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생진시인 / 사진:오마이뉴스 방관식기자

바다 위에 떠있는 섬을 걷고 또 걸으며 시를 써 온 ‘섬 시인’ 이생진씨가 뭍으로,

그것도 북적이는 시내 한복판 인사동으로 창작의 무대를 옮겼다.

‘인사동’(우리글)은 미로 같은 골목마다 숨은 찻집, 술집, 밥집과 그곳을 드나드는

우리 시대 예술가들의 친근한 모습을 정감있게 그려낸 시인의 신작 시집.

지난해 5월 소설가 박인식씨가 인사동을 무대로 불꽃같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실명소설 ‘인사동 블루스’를 낸 데 이어 인사동을 주제로 한 시집까지 출간된 것을 보면

예술인들에게 인사동이라는 장소가 갖는 의미는 역시 남다른 모양이다.

이씨는 시집 머리말에서 “시인은 섬과 같아 겉으로는 사람을 멀리하지만 속으로는 늘 사람을 그리워한다”면서

“인사동에 상혼(商魂)만 북적거리라는 법은 없다. 시혼(詩魂)도 끼어들어 시성(詩聲)을 높여야 한다”고 썼다.

 

실제 시인은 박희진 시인(65)과 함께 2000년부터 인사동 찻집 등에서 시 낭송회를 가져왔다.

‘아트사이드’와 ‘시인학교’를 거쳐 지금은 ‘보리수’에서 매월 마지막 주 월요일 오후 7시에 낭송회가 열린다.

‘시인학교’는 1983년 정태승 시인이 문을 연 찻집으로 2004년 리모델링을 이유로 헐렸다.

그때의 허전한 마음을 시인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인사동/‘바람 부는 섬’ 옆에 ‘시인학교’가 있었다/그곳에서 김종삼의 ‘시인학교’를/브란덴브르그에 기대어 읽다가/

리모델링 바람에 내 마임이 헐리고 허전해서/바람 부는 섬에 와 있다/-이 섬도 헐리나요?/‘아뇨’/-

그럼 여기서 시를 읽어도 되나요?/‘…….’/대답이 없는 것을 보니 마음에 없다는 소리/

그래서 나는 도시의 섬을 버리고/진짜 바람 부는 섬 마라도로 왔다/

/여기서 시를 읽어도 되나요?/아무도 거절하는 사람이 없다.”(시인학교)

 

시는 이밖에 고 천상병 시인의 아내 ‘목 여사’가 운영하는 찻집 ‘귀천(歸天)’,

인사동 뒷골목의 허술한 카페지만 송상욱 시인이 기타를 치고 화가들이 손뼉을 치며 어울리는 곳 ‘시인과 화가’,

벽과 방이 온통 낙서로 도배된 향수어린 토속음식점 ‘풍류사랑’ 등

인사동 곳곳의 사람냄새 물씬 나는 장소를 무대로 인생과 예술을 노래한다.

시인이 현장의 모습을 직접 그린 스케치화와 친절한 주석이 함께 실렸다.

 

 2006.01.05 경향신문 / 이상주기자 sjlee@kyunghyang.com〉

마지막 인연의 끈을 내려놓지 못하는 곳이 동자동과 인사동이다.

한 곳은 삶의 전쟁터고 한 곳은 마음의 고향이다.

동자동도 인사동도 빨간불이 켜진지 오래지만, 어쩌겠는가?

세월 따라 변하는 것이 세상 이치인 것을...

 

지난 수요일은 동자동 빈민들 생수 나누어 주는 날이었다.

쪽방 더위를 견딜수만 있다면, 한 시간 쯤 땡볕에서 줄 서는 것이야 할수도 있다.

더위에 지친 이들의 갈증에 불만도 따랐으나, 고마운 배려였다.

 

사소한 일로 목소리가 높아진 두 젊은이는 죽일 듯 주먹을 치켜세웠다.

 "씨발놈아~", "오로새끼!"만 서로 반복하며, 주먹은 계속 허공을 맴돌았다.

매값을 훤히 알고 있으니, 어찌 성질대로 하겠는가?

 

지루함을 메워주는 퍼포먼스처럼 한참을 싸우더니,

물이 도착하니 약속이라도 한듯 싸움을 끝냈다.

 

작은 생수 스무 병 묶음이 일사불란하게 분배되었다.

삼백 명 한정이라 외출을 하지 않는 늙은이는 몰라서도 못 얻지만,

힘없는 노인들은 높은 곳까지 들고 가기도 힘들다.

가난한 사람 중에서도 매번 늙고 힘없는 사람만 소외된다.

 

 '공정'이란 말을 혁명 공약처럼 내 세우는 분들이시여!

제발 밑바닥 인생, 작은 것부터 공정하게 해 주세요.

 

오후 늦게는 모처럼 인사동 나갈 일이 생겼다.

한때 인사동에서 작은 뜨락을 운영한 노인자씨가 추억이나 까먹자는 연락이 와서다.

 

먼저 인사동 골목부터 돌아보았다.

죽을 때가 되면 이곳 저곳 돌아본다던데, 죽을 때가 되었을까?

콧수염으로 불리던 사진가 김영수씨가 오르내리던 작업실 골목도 갔다.

 

깐죽대던 강용대가 김영수의 군화발에 차여 처박힌 곳에서부터,

10원짜리 동전을 펼쳐 놓고 일원 짜리와 바꾸어주는 돈장사 퍼포먼스에 이르기까지,

화가 강용대 유적지가 가장 많이 떠올랐.

금방이라도 머리를 풀어 헤친 까딱이가 고개를 까딱이며 나타날 것 같았다.

 

실비대학’으로 불린 '실비식당'은 개털의 소굴이었다.

물주 기다리다 잠든 어디엔들 머물 곳이 없으랴의 땡초시인 적음도,

유일한 물주였던 한국일보 사진기자 김종구도 이제 모두 저세상 사람들이다.

 

노동자시인 김신용의 '조빠하'란 시어가 안주가 되던 그런 시절이었다.

알몸으로 난장판 된 실비대학 결혼식 뒤풀이 등

끊어지고 뒤엉킨 추억의 실타래를 되 감는다.

 

소설가 배평모를 만나 이박 삼일동안 한자리에서 죽쳤던 레떼도 생각났다.

죽이 맞은 술친구보다, 주모 이점숙의 갈까보다’ 노래가 발목 잡았다.

 

사진쟁이들이 많이 들락거린 꽃나라흑백현상소보다

그들과 어울려 술잔 나누던  뚱뚱이 삼겹살 집이 더 그립더라.

 

천상병시인의 아지트였던 귀천만 자리를 옮겨 살아남았을 뿐,

‘실비집'에서 부터 ‘누님칼국수’, 수희재',  '하가', '춘원', '평화만들기' 등

많은 주막과 찻집이 종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때 이야기를 아는 분도 별로 없겠지만,

세대 따라 인사동에 대한 추억도 다양할 수밖에 없다.

 

40대의 한 분처럼 추운 겨울날 호떡 하나 사 먹기 위해

한 시간 가까이 떨며 기다리다 호떡을 사고보니 입이 얼어 호떡 맛을 알 수 없었다는 분에서 부터,

 쌈지에 대한 추억이 많은 30대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른 추억을 떠올린다.

 

 노인자씨가 운영한 작은 뜨락도 한 때는 인사동 참새들의 방앗간이었다.

마신 만큼 자진 납부하는 콧구멍한 대폿집이라 매상도 신통찮은데다,

그마저 외상 하는 골패들이 늘렸으니, 어찌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약속장소인 유목민 본래의 카페도 떠올랐다.

그땐 ’이란 카페였는데, 착 가라앉은 술집 분위기가 연애걸기 딱 좋았다.

그곳에서 들었던 킹크림슨의 아일랜드‘가 아직까지 귓가에 맴돈다.

 

유목민에는 이대훈, 노인자 내외와 정영신 동지가 기다리고 있었고,

안쪽에는 화가 유준씨를 비롯한 많은 분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두 내외를 몇 년 만에 만났는데, 노보살은 살이 포동포동한데 반해 이대감은 나처럼 비쩍 말라 있었다.

 

노보살만 드시고 이대감은 굶겼을까도 생각했는데,

진짜 단식원에 집어넣어 모질게 십키로나 살을 뺏다고 한다.

그러고도 술과 인연을 끊지 못해 빨간딱지나 찾고 있으니. 이 일을 어쩌랴!

 

주거니 받거니 하는 '유목민' 주인장 역시 술은 독약이지만,

술을 너무 사랑해 목숨 걸고 마시는 것이다.

 

 오늘도 술에 절어 '미워도 다시 한번'을 곱씹는다.

 

인사동은 마음의 고향이 아니라 술의 고향이던가?

 

사진,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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