페인팅_215×3040cm_2017_부분


오히려 그의 그림에서 종말론과 묵시록의 장면이 연상되는 이유는 공중에서 비스듬히 지상을 내려다보는 시점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천상에서 땅 위를 내려다보는 관점 혹은 공중에서 사방을 두루 조망하는 넓은 파노라마 뷰가 그의 화면을 지배하는데, 여기에는 하늘의 천사 혹은 강림하는 구세주의 전지적 시점이나 고통스런 현실에서 벗어나 천상으로 날아오르기를 원하는 자들의 염원이 드리워져 있다. 기독교의 종말은 흔히 예수가 재림하여 공중에 임할 때, 선택받은 사람들이 하늘로 들려 올려진다는 일명 '휴거(携擧, rapture)'로 설명되는데, 지상의 해묵은 중력에서 벗어나 불현 듯 승천하는 해방감은 육중한 군상들마저 가볍게 느껴지는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이나 천상의 그리스도 옆에 평화롭게 도열한 프라 안젤리코의 구원받은 자들, 혹은 심판의 날 분노의 칼을 휘두르는 미카엘 대천사의 발밑에서 어두운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는 얀 반 에이크의 인간 군상들에서 이미 실감나게 재현된 바 있다. 정해민은 드넓은 공간감과 공중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점으로 현세에 대한 묵시록적인 진단과 종말 이후 도래할 회화의 내세를 가늠해 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한편으로 매우 도발적이고 유희적이기도 한데, 묵시록적인 비전이 진지한 만큼 그와 유사하게 컴퓨터 게임 상에서 가상의 영토를 활공하는 게임 캐릭터의 시선이나 현실의 육신을 극복한 아바타적 존재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의 묵시록적인 비전은 컴퓨터 게임처럼 화려하고 버추얼한 그래픽 이미지처럼 박진감 넘친다. ● 총 30미터가 넘는 이번 출품작의 좌측에는 붉은 색의 덩어리가 보이는데, 이는 정해민이 오랫동안 연이어 그리던 이 장폭의 디지털 회화를 저장하는데 잠시 소홀하여 생긴 사고의 흔적이다. 장시간 공들여 그린 화면이 붉은색의 덩어리로 먹통이 되어버린 참사를 작가는 그대로 공개하기로 마음먹었는데, 이는 "과학적으로는 우연의 개입이라면, 종교적으로는 신의 간섭"으로 볼 수 있다는 해석을 동반하고 있다. 예술의 고유성을 보증하던 회화의 유일성은 복제와 수정이 자유로운 디지털 기법에서 치명적으로 훼손된 것으로 보이지만, 디지털 회화 안에도 여전히 불가피한 힘은 작용하고 있다.



정해민_Playground_디지털 페인팅_215×3040cm_2017_부분


화면 곳곳에서 구상적 형태의 일부분에서 시작하여 해당 부분의 색상을 길게 늘이는 기법을 볼 수 있다. 묵시록적인 장면을 깨는 회화의 고민이 재앙처럼 화면에 출몰하며, 회화에 대한 회화 혹은 재현의 의미를 묻는 추상의 기억을 일깨운다. 포토샵의 스트로크 기법으로 길게 늘인 색상의 띠는 시작점이었던 구상적 형태에서 벗어나 화폭 위의 색상이라는 즉물적인 실체를 드러낸다. 구상과 추상을 넘나들고, 사진과 회화를 오가며, 그린 것을 지워내고 다시 그렸다가 지우기를 반복했던 20세기말 포스트모던 추상 회화의 디지털 버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분야의 대표 작가였던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 1932~) 역시 최근 디지털 편집기법으로 '스트립 페인팅(strip painting)' 연작을 선보이고 있으니, 이는 회화에 대한 추억, 종말 이후의 회화, 디지털 편집술 이후의 회화가 도달할 수 있는 공통적인 해법이라고 할 수 있다. ● 정해민은 '회화' 앞에 괄호를 두어 '( ) 회화'로 자신의 '그리기'를 설명하는데, 회화 앞에 괄호가 붙어 그 안에 어떤 말이 들어가더라도 '회화'보다 괄호가 부각되기에 괄호 밖의 회화는 허상처럼 느껴진다고 설명한다. 회화 뿐 아니라 종교와 예술의 거대 서사가 무너진 세계에서 한때 의미를 담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는 틀의 의미를 포획하는 것, 또는 컴퓨터 게임처럼 리얼하지만 그만큼 버추얼하기도 한 종말과 구원의 비전에 매진하는 정해민의 제스처를 '포스트-회화'라로 부를 수 있을 것인데, 이는 '포스트 미디엄', '포스트 프로덕션', '포스트 인터넷', '포스트 디지털', 하다못해 '포스트 컨템퍼러리'까지 등장한 이른바 끝도 없는 '포스트-'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시대 작가의 생존법이자 회화적 대응이라고 할 수 있다. ■ 권영진



유쥬쥬_K2_거울, 혼합재료_27×97×6cm_2017


삭제된 삶을 회복하는 몸짓 ● "인간의 삶은 얼마나 쉽게 삭제되는가." - 주디스 버틀러, 『불확실한 삶』, p. 19 ● 본래 성스러운(?) 교리를 갖가지 죄로 물든 이들에게 전파한다는 의미로 생겨난 단어, 프로파간다(propaganda/선전). 이 말은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쟁의 명분을 심어놓기 위한 것으로 변질되었고, 다시 자본주의 아래서 수많은 이들에게 상품을 사들이도록 하는 기업의 교활한 도구로 전락하였다. 미국의 철학자인 주디스 버틀러의 말처럼, 우리는 어떠한 시대적 관점이 우리를 비난할 수 있다는 이유로 그리고 그 관점의 전염성에 포섭되지 않으면 배제될 수 있다는 강박으로 늘 두려워하고 우울해한다. 필자가 유쥬쥬의 작업 전반에서 포착한 키워드는 이렇듯 시대에 공헌하며 갖가지 모습으로 변신해온 '프로파간다'와 '관점들'이다. ● 근래 유쥬쥬가 지속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The North」시리즈에는 북한의 인쇄매체에서 따온 갖가지 아이콘들과 더불어 거울을 자르고 이어 붙여 만든 북한의 선전문구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의 작업 전반에서 일괄적으로 목격할 수 있는 것은 작가가 직접 노동에 참여하면서 작품을 생산한다는 점일 것이다. 그리고 이는 「The North」시리즈에서도 반복된다. 그는 좁은 스튜디오 안에서, 마치 과거의 유리세공사가 그러했던 것처럼, 거울을 직접 자르고 붙여 그 사이에 단어와 문장을 심어 놓는다. 그리고 그 작업방식은 스테인드글라스의 그것과 유사하다. 우리는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종교와 이념이 세속화되어 궁극적으로 통치의 수단이 되는 과정의 유사함에 대한 것이다. 기독교를 포함한 여러 종교에서 선한 신은 빛으로 등장하였으며, 무지몽매한 자들을 일깨우는 계몽(enlightenment) 역시 어둠의 세계에 빛을 전파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지성적인 작업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감성을 어루만지며 그들의 정신 속을 파고들어왔다. 북한의 프로파간다 역시 마찬가지다. 인민의 생과 사를 좌우하는 거대이념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수령을 아버지(father)로, 당을 어머니(mother)로 섬길 것을 요청하며, 동일한 악의 대상을 설정하고, 공동의 승리가 미래에 부여할 환희라는 일루전을 심어놓는다. 이처럼 빛으로 표상되는 이념의 허상을 우리는 유쥬쥬의 작업에서 엿볼 수 있다. ● 우선 우리는 유쥬쥬가 「The North」시리즈에서 주로 사용하고 있는 거울이라는 소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거울은 빛을 반사시키고 이미지를 반전시키는 매체이다. 거울로 된 그의 작업 앞에서 관객들이 우선 집중하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 사실 작품 자체이기보다는 자신의 모습일 확률이 높다. 자크 라캉의 '거울단계'에 나오는 것처럼, 인간은 자신을 비추는 도구에 의해 세계에서 분리되어 있는 자신의 존재를 처음 인식하게 되며, 이때부터 상징계로 진입하여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게 된다. 하지만 거울에 비친 것은 실재 이미지가 아니라 반전되고 왜곡된 상이다. 유쥬쥬의 거울 역시 그러하다. 그리고 그 위에 놓인 갖가지 텍스트들 역시 그러하다. 텍스트, 그 중에서도 이념과 사상을 함축하는 프로파간다는 상징계를 대표하는 요소이기도 하고, 인민으로 하여금 의심의 여지없는 것으로 믿게끔 만드는 장치로 작동하지만, 사실 그것들 역시 왜곡된 허상에 불과하다. 즉 우리가 유쥬쥬의 「The North」시리즈에서 목격할 수 있는 것은 소재와 텍스트가 만들어내는 여러 겹의 왜곡된 장면인 것이다. 작가는 이 작업들을 제작하기 위해 스테인드글라스 제작법을 사사받았다고 한다. 실제로 그의 작업들은 종교적 예술작품들의 전유물인 모종의 아우라가 발산되는 듯 보이기도 한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 중세 종교의 대표적 상징물인 스테인드글라스는 '빛'으로 형상화된 신을 투과시켜 바닥에 비춤으로써 사람들에게 그 신성함을 제시하는 장치였다. 하지만 흥미로운 점은 '빛 그 자체'를 드러내지 않고, 인공적 요소로 필터링하여 – 즉 왜곡하여 –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 역시 「The North」시리즈가 말하는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곳에서는 인간의 신격화가 이루어졌으며, 이념은 종교가 되었다. 하지만 비단 특정 지역에서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흔들림 없이 굳게 믿어온 진리와 윤리라는 것 역시 일방향성과 폭력성을 숨기고 있는 허상에 불과하다.



유쥬쥬_비가 오고 큰 바람이 불었다_거울, 혼합재료_가변크기_2017


이번에 유쥬쥬는 프로파간다를 담은 작품들과 더불어 거울로 만든 18자루의 총과 5점의 병풍을 선보인다. 텍스트에서 다소 빗겨간 것들이다. 사실 시각예술가에게 텍스트는 다루기 쉽지 않은 요소 중 하나이다. 은유와 은폐가 덕목으로 여겨지고, 비-진리와 비-미학을 지향하는 현대미술에서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텍스트는 그에 반하는 것이 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가는 영문으로 번역되어 사용되고 있는 프로파간다를 작품에 배치하고, 국문 표제를 달아놓음으로써 이에 대한 난제를 극복하고자 하는 듯 보인다. 실제로 매우 함축적으로 사용되는 영문 텍스트는 문학적, 상징적, 현실적 의미를 모두 내포하고 있으므로, 보는 이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확률이 높다. 하지만 이에 대한 국문 텍스트는 반대로 매우 명료하며,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차단한다. 총과 병풍 역시 매우 구체적인 형상에 속한다. 하지만 그것들은 유약한 거울로 만들어지면서, 누군가에게 상해를 입히고 외풍을 막아내는 본래의 도구성과 유용성이 훼손된 상태로 나타난다. 오히려 그 위에 맺히는 상은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들의 왜곡된 또 다른 얼굴이다. ● 유쥬쥬의 이전 작업부터 근래 작업들에까지 일괄적으로 적용되는 것을 살펴보자면, 아마도 일상적 사물의 본래 기능을 제거하되 레디-메이드처럼 작가의 물리적 개입을 최소화하지 않고, 신체성을 적극적으로 도입한다는 점일 것이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일면 수공예적이고 일면 퍼포머티브하다. 그리고 이로써 도출되는 것은 추상적이고 난해한 것과 반대되는 구체성이다. 꽤 오랜 시간 동안 미술과 공예 그리고 디자인을 구분하면서 '기능'과 '도구성'은 중요한 화두로 작용해왔다. 물론 이에 대한 반발로 '삶=예술'이 되고자 하는 움직임은 끊임없이 있어왔지만, 아직도 현대미술에서는 작가의 손재주나 작품의 사용보다는 개념과 사상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그러한 면에서 유쥬쥬의 작업은 이러한 경향을 거스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과거 작업들을 통해 이를 살펴보도록 하자. ● 유쥬쥬가 2012년부터 지금까지 지속해오고 있는 대표적인 작업으로는 「슈퍼뮤지움 프로젝트」가 있다. 이 작업은 슈퍼마켓에 진열된 상품들이 언젠가 박물관에 고이 놓여있는 유물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상상에서 시작되었다. 따라서 작가는 공장에서 일괄적으로 찍어낸 여러 상품들(마대자루, 냅킨, 사탕, 과자 포장지 등)을 이용해 소품을 만들고, 그 소품들과 더불어 작품에 직접 등장한다. 이는 얼핏 윌리엄 모리스가 19세기 말에 주창한 바 있는 '예술공예운동'을 떠올리도록 한다. 충분한 자본을 획득하지 못한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일상에서 기업이 생산한 공산품이나 손쉽게 접할 수 있는 대중예술을 소비하며 살아가므로, 유사한 감각과 취향, 감성을 지니게 될 확률이 높다. 그리고 기묘하게도 이처럼 동일해진 성향은 새로운 통치의 대상이 되곤 한다. 고로 우리는 현실 속에서 각자의 예술적 성향을 발휘하며, 이를 향유해야 할 필요가 있다. 유쥬쥬의 작업에서 필자가 발견한 것은 이에 대한 가능성이다. 그는 노끈으로 짚신을 짓고, 과자 포장지로 옷을 만든다. 그리고 일회용 은박식기에 멋들어진 장식을 새겨놓는다. 이와 관련하여 작가는 『파도가 칠 때는 서핑을』의 저자 이본 취나드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유명한 등산가이자 세계적인 아웃도어의류 브랜드인 '파타고니아'를 설립한 취나드는 행복한 삶을 위한 소소하고 다양한 지침을 내놓은 자이기도 하고, 패트병으로 섬유를 만들고, 블루사인의 승인을 얻은 옷을 생산하는 자이기도 하다. 유쥬쥬 역시 우리의 지난한 일상에서 '새로운 인간의 조건'으로 작동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말하는데, 그것은 바로 소소하지만 행복해질 수 있는 가능성과 원래 있던 것들을 이용하여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다. 물론 그의 작업에는 뒤샹의 레디-메이드나 워홀의 '브릴로박스'와 같은 과거의 흔적들이 엿보이기도 한다.



유쥬쥬_(수정) 나를 낳은 어머니를 언제나 못 잊듯이_스테인드글라스, 거울, 혼합재료_640×1340cm_2017


슈퍼마켓은 유쥬쥬뿐만 아니라 물질만능주의와 물신(Fetisch) 그리고 예술의 허상에 대한 고민을 해온 많은 예술가들이 다뤄온 소재이기도 하다. 1990년 기욤 바일은 스위스 바젤에 있는 니티만 갤러리를 슈퍼마켓으로 변모시키면서 '새로운 슈퍼마켓'을 제작한 바 있는데, 이 작품에서 그는 전시장 안에서는 구입할 수 없지만, 누군가에게 식량으로 기부되고, 전시가 끝난 뒤에는 다시 상품으로 돌아갈 수 있는 사물들에 대해 말한 바 있다. 또한 쉬젠 역시 '샹아트 슈퍼마켓' 프로젝트에서 상하이의 슈퍼마켓을 그대로 전시장에 옮겨놓았는데, 그곳에서 그는 내용물을 비우고 재포장한 상품들을 판매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이는 예술의 허상에 대한 비판의식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이에 더해 덴마크의 아티스트그룹 슈퍼플렉스 역시 그들의 홈페이지에 임시로 '슈퍼마켓' 툴을 만들어 자본주의 안에서 구축되어온 상거래의 시스템에 대해 사유하도록 하였다. 그렇다면 이들의 작업과 유쥬쥬의 「슈퍼뮤지움 프로젝트」 사이에는 어떠한 차이가 있을까? 아마도 신체의 적극적인 참여가 그 답이 될 것이다. ● 무엇보다 그는 부지런한 예술가이다. 무엇이든 만들기 전에 그 공정을 익히는 과정을 거친다. 그리고 기성품이나 인공물을 활용하여 새로운 수공예품을 만든다. 유쥬쥬는 새로운 사물을 만나게 될 때 본능적으로 그것과 다른 것을 결합하여 새로운 것을 만드는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된다고 한다. 이때 항상 수반되는 것이 그 결합의 물리적 기법에 대한 고민이다. 현대미술의 트렌드를 살펴볼 때 다소 아이러니컬하게 여겨지는 지점은 모더니즘 시대에까지 고귀한 정신성에 밀려 하등한 것으로 취급되던 신체성이 여전히 온전하게 그 가치를 온전히 인정 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에 대한 반향으로 인터렉티브아트, 사운드아프, 퍼포먼스 등의 새로운 시도가 생겨난 것은 사실이나 예술가의 신체적 개입은 아직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양태를 보이는 게 사실이다. 과연 몸이 없는 생명과 인간은 존재하는가? 여러 현상학자들의 말처럼, 몸은 정신의 부수물이 아니라 정신을 존재하도록 하는 근원이 아닐까? 이러한 지점에서 유쥬쥬의 신체적 개입은 새롭게 해석될 필요가 있을 듯하다. ● 유쥬쥬는 「The North」시리즈와 「슈퍼뮤지움 프로젝트」뿐만 아니라 그 이전의 작업들, 「Vanitas」, 「Friends」, 「Flower」, 「Flower Tree」, 「Fruit Wrap Flower」, 「The Listener」에서도 이러한 신체성을 드러내왔다. 「Vanitas」에서 그는 아시아에서 유난히 발달한 푸드 카빙 데코레이션(과일조각)으로 17세기 유럽의 바니타스 정물화를 재현하였다. 런던의 작업실에서 시간의 간격을 두고 촬영된 이 작품에는 자연적 요소로서의 시간뿐만 아니라 기술적으로 잘 조각된 과일 그리고 작가에 의해 더해지고 덜어지면서 이동하는 사물들이 함께 공존한다. 「Flower」와 「Flower Tree」, 「Fruit Wrap Flower」는 여러 사물들을 이용하여 꽃이나 화환을 만들었던 작업들이다. 이 작업들에서도 작가는 직접 손으로 사물들의 본래 쓸모를 제거하고, 새로운 쓸모를 부여하고 있다. 특히 이 작품들 중 일부가 – 그저 조형물로 남기를 거부하고 – 유명 작가의 개인전 축하 화환으로 보내졌다는 에피소드는 유쾌한 해프닝의 오마주처럼 다가온다. ● 종교와 이념, 물신 앞에서 개별적 인간의 삶은 너무도 쉽게 삭제되곤 한다. 그런 의미에서 무의미의 의미를 드러내는 자리에 관객의 반전된 얼굴을 비추도록 하는 유쥬쥬의 작업은 그 삭제된 인간의 삶(상징계에 의해 왜곡된 삶 그 자체)을 다시금 드러내는 것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또한 그의 적극적인 신체적 개입 역시 존재의 본질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난해한 개념과 관념 그리고 사유가 범람하는 현대미술 안에서 그의 작업은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 김지혜



Vol.20170817c | 2017 OCI YOUNG CREATIVES-정해민_유쥬쥬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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