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창원의 김의권씨가 세상을 떠났다는 부고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친한 친구이기에 앞서, 그의 죽음은 무심했던 내 죄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떠난 사람이야 세상 시름 모두 내려놓고, 행복과 사랑이 넘치는 곳으로 가는 축복받을 일이지만,

단지 살아남은 자들의 아쉬움이고 슬픔일 뿐이다.

 

운명을 달리한 김의권은 불의에 분노할 줄 알고, 남의 슬픔에 가슴 아파하는 그런 평범한 예술가였다.

음악과 그림, 그라픽디자인, 실내장식 등 다양한 재능을 가졌으나

특정 예술을 간판으로 내세워 포장하는 짓은 못한다.

 

그리고 자신을 내세우는 일에는 더더욱 질색이다.

그냥 예술과 사람이 좋아 인사동을 고향처럼 드나들던, 우리 시대의 한 저항아였고 풍류객이었다.

 

그를 처음 만난 지도 어언 반세기가 흘렀다.

고향 친구는 아니지만, 긴 청춘을 함께 누렸기에 고향 친구보다 정분은 더 깊다.

 

그를 알게 된 것은 1970, 부산 에덴공원의 난향 음악실에서 처음 만났다.

리퀘스트 용지에 빵모자를 쓴 자화상의 케리커쳐를 그려놓았는데,

제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퀸시 존스'의 음악이었다.

누가 신청했는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말없이 음악에 빠져있다 눈길이라도 마주치면 배시시 웃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자유와 평화를 추구하는 히피라는 듯...

음악과 이념이 같다는 이유로 정남규, 황성건, 신윤택 등과 어울려 어지간히 놀았다.

미망인이 된 최갑순여사도 그가 경영한 마산 수림음악실에서 만나게 되었다니,

어쩌면 음악이 맺어 준 것은 공통의 인연이 아닌가? 생각된다.

 

미망인의 회고에 의하면 그를 처음 만난 것은 대학생 때 였다고 한다.

방송실에서 신문 사설을 읽어가며 독재정권을 비판하는 용기에, 마음을 빼앗긴 것 같더라.

대중이 모인 장소에서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망인 역시 부마민주항쟁에 앞장섰던 학생이라 어쩌면 동지애 같은 것도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좋은 사람에 대한 이상은 현실과 너무 멀었다.

고인 역시, 돈이 판치는 세상에 히피의 삶을 산다는 것이 간단치 않았을 것이다.

낙천적으로 사는 대개의 예술가들이 겪는 운명의 장난인지 모른다.

예술로 밥 먹고 산다는 것이 힘든 것은 어제 오늘만의 일도 아니다.

 

거기다 심성까지 모질지 못해, 일 해주고도 실내장식비도 못 받는 일이 비일비재한데다

그것도 모자라 툭하면 남의 빚보증까지 서, 집을 날릴 뻔 한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사람이 어질어 밖에서 좋은 말 듣게 되면, 죽어나는 건 가족뿐이다.

 

그런데도 남에게 싫은 소리는 죽어도 못한다.

부탁은 물론 아들딸 결혼식이나 몸 아프다는 연락까지 안 하는 고집불통이었다.

천성이 그러니 어찌하겠냐마는, 아내 최여사가 얼마나 답답했겠는가?

 

다행히 아내가 팔 걷고 나서서 자식들을 잘 키웠으나,

경상도 사내의 고약한 성질머리는 고맙다는 말 한마디 못 했을 것이다.

 

아내 최갑순씨는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이사장으로 있고,

변호사로 일하는 아들 형일은 일남일녀를 두어 화목하게 살고,

교사로 일하는 딸 엄지까지 결혼하여 만삭이라니, 무슨 부족함이 있으랴!

말년에 손자 재롱이나 즐길 형편에 그리도 갈 길이 바쁘던가?

 

지난 15일 정동지와 창원 파티마병원 장례식장을 찾아갔더니,

공윤희씨는 기다리다 지쳐 가버렸고, 이종호씨만 장례식장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빈소에는 스스로를 그린 자화상이 영정사진을 대신했는데,

거리를 방황하는 풍류객의 삶을 대변하듯 쓸쓸했다.

 

고인의 영전에 향을 사르며 영원한 안식을 빌었다.

죽는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나는 죽지 않고 친구가 가는 걸 보니,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사더라.

인사동 친구들이 그리워 일만 있으면 지팡이 짚고 인사동을 들락거렸으나, 세상인심은 그와 달랐다.

병석에 있는 김상현씨만 조의금을 대신 전달해 달라는 연락을 해왔을 뿐이다.

 

하기야! 먼 길까지 문상가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아무리 그렇지만, 가깝게 지내던 마산의 후배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정승집 개가 죽으면 문상객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정승이 죽으면 문상객 보기 어렵다는 말은 오래된 말이지만,

요즘은 가족을 모르면 친구도 문상가지 않는다는 말로 바꾸어야 할 판이다.

 

그러나 돗대기 시장 장삿꾼도 아니고 예술가들이 아니던가? 

평소에 가족을 동반하지 못한 원죄는 있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이.

어느 풍류객이 마누라 끌고 다니며 풍류를 즐긴 자가 몇이나 되던가?

 

오래전 찍어 둔 알몸 영정사진은 정선 화재 때 불타 미처 프린트할 여유도 없었지만,

대개 너무 늦게 알거나 상주의 이해를 구하지 못해 번번이 불발되었다.

사람 크기로 프린트한 알몸사진을 내세워 초상집을 잔칫집으로 만들 생각이었으나

가족들의 오래된 고정관념을 바꿀 수도 없지만, 인터넷에 올리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미투란 요상한 바람이 불어 이성을 사랑으로 보지 않고 적으로 여기는 삭막한 세상이 되고 말았다.

 

얼마 전, 알몸 영정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렸더니, 삭제해 버리는 일도 있었다.

그래서 그의 죽음을 알리는 영정사진은 아랫도리를 잘라 상체만 올린 것이다.

내가 죽는 날은 먼저 간 친구들의 초상까지 함께 내거는 축제를 열기로 했다.

 

오랜만에 이종호씨를 만나 술 한잔 나누고 있으니, 친구 황성근이도 찾아왔고,

40여 년 동안 의권이 따까리 노릇만 했다는 변형주씨도 나타났다.

어제는 신윤택, 최정순, 신병섭씨도 다녀갔다고 한다.

눈물을 글썽이던 미망인은 미운 정만 꽤 씹으며 고인을 원망했으나,

긴 세월의 고운 정 미운 정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는가?

 

고인이 마지막으로 아내에게 했다는 미안하다! 너한테 미안하고, 나 자신에게 미안하다!”는

말은 가정보다 밖으로 떠도는 풍류객들이 되새겨야 할 대목으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요즘은 상갓집 풍경도 많이 변했더라.

밤새도록 빈소를 지키며 술 마시는 풍습은 옛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손님이 뜸하니 도우미까지 퇴근하고, 젊은 상주만 빈소를 지켰다.

황성건과 변형주씨만 상가에서 마련해 준 가까운 여관에서 자고,

나와 정동지는 이종호씨가 마련해 준 '엠배스더호텔'에 자는 호강도 했다.

 

호텔 인근 찻집에서 사진하는 조성제씨를 만나기도 했는데,

오랜만에 사진판 돌아가는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었다.

 

그 이튿날 발인시간에 맞추어 서둘러 장례식장에 갔더니,

그때까지 황성건과 변형주씨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 상가에서 챙겨 간 술로 밤새도록 퍼마신 것 같았다.

 

추모 미사에서 편히 승천하라는 축원도 올렸다.

할아버지 영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손녀의 모습에 가슴이 미어졌다.

 

세단에 실려 하늘나라로 떠나는 친구의 뒷모습은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조문객이야 많았지만, 정작 마음 주었던 사람이 보이지 않아서다.

 

한편으론 부럽기도 했다.

욕심부리지 않고 초연하게 살다 간 그 그림자가...

 

의권아~ 잘 가거라! 그곳에는 먼저 간 홍수진과 정남규를 비롯하여 적음도 있고,

삐뚤 웃음으로 반기는 창동허새비 이선관 시인이나 현재호 화백도 계신다.

그리고 만나기만 하면 노잣돈 달라던 천상병시인도 반길거다.

부디 사랑과 행복이 넘치는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린다

 

자유인을 꿈꾸어 온 김의권은 이 시대 마지막 희피였다.

돈이 지배하는 야멸찬 세상에,  그 자리를 지켜 온 것만도 용타!

머지않아 전설이 된 빨치산처럼, 모두 사라질 것이다.

 

 

선관 형의 ! 함성을 조시로 올린다.

 

당신들은 아는가

십년이 지나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이십구년이 된 지금까지도

점점점 더 진하게 들려오는

저 함성 함성

구암동 애기봉 중턱에

눈감지 못하고 누워 있는

죽어도 살아 있는 열사들이여

살아 있음이 죽어 있는

우리들은 오늘

들려오는 함성 소리에

부끄럽게

묵념을 올립니다

 

사진,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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