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없는 시대 - 황동규(1938~ )


늙마에 미국 가는 친구

이메일과 전화에 매달려 서울서처럼 살다가

자식 곁에서 죽겠다고 하지만

늦가을 비 추적추적 내리는 저녁 인사동에서 만나

따끈한 오뎅 안주로

천천히 한잔할 도리는 없겠구나.

 
허나 같이 살다 누가 먼저 세상 뜨는 것보다

서로의 추억이 반짝일 때 헤어지는 맛도 있겠다.

잘 가거라.

박테리아들도 둘로 갈라질 때 쾌락이 없다면

왜 힘들여 갈라지겠는가?

허허.


친구가 별로 없는 나의 친구 한 사람도 며칠 전에 미국으로 이민 갔다. ‘늙마’에 평생 살아온 조국을 떠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고향에 뼈를 묻겠다는 낭만적 관행이 차츰 퇴색하는 듯하다. 꼭 자식 곁에서 죽겠다기보다는 혹시 고향과 조국이 싫어진 것 아닐까? 어쩌면 세월호 참사도 앞으로 이민의 촉매로 작용하게 될지 모른다.

 동기가 무엇이든 이민은 용기 있는 결단임에 틀림없다. 시인은 아직 “추억이 반짝일 때 헤어지는 맛”을 음미하며 친구를 떠나보내지만, 착한 동포들은 한 나라 같은 도시에 살면서도 만나지 못하는 아쉬움 속에 여생을 보낼 터이니 말이다.

<김광규·시인, 한양대 명예교수>

 

[중앙일보 스크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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