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운 "봄이오는 길목展

                                                   일시 : 2013년 3월 13일-3월 26일

                                     장소 : 아라아트센터 1-2층 전시실

 

 

 

 

 

 

 

 

 

 

 

 

 

 

 

 

 

이청운의 초기작을 보는 기회 - 최석태

 

이청운의 남다른 점

 

화가 이청운이 그림을 그리기 비롯한 역사가 40년을 훌쩍 넘었다. 그의 나이도 회갑 나이를 넘었다. 이번 전시를 한마디로 말하자면 모든 출품작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출품작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이청운의 초기작이므로 초기작 전시라는 것이다. 발표작을 포함해 미발표작도 적지 않다. 이청운의 초기 면모를 총괄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그 동안 이청운이 해오던 개인전을 두어 개 합친 규모다.

이청운이 화가로 등장한 것은 1971년 구상회 공모에 응하여 금상을 얻으면서 라고 할 수 있다. 꽤 화려한 등장이었다. 그 후 꽤 오래 수면 아래 잠긴 것처럼 보였다. 더 화려한 재등장을 위한 것이었을까? 그 사이 그는 애써 들어간 대학을 잠깐 다니다 그만 두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길지 않은 시간 교수로 일하고 있었던 정건모를 만나 그가 세상을 떠나는 때까지 이어지는 사제관계를 이룬다. 정건모가 보여주는 그림의 세계는 마치 점묘파이되 역사적 점묘파와는 다른 평면화를 이룬 화가였고, 더욱 그는 시를 빼곡하다시피 화면에 적어넣는 특이한 화가였다. 그를 남다른 그림쟁이로 만든 요인은 청년시절에 공주사범학교에 다니면서 만난 시인 신동엽과의 교우였다. 신동엽은 저항, 민족 시인의 면모를 지녔던 까닭에 공공연히 떠벌릴 수 없는 인사였지만 그와의 교우는 정건모의 그림에 빈번히 등장하는 시 적어넣기로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또한 이청운은 정건모의 권유로 화가단체 제작전에 속해 활동한다. 제작전에서 알게 된 박창돈, 김충선, 김영덕 등 선배 세대의 활동을 곁에서 보게 된 것도 부산에서 뼈가 굵었던 탓에 좁았다고 할 수 있는 참조 범위를 더 넓힐 수 있었으므로 그에게 분명 행운이었다. 매듭짓자면 이청운이 문인을 비롯한 광범위한 예술 분야 인사들과 낯설지 않은 관계를 형성하는 데에도 정건모의 취향과 주변은 크게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림의 선배들 그리고 형제 예술들에 대한 친근감은 여느 화가들과 이청운을 구별하게 해주는 하나의 표지라고 나는 굳게 믿는다.

 

초기작의 면면들

 

다시 말하지만 이번 전시는 이청운의 초기작이 중심이 된 전시다. 길게는 그려진 지 4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것도 출품된다. 이런 시간의 격절에 과연 얼마나 많은 작품이 견딜까? 드높은 성취라고 여겨졌다가 무상하게 무가치하다고 여겨지게 된 이름 높던 화가들의 그림들이 우리의 뇌리를 스쳐간다. 이번 출품작들을 여러 차례 살펴본 나는 그의 작업들이 전혀 그 빛을 잃지 않고 있는 것에 놀랐다. 그럴 뿐아니라 그가 현재 보여주고 있는 건강한 낙관성, 빛과 어둠의 대조를 통해 궁극적으로 낙관하게 하고, 긍정하게 하는 성질이 그의 초기작에도 존재하였음을 깨닫게 하였다. 이는 흔치 않은 경지다.

출품작 중 가장 이른 시기에 그려진 그림에서 그가 보여주는 광경은 이채롭다. 그늘진 집의 한 모퉁이와 집의 그림자가 다른 집의 지붕에 드리워진 느낌을 전경에 두고 화면의 중앙, 주요부는 돌연 밝게 처리하는 과감한 연출을 보여준다. 화면을 가로지르며 펼쳐진 구릉을 온통 차지한 판자집 마을을 이루는 집들 하나하나에 당연히 드리워졌어야 할 어두운 부분이나 그림자를 모조리 소거하여 밝게 나타낸 것이다. 그 배후의 하늘 조차 어둡다. 하늘이 이 정도로 어둡다면 전경을 이루는 집의 모퉁이나 집의 그림자는 존재할 수 없다. 실제로는 전혀 일어날 수 없는 이런 설정은 강한 확신감을 지녀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전혀 모순을 느끼지 못할 정도이다. 이 그림이 그려질 무렵의 이청운은 30살 무렵이다. 1970년대의 마지막 해에 어느 누가 이런 확신에 찬 화면을 보여주는가? 식민지 이래 ‘도화’시간의 도학적인 투시도법, 뜨거운 각인처럼 우리를 눌렀던 명암법과 원근법의 억압이 서슬 퍼렇던 시기에. 아울러 이런 면은 정건모의 화면을 연상해보면 그다지 낯설지 않고, 이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청운이 만난 적도 없었겠지만 그의 화면과 소재를 다루는 태도는 마치 박수근의 대담함을 연상케 한다. 왕대밭에서 왕대가 난다는 속담처럼, 좋은 선배 예술가를 배운 자만이 좋은 예술가일 수 있다는 확신을 더욱 굳게 하는 사례라 여겨진다. 빛과 어둠을 대조시키는 그의 자세는 그의 그림세계에 지금도 관통하는 기본적인 성격이다.

 

크게 빛났던 이청운의 1980년대

 

구상전 금상 수상 거의 10년 후에 그는 단연 재부상한다. 세 번째로 열린 중앙미전 공모에 응하여 특선을 획득한 것이다. 이로부터 그는 여러 공모전에서 주목을 모으거나 상을 받는다. 1970년대 말부터 시작되어 1980년대 내내 이어진 말 그대로 역동하는 한국 사회의 한 특징을 만끽한다. 1980년대는 이청운의 화력에서 두 번째 연대이기도 하지만 최고의 성과를 보인 시기로써 그를 1980년대의 화가로 꼽기에 모자람이 없는 맹활약을 나타냈다. 도드라진 현상중 하나를 꼽아보자. 스포츠 일간지의 미술 담당 기자였던 이성부 시인이 국전(현 미술대전)의 전시작 중에서 최고작으로 이청운의 그림을 뽑은 것이다. 한마디로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이는 물론 국전이 실시된 초창기부터인 즉 이승만 정권 때부터 몇몇 월간지에서 시도한 별도의 추천이 전통이 되다시피 한 것의 연장선 위에서 시도한 것이다.

이런 와중에 첫 개인전이 1981년에 치루어졌다. 이청운 자신 자신에게 유리한 분위기에서 최대의 힘을 발휘하게 되었겠지만, 첫 개인전 이듬해 그는 중앙미전 최고상인 대상을 받음으로써 절정의 기세를 나타내 보인다. 이런 움직임에 대하여 미술사회는 대단히 호의를 드러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 전시행사도 초창기에 심사위원들의 나눠먹기식 행태로 인해 답보에 머물렀던 것이 심사진을 대폭 갈아치우면서 일어났던 것이다. 새로운 기운으로 오르막을 이루는 시대의 흐름에서 이청운이 도드라지는 형국이었다. 이 후 중앙미전 대상으로 정점을 찍는가 싶었던 이런 기운은 수년 뒤인 1985년 미술기자상, 프랑스로 건너간 직후인 1987년 살롱도톤느 전에서 1등상을 받으면서 국내에 그치지 않고 국외로까지 뻗어 그야말로 경이로운 결과를 만들었다.

 

현실과 발언 그리고 불법 감금

 

한편 이 시기 이청운에게 행운만 줄을 이었던 것은 아니다. 폭압적인 박정희 정권 말기인 1970년대 말에 우리 미술의 답답함에 견디지 못하던 일군의 엘리트 미술평론가와 작가군이 미술단체 현실과 발언을 만들었다. 박정희 사거 직후 열렸던 창립전이 금지되어 다른 장소에서 뒤에 열렸던 사정은 가까운 시기의 미술사에 기록되었다. 이청운이 서울로 활동무대를 옮긴 뒤 문제의 미술단체 현실과 발언의 회원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멀리는 정건모가 있었다. 정건모의 제자였던 손장섭도, 또한 그 직전까지 드물던 미술잡지 기자로 이청운의 활약상을 눈여겨 보던 고향 선배 김용태도 그를 현실과 발언으로 적극 이끌었다. 그는 이청운이 결혼 전 자신의 집에 수년 동안 살게 하기도 했다. 그가 가입한 미술단체 현실과 발언은 반드시 특기할 미술가단체이다. 각기 성격 있는 미술가 회원 말고도 이 단체에는 최민, 성완경 등 도저히 지나칠 수 없는 미술평론가 다수가 회원으로 있었다. 그래서인지 이들의 모임은 여느 미술가 단체와는 다른 진지함과 공부하는 분위기, 주제를 탐구하기 위한 답사가 잦았다. 이런 분위기 또한 이 땅의 어느 미술단체는 물론 대학에서조차도 맛보기 힘든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는 돌연 깨지고 만다. 그의 불운이라고 앞에서 말한 사정이 발생한 것이다. 현실과 발언의 다른 회원들이 교수, 이름만 말하면 다 알만한 명문인 고교와 대학 출신이거나, 비상한 역사과정 때문에 잘 뭉쳤던 지역 출신이었던 데 대하여 이청운은 그런 배경이 없었다. 그를 만만하게 본 정보당국은 이청운을 납치하여 무려 50일 가량이나 감금한 일이 생기고 말았다. 풀어주면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강요하여 지금껏 그의 이런 사정을 아는 이가 드물 정도이니, 그의 공포심이 얼마나 심각했을 지 짐작할 따름이다. 그가 각광받는 속에서 이를 즐길 수 있었던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를 택해 낯설고 먼 길을 떠난 이유에는 이런 까닭이 있었기 때문이다.

 

 

건강한 구석의 힘

 

중앙미술대전에서 대상을 거머쥐고, 당시 신망 높은 사립 미술관이던 서울미술관이 선정한 문제작가에도 선정되면서 용기 백배한 이청운의 1982년 전시작은 그가 유년과 청년 시절을 보낸 부산의 항구 풍경을 보여준다. 항구하면 거개의 화가들이 감상적이고 애수적인 면모를 보여주므로 상투성마저 느끼게 되지만, 그가 부여한 그림의 제목 ‘구석’과 달리 구석진 느낌은 전혀 없고 화면에서 느껴지는 것은 강건한 힘이다. 그래서 보여주는 것이 ‘구석의 힘’인가? 힘이 느껴지는 항구 그림이다. 그의 젊음과 그 시절 우리 사회의 진전하고자 하는 힘이 얼마나 드셌던가를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그런데 마지 못해 선택한 외유에서 그는 또 대단한 성과를 거둔다. 그것이 앞서 말했던 살롱도톤느 전에서의 1등상 수상이었다.

그러나 새옹지마의 인생살이런가? 이런 수상의 영예도 지금 그의 삶과 그가 속했던 우리 사회의 변화에 비추면 이 말이 전혀 과장이 아니다. 이른바 민주화를 성취하고, 비록 군사정권에 이어 학살로 집권한 세력과 타협하여 만들어진 사이비 민간정권이었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민주화를 쟁취하여 힘을 얻은 한국 사회는 엄청난 변화를 자아낸다. 특히 전후세대인 이청운을 둘러싼 변화도 그 이전의 열강의 침략과 식민지였던 시대조차 상대적 안정기로 여겨질 상전벽해의 변화였다. 이에 따라서 선량한 화가들의 변화도 강요되다시피 한 세월이었다. 이청운 보다 좀 앞선 세대이긴 하지만 이전 세대로 박고석, 김서봉, 박서보 등의 이름만 떠올려 보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변모 무쌍함은 우리를 당황하게 할 정도다. 우리가 거쳐 온 지난 100년 남짓의 시간이 얼마나 역동과 혼동 그 자체였던 지 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한편 그가 결혼하고 수배를 피해 숨어다니다 결국 잡혀가는 시기인 1982년 후반기와 이듬해에 그는 지난 삶을 드러내는 그림을 그렸다.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K씨의 회상>과 <광대>가 그것이다. 자전적이거나 자화상의 면모를 가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전의 그림이 그림으로서의 성격에 충실하여 성공적인 데 대해 이 그림들의 속 내용을 이루는 체험은 극적이었으나 이를 형상화하는 데서는 그다지 성공하지는 못한 것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독재 정권의 앞잡이들에게 잡혀가서 되풀이 받은 협박성 질문에는 왜 ‘구석’을 내내 그리냐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런 체험으로 자신이 광대가 아닌가 하는 상념을 지울 수 없었다. 어린 시절을 포함해, 아무리 해도 잊지 못할 쓰라린 체험들이었기 때문에 그냥 지나칠 수는 도저히 없는 것이었지만 그림으로 다룰 성격의 소재로는 적절치 않아 보인다고 여기고 싶다.

 

마치면서 그리고 그의 오늘

 

1980년대 후반부터 그는 훨씬 접사된 광경을 그린다. 멀리서 조망하는 듯 한 초기작과 달리 대상에 접근함으로써 그는 점경으로 처리된 인물이라도 살아 움직이는 느낌을 물씬 느끼게 한다. 화면은 훨씬 넉넉해지고, 자유로운 붓질과 색감이 초기의 딱딱하고 엄격함을 넘는다.

최근에 그린 그림에서 그는 전과 달리 화면 전체가 두터워졌다. 특히 밝은 부분에 그런 질감을 더욱 형성하여 따스하고 아늑한 느낌을 더하고 있다. 그리하여 도달한 그림의 제목 붙이기는 ‘삶의 힘’이고, ‘위대한 삶의 이야기’이다. 이청운의 편력은 ‘구석’에서 ‘위대한’이라는 형용사가 붙은 사는 이야기로 펼쳐지고 있다. 이청운이라는 화가의 자아가 긍정적임을 보여주는 조용한 증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번 전시는 화가 이청운을 오래전부터 알고 사랑해 오던 아라아트 김명성 대표의 후의로 마련된 것이다. 아주 활발했다고 평할 수 있는 활약상을 보였던 이청운이었지만, 그의 초기작을 망라하다시피 한 자리에 모을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가 자랐던 부산에서 개인전이 한 번도 열리지 않은 것은 나로서도 섭섭한 일이다. 앞으로를 기대한다. 아울러 초기와 별도로 높은 성취를 보인 그의 근작 전시도 따로 멀지 않은 어느 날 펼쳐지기를 기대한다. 다시 한 번 이런 기회를 만든 김명성 대표께 늘 좋은 구경거리를 기대하는 직업 구경꾼으로서 감사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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