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석태의 WHY YOU

일본 점령기에 신라와 고려의 그릇을 그려내

우리의 빛나는 고전문화를 드러내려 하다

 

병풍은 여러 장의 그림을 각기 바탕에 펴붙이고 접을 수도 있게 한 것이다. 보고 싶으면 세워서 열어본 뒤 접어서 보관하면 되므로 간단하고 편리하다. 병풍 전체가 하나의 그림이 되기도 하지만, 각기이되 비슷한 성격의 주제나 소재를 취하는 경우도 많다. 최소 2장부터 많게는 10장 이상을 이어붙인 것도 있다.

 

이도영, 나려기완, 전 12폭, 각 137. 3x32.3센티미터, 1930, 제10회 서화협회전 출품작, 경기도립박물관 소장.

이도영의 특별한 기명절지 그림 가운데에는, 12폭으로 이루어진 <나려기완>이 있다. 1930년에 그린 그림이다. 앞서 <고색찬연>이나 <아> 를 소개하면서도 말했지만, 이도영은 그림에 붙이는 이름도 남다르다.

 

이 병풍의 '나려'는, 신라의 '라'와 고려의 '려'를 연결한 말로, 대략 조선 왕조 이전의 고전문화를 가리키는 말이다. 나말 여초니, 여말 선초니 하는 말과 같이 어느 시기를 가리키는 말로 떠올리면 되겠다.

 

<나려기완>이라는 제목은, 신라의 토기와 고려의 청자 등을 통해 '우리의 빛나는 고전 문화를 보시라!'는 말을 하는 듯하다.

 

▲ 나려기완의 첫부분 6마디. 맨 오른쪽이 1폭으로, 오른쪽부터 왼쪽으로 본다.

병풍의 맨 오른쪽, 첫 번째 폭부터 보자. 다리가 높이 솟은 탁자 위에 소나무 분재가 그려져 있다. 가지를 넓게 벌려져 전체 화면을 거의 지배한다. 그 앞에는 기이한 모양의 돌이 세워져 있다. 화면 아래에는 영지와 연꽃 봉오리로 보이는 정물을 첨가했다. 하지만 사실 이 첫 번째 폭의 주인공은 그 사이에 있는 청자 향로다. 아래에 확대한 청자기린 향로를 보면, 기린 모양 뚜껑을 얹은 고려시기 그릇이다.

 

▲ 이도영, 나려기완, 전 12폭 중에서 제1폭, 청자 향로 부분)

고려의 청자는 보통 신비한 빛깔과 상감기법으로 알려졌지만, 그 모양도 빼어나게 아름답다. 그래서 그것이 만들어져 사용된 고려시기에 이미 중국이나 일본에도 알려졌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며 유행이 바뀌어, 청자는 조선 말기가 되면 흔적조차 볼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땅을 집어먹으려던 일본이 우리 조상들의 무덤을 파헤쳐 부장품이었던 청자를 대량으로 발굴하여 진기한 물건으로 선물하거나 팔고 사는 골동품이 되게 만들었다.

 

이 그림에서 청자기린 향로는 뒤에 있는 괴석과 한 덩어리로 보여서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이 아쉽다. 그림의 맨 아래에는, 이 그림을 그린 해에 47살이라고 밝힌 도장을 찍었다. 같은 도장이 7번째 그림에도 있다.

 

두 번째 폭에는 몸통에 구멍이 뚫리고, 어깨에는 두 마리의 뿔난 사슴을 얹은 질그릇이 등장한다. 가야 지역에서 발굴된 그릇으로, 독특한 모양으로 발굴 당시부터 눈길을 모았다. 이렇게 첫 번째와 두 번째 폭에서 시대 순서가 바뀌기는 했어도, 고려와 가야 흑은 옛신라의 대표 문물을 내세웠다. 물론 고고발굴에 의해 당시 사람들의 눈앞에 비로소 제시되는 것이다.

 

▲ 나려기완 두번째 폭에 등장하는 가야 혹은 옛신라의 특이한 토기, 고고발굴에 의한 것

세 번째 폭과 여섯 번째 그림에는 제목이 따로 적혀있다. 이 병풍이 처음부터 일관되게 기획된 것이 아닐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어느 시대 기명인지도 잘 모를 정도다. 네 번 째 폭은 구름 속을 날아가는 학이 상감된 청자 매병과 청동거울 그리고 손잡이 달린 굽높은 토기에 담긴 바나나를 그렸다. 한 화면에 토기와 고려의 대표 상징을 넣었다.

 

다섯 번째 그림에도 토기가 보인다. 이 병풍 보다 전전해에 잡지 <여시>에 게재한 그림 <아>에 주요하게 등장하는 바로 그 그릇이다. 가야 토기로 그 독특한 모양으로 인상에 남는 그릇이다. 여섯 번째 폭에 그려진 류의 그림은 장승업 이래 이도영의 앞뒤 시기에 활동한 화가들이 흔히 그리던 방식의 그림이다. 이도영에게도 이런 그림이 적지 않게 남아있다. 이런 종류의 그림만 본 사람은 이도영이 그저 그런 별대수롭잖은 화가로 기억할 것이다.

 

이도영 나려기완 12폭 병풍의 뒷 마디 여섯폭, 종이에 채색, 각 32. 3X137. 3센티미터, 1930, 용인 경기도립박물관 소장

별도로 제목을 적지 않았지만, 이 병풍의 나머지 그림들도 비슷한 성격이다. 다만 두번째와 네번째 그리고 아홉 번째와 마지막 폭에는 각각 토기가 그려져 있고, 아홉 번째 그림의 토기 뒤에 갈색으로 그려진 참외모양을 한 커다란 병은 청자 빛깔이 아닌 것으로 보이지만, 고려 시기의 상감청자로 고려의 향기를 전하고 있다. 열 번째 폭에도 푸른빛으로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고려를 대표하는 청자 표주박 모양 병이 그려져 있어 이채로운 모습을 뽑낸다.

 

마지막 폭에는 매화 가지를 꽂은 길다란 원통형 청동기가 화면을 지배하듯 하다. 이 청동기와 꽃그림이 압도하여 눈에 잘 뜨이지는 않지만, 아래 쪽에 뚜껑 덮인 토기 합이 그려져 있다. 이 그릇은 발이 셋인데, 토기에 발이 셋 있는 것은 우리 문화권에서만 발견된다고 한다. 그 앞에 석류와 불수감 등을 배치해 마무리했다. 그림에 적힌 글귀는, 그림을 그린 연도를 간지명과 제10회 서화협회 전람회 출품작임을 밝히고 있다. 그림의 첫 폭과 일곱 번째 폭의 아래 오른쪽에, 이 그림을 그렸을 때 화가의 나이를 새긴 도장이 찍혀있어서 시기를 확인할 수 있다.

 

▲ 왼쪽은 제10회 서화협회 전람회에 출품작이라는 내용을 적은 나려기완의 마지막 폭.오른쪽 2폭은 그린해를 모르는 잡화병 전 10폭 중 제2폭과 5폭,

 

이 <나려기완>을 보고 쓴 글이 있다. 당대 최고의 인기 소설가이자 우리 옛문화, 특히 김정희의 글씨에 대한 수필을 여럿 남기기도 하고, 미술에 대한 글도 어지간히 남긴 이태준이 쓴 것이다. 그는 가난하여 일본 유학시절을 짧게 맛볼 수 없었지만, 이 기간을 길진섭 김용준과 함께 보내기도 하여 미술과 미술가에 대해 낯설지 않은 보기드문 문학가이기도 하다.

 

이도영 씨 <추동> 기타 (출품작) 3점 모두 병풍이다. 그 중에서도 제일 큰 만치 <나려기완>이 장내의 이채이며 재래식 기명절지에 비기어 또한 이채의 작품이다. 기명이 모두 조선 것을 참조하였음이 그렇고, 절지에 있어 현대 우리 일상생활의 것을 취하였음이 그렇다. 고아(高雅)한 작자의 개성적 반사를 느끼기에 족하였다. - 이태준, 제10회 서화협회전을 보고(4), 동아일보, 1930. 10, 26

이태준이 쓴 이 관람기는 5번에 걸쳐 실려있는데, 처음 연재분부터 그의 통찰력은 눈부신 바가 있다. 이른바 근대 시기 우리 전통 그림이 처한 상황을 이처럼 잘 정리한 글도 드물다고 여겨진다. 이 부분의 글도 정확하고도 탁월한 것이다. 수년 뒤에 이도영이 사망한 뒤 열린 서화협회전람회의 이도영 특별전에서 이도영의 그림을 본 시인이자 평론가 김기림도 남다른 평가를 남겼다. 미술에 밝기로 소문이 난 두 사람이기도 하지만, 함께 구인회 활동을 하면서 자주 만나서 문학 이야기만이 아니라 그림 이야기도 많이 나누었을 것을 상상할 수 있다.

김기림의 글은 다음에 소개하겠지만, 먼 훗날에 이태준과 김기림은 이른바 월북, 납북자로 금기시되어 우리의 뇌리에서 오래 사라졌다가 돌아온, 어두운 역사가 있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들의 문학은 물론, 귀하게 남긴 좋은 의견도 사라졌다가 이제 다시 돌아왔다. 이도영의 그림도 우리들에게 돌아오기를 희망한다.

[미술평론가 / 최석태]

[출처] 뉴스아트 (https://www.news-art.co.kr)

수염이 풍부한 노인이 보이고 그 앞에 한 젊은이가 꿇어앉아 한 권의 책을 받들고 있다. 배경은 나무가 둘러있는 석굴인 듯 하다. 그림의 오른쪽 위에 큰 한자 글씨가 세로로 “석굴수서”라고 적혀있다. 석굴을 배경으로, 한 노인이 젊은 남자에게 책을 주고 받는 광경을 그렸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곁에 작은 글씨로 적힌 것은 그림의 내용인데, 김유신의 젊은 시절 이야기이다. 이런 저런 책들을 참고하여 살펴보니 삼국사기에서 따다 적으면서 약간의 변개를 거쳤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전' 부분에서 해당하는 내용을 보자.

 

▲ 이도영 1883-1933, 석굴수서, 비단에 색칠, 85. 3x 182. 2센티미터, 1922,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 초대작, 이홍근 기증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진평왕 28년에 김유신의 나이 17살이 된 때이다. 옆 나라들이 침범하는 것을 보고, 의분이 북받쳐 적도들을 평정할 뜻을 품고 홀로 중악의 석굴로 들어가 재계하고 하늘에 고해 맹세하였다. “적국들이 도의가 없어 승냥이와 호랑이가 되어 우리 강토를 어지럽히니 평안할 날이 없었습니다. 저는 일개 미천한 신하로 재주와 힘은 보잘것없으나 나라의 환란을 없애고자 하는 뜻을 가지고 있사오니, 바라옵건대 하늘은 굽어 살피사 저를 도와주소서.”

나흘 후 홀연히 거친 베옷을 입은 노인 한 분이 나타나서 물었다. “이곳은 독벌레와 맹수가 들끓어 두려운 곳인데, 귀한 소년이 이 외진 곳에 무슨 까닭으로 왔느냐?” “어르신께서는 어디서 오셨습니까? 존함을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나는 정한 곳 없이 인연에 따라 오고 가며, 이름은 난승이라고 한다.” 유신은 그 말을 듣고 범상치 않은 사람인 줄을 알고, 다시 절하고 나아가 아뢰었다. “저는 신라사람입니다. 나라의 원수를 보니 마음이 아프고 머리가 근심으로 가득차서, 이곳에 와 무슨 계제를 만날 것을 바랄 뿐이었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어르신께서는 저의 정성을 가엾게 여기시어 방술을 일러주소서.”

 

노인은 잠자코 말이 없었다. 유신은 눈물을 흘리며 부지런히 간청하기를 예닐곱 번이나 하였다. 그제야 노인은 말문을 열었다. “그대는 아직 어린데도 삼국을 아우를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어찌 장하다 하지 않으랴.” 이윽고 비법을 주면서 다시 말하였다. “삼가 함부로 전하지 말라. 만약 의롭지 못한 데에 쓴다면 도리어 그 재앙을 받을 것이다.” 노인은 말을 마치자마자 곧 떠나 2리쯤 멀어지니, 유신이 쫓아가 둘러보았으나 보이지 않고 오직 산 위에 오색빛만 찬연하였다.

 

               - 김부식 외,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 앞머리에서, 이강래 옮김, 한길사,751~2쪽

 

이 열전은 조선 시대 말기에 내용이 더해져 소설로도 만들어졌다. 이도영이 태어날 무렵이었다.이정균이란 분이 지었고, 그가 사망하는 해인 1899년에 간행하였다. 이 소설은 뒤에 나온 이런저런 김유신 전기소설의 원본이 되었다.

 

이 그림을 그린 이도영은 1884년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여러 곳의 군수를 지냈으며, 할아버지는 오늘날 서울시장에 해당하는 한성판윤을 지냈다. 조선시대 내내 고위 벼슬자리를 차지한 8대 권문세가의 하나인 연안 이씨 문중이다. 이도영은 신식 화폐를 제조하기 위해 설립한 전환국의 분석과에서 공부하고 여러 애국계몽단체에서 활동하다가 만화를 그리기도 한, 당대 미술가들과는 분명 구별되는 남다른 행적을 보였다.

 

이 그림은 우리 근대 본격 역사화의 하나이다. 더욱이 일본 강점기에 우리 역사를 가르치지 못하게 한 분위기에서 그려진 것이라는 점에서 더 큰 의미가 있다. 우리 근대 회화에서는, 이전에 소개한 이여성의 사례(최초 조선역사 회화가 이여성의 <격구>)를 제외하면 역사화라할 만한 것이 없다. 이순신, 논개의 단순한 인물초상화나, 최치원이나 을지문덕 같은 인물에 일본 옷을 입혀 그려서 오히려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하는 어처구니 없는 예만 있을 뿐이다. 이런 사정을 살피면, 일찌기 그려진 이도영의 이 그림은 더욱 돋보이는바가 있다.

 

▲ 석굴수서 부분
 

김유신의 젊은 시절 일화를 다루었다는 점 말고도 이 그림이 눈길을 끄는 요소가 또 있다. 김유신 옆에 있는 좁고 높은 탁자 위에 있는 토기와 그 뒤의 질그릇들이다. 이 그림과 거의 동시에 그려진 <고색찬연>이라는 작품에 등장하는 기물들과 같은 성격을 띠는 소재로, 이는 이도영의 남다른 시도라 평가할 수 있다.

 

이 그림에 등장하는 토기는, 제작연도를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는 최초의 토기이다. 이도영의 그림은 그러한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그림에 반영한 희귀한 사례중의 하나다. 일본 강점이라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이런 노력은 이도영을 넘어서 대세를 이루지 않았을까?

 

이도영은 이후에 김정희가 글씨 쓰는 모습을 그리거나, 장승업이 그림 그리는 장면을 그려서 자신이 살아간 가까운 시기의 우리 문화영웅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서 보는 사람들에게 각인하고자 하였다. 이 또한 당시 어느 누구도 시도한 적이 없는 노력이다.

 

이도영은 젊은 시절에 시사만화와 신소설들의 표지 그림, 그리고 그 속에 든 삽화 분야에서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중년무렵인 1920년대 들어서는, 고고학적으로 발굴된 신라나 가야의 질그릇이나 고려 청자를 비롯한 우리 특유의 종(뒤에 조선종 내지는 한국종이라는 학명을 획득했음)을 그린 첫 화가다. 우리 눈앞에 수천년 전 조상들의 삶의 자취를 드러내며, 이민족 지배하일지라도 민족문화를 지키자고 호소하는 듯한 민족적 역사화의 선구자였다.

 

이 그림은 일본 강점기부터 1970년대 사이에 손꼽는 미술품수집가였던 이동근의 소장품이었다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됐다. 이를 기려서 낸 소장품 도록에 단색으로 소개되었지만 실제로 전시된 적이 없었다. 필자가 민족미술가로서의 이도영을 처음 소개하였고, 근래에 비로소 전시를 통해 잠시나마 우리 눈 앞에 드러났다.

 

그럼에도 이도영을 친일분자로 분류하는 사람들이 있다. 과연 그러할까?

 

지금은 고인이 된 재일 역사학자 강동진은 <일제의 한국침략정책사>(한길사, 1980)에서 이도영이 총독부의 부름에 20차례 가깝게 오간 기록이 있다고 하였다. 병탄 전야에 벌인 그의 만평 활동(관련기사 <이것이 웬 세상이야>, 이도영의 미술행동), 앞으로 소개할 <고색찬연>을 비롯하여 간헐적으로 계속된 민족적인 그림들 등을 염두에 둔다면 그를 직업적 친일분자로 단언한 것이 과연 균형 잡힌 판단인지를 살피게 한다. 이도영에 관한 이런저런 행적을 살펴서 실체를 파악하기에 동참해 주시기를 바란다

 

미술평론가 최석태 |

[출처] 뉴스아트 (https://www.news-ar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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