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음이 타는 가을

박재삼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을 보겠네.

 

저것 봐, 저것 봐,

너보다도 니보다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와가는

소리죽은 가을을 처음 보겠네.

 

 

오늘따라 왜 이리 박재삼시인의 울음이 타는 가을강이 생각날까?

새삼 시집을 들춰 보고 오래된 사진첩에서 박재삼시인의 사진을 찾아보았다.

며칠 전 친구가 떠난 뒤로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친구를 잃은 슬픔보다 안면몰수하는 세상인심이 더 슬퍼서다.

 

박재삼시인의 울음이 타는 가을 에는 삶의 통과의례가 담겨 있다.

죽음과 제사 그리고 가을강은 삶의 허무가 깃든 한편의 아름다운 서정시다.

그러나 가을 강이 상징하는 것은 죽음과 소멸만이 아니다.

다시금 재생하는, 그 너머의 삶을 희구한다.

 

박재삼 시인은 스무 살까지 삼천포에서 살았으나, 학교를 제대로 다닐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다.

신문을 배달하거나 낮에 일하고 밤에 공부했다.

이런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삼천포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고 한다.

그의 주경야독 생활은 1953현대문학에 취직하여 서울 생활을 할 때까지 계속되었다는데,

초기 시에 자주 등장하는 가난은 이런 개인적 체험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박재삼 시인은 정적인데다 외로운 기질을 타고난 분이다.

생전에 인사동에서 만나면 별말씀은 없지만, 항상 미소가 따뜻했다.

30여년 전, 양평 가는 길에 우연히 따라가 찍은 사진이 선생의 마지막 사진이 될 줄이야 어찌 알았겠는가?

오래된 사진을 찾아 추억이나 들추는 걸 보니, 나도 갈 때가 되었나보다.

너무너무 그립고 만나고 싶은 분들이 많다.

 

사진,/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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