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ep End, natural rhythm-Time of rhythmical flow

심연, 자연율-결이 흐르는 시간

김정남/ KIMJEONGNAM / 金政南 / painting

2023_0920 2023_0925

김정남_natural rhythm 027032_알루미늄에 스크래치_73×117cm_2023

 

김정남 인스타그램_@rhythm_tan_Jeongnam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30am~06:30pm / 주말,공휴일_11:00am~06:00pm

 

후원 / 강원특별자치도_강원문화재단

 

아트가가 갤러리

ART GAGA Gallery

서울 종로구 인사동41

(인사동 183-4번지) 1

Tel. 070.7758.3025

www.gagagallery.com

@artgaga_gallery

 

김정남의 작업-하얀 산맥과 풍경이 된 파토스 심연, 자연율, 결이 흐르는 시간(Deep End, natural rhythm, Time of rhythmical flow). 작가 김정남이 근작에 붙인 주제다. 아니면 그저, 결이 흐르는 시간이라고도 했다. 자연율에서 시작해 여기까지 왔다. 자연율의 개념을 해석하고 재해석하는, 심화하고 확장하는, 그렇게 자연율의 개념을 변주하는 과정에서 덧붙여진 주제일 것이다. 처음엔 모호했던 개념이 점차 확신을 얻으면서 뚜렷한 실체를 얻게 된 주제일 것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지금까지 작업을 지지해왔던 주제들을 아우르고 종합하는 주제라고 해도 좋다. 다시, 그러므로 작가의 작업을 견인하는 인문학적 배경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김정남_natural rhythm 508032_알루미늄에 스크래치_81×131cm_2023
김정남_natural rhythm 614032_알루미늄에 스크래치_61×91cm_2023
김정남_natural rhythm 204022_알루미늄에 스크래치_60.5×91cm_2022

존재에는 결이 있다. 자연에도 결이 있다. 나무에도 결이 있고(나이테) 바람에도 결이 있다(바람결). 물에도 결이 있고(물결) 빛에도 결이 있다(빛살). 호흡에도 결이 있고(숨결) 몸에도 결이 있다(지문). 소리에도 결이 있고 피부에도 결이 있다. 소리나 피부가 거칠다거나 부드럽다고 할 때가 그렇다. 그러므로 결은 존재의 질감을 의미할 수도 있겠다. 이처럼 눈에 보이는 결이 있는가 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결도 있다. 이를테면 마음결 같은. 그렇다면, 결은 무엇인가. 몸에 아로새겨진 존재의 증명과도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존재가 겪었을 삶의 시간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시간의 흔적과도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결은 에너지의 물적 형상일지도 모른다. 존재는 움직인다. 존재와 존재가 움직이면 충돌이 일어난다. 그렇게 충돌이 일어나는 곳에 에너지가 발생한다. 그렇게 바람과 바람이, 공기와 공기가, 존재와 존재가 움직이면서 부닥칠 때 에너지가 발생하고, 그 에너지가 결을 만든다. 거시적(혹은 미시적)으로 말하자면, 음의 기운과 양의 기운이 움직이면서 부닥칠 때 에너지가 발생하고, 그 에너지가 존재를 생성시킨다. 그러므로 결은 어쩌면 존재에 아로새겨진 지문과도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풍경에도 지문이 있고, 상처에도 지문이 있다.

 

김정남_natural rhythm 524032_알루미늄에 스크래치_50×73cm_2022
김정남_natural rhythm 617022_알루미늄에 스크래치_50×73cm_2022

결은 흐른다. 존재가 움직이기 때문이다. 존재가 이행 중이기 때문이다. 결이 흐를 때 마구 흐르지는 않는다. 흐르다가 맺히고 맺히는 듯 흐르는 강약이 있고, 주기가 있고, 패턴이 있다. 그게 뭔가. 율이다. 리듬이다. 리듬이 자연에 탑재되면 자연율이 된다. 자연이 숨겨놓고 있는 리듬 그러므로 음률이라고 해야 할까. 자연이 품고 있는 소리 그러므로 음악이라고 해야 할까. 자연이 은연중 실현(그러므로 암시)하고 있는 공감각이라고 해야 할까. 자연의 호흡, 자연의 숨결, 자연의 기운, 자연의 섭리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작가가 그려놓고 있는 풍경에는 결이 있고, 율이 있다. 주름이 있고, 리듬이 있다. 산을 쳐다보면(시선), 산도 쳐다본다(응시). 그렇게 내가 산을 쳐다볼 때, 나에게서 산 쪽으로 산에서 내 쪽으로 건너가고 건너오는 것이 있다. 교감이고 공감이다. 감정이입이라고 해도 좋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는 산과의 교감이 있고, 자연과의 공감이 있다. 그 교감이, 그 공감이 산맥을 따라 흐르는 결로, 율로, 주름으로, 리듬으로 정착되었다. 어쩌면 작가가 산맥에서 캐낸, 그러므로 산맥을 자기식으로 단순화한, 산맥의, 자연의, 풍경의 골격이라고 해도 좋다(그리고 알다시피 그 골격을 도상으로 옮겨놓은 것에서 등고선이 유래했다). 자연도 존재도 결을, 율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산맥을 유비적으로 해석한, 그러므로 존재의 본질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산맥의 골격을 캐내면서 존재의 본질을 같이 발굴했다고 해야 할까.

 

김정남_natural rhythm 417032_포맥스에 아크릴채색_41×61.5cm_2022
김정남_natural rhythm_부분

그렇게 작가는 산을 그린다. 그러므로 풍경을 그리고 자연을 그린다. 엄밀하게는 산을 새긴다. 새긴다? 알루미늄 판각이다. 알루미늄판에 끝이 뾰족한 도구를 이용해 이미지 그러므로 산맥을 새김질한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알루미늄판을 대개는 남색에서 검은색에 이르는 짙은 색으로 칠한다. 이처럼 배경 화면을 어둡게 칠하는 것은 그 위에 새김질할, 새김질을 통해 드러나게 될 하얀 산맥과의 대비를 강조하기 위해서다. 이외에 또 다른, 의미심장한 의미를 어둡고 짙은 배경 화면은 내포하고 있는데, 바로 심연을 상징한다. 작가가 심연이란 말을 옮겨놓은 영문의 의미가 흥미롭다. Deep End. 깊이의 끝이란 말이다. 그 끝을 미처 다 헤아릴 수 없는 깊이란 의미일까. 그 끝에 미처 가 닿을 수 없는 깊이란 의미일까. 아마도 심연은 미처 헤아릴 수도, 미처 가 닿을 수도 없는 깊이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게 밑도 끝도 없는 심연으로부터 작가는 산맥을 건져 올리고, 산맥의 골격을 건져 올리고, 존재의 본질을 건져 올린다. 어쩌면 의식보다 깊은, 무의식보다 아득한 존재의 원형을 발굴한다. 존재에 아로새겨진 원형적 기억을 캐낸다.

 

김정남_natural rhythm 328032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0.5×91cm_2023
김정남_natural rhythm 628032_포맥스에 아크릴채색_53×53cm_2023
김정남_natural rhythm 918032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0.5×91cm_2023

그러면 작가는 그 원형을, 그 원형적 기억을 어떻게 캐내고 발굴하는가. 니들을 장착한 소형 드릴을 도구로 발굴하는데, 온 신경이 곧추선 초긴장 상태에서 고도의 집중력이 요구되는 과정이다. 실제로 산맥이 발굴되는 과정인 만큼 작가의 작업에서 가장 결정적인 순간이라고 해도 좋다. 한 땀 한 땀 수놓듯 이미지를 새김질하는데, 여차하면 곁길로 빠질 수도, 산맥이 흐트러질 수도 있는 일이어서 드릴에 가해지는 힘을 일정하게 유지해야 하고 호흡을 가다듬어야 한다. 그래서 실제 작업을 보면 선 위로 니들이 지나간 자리가 여실한데, 호흡이 머물다간 자리 아니면 호흡이 순간적으로 멈춘 자리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 지난한 과정을 통해서 흐르면서 맺히는, 맺힌 듯 흐르는 촘촘한 주름이 자리를 잡고, 그 주름들이 모여 산세를 일구고, 마침내 산맥이 그 실체를 얻는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하얀 산맥 앞에, 산맥의 골격 앞에 서게 만든다. 때로 작은 심연 같은 옹달샘을, 그리고 더러 개인사에서 유래한, 때로 역사적인 서사를 자기 속에 숨겨놓고 있는 풍경 앞에 서게 만든다. 심연에서 건져 올린 존재의 원형, 그러므로 원형적인 기억 앞에 서게 만든다. 풍경의 지문 앞에 서게 만들고, 존재의 지문 앞에 서게 만든다.

 

김정남_natural rhythm 138032_포맥스에 아크릴채색_53×53cm_2023
김정남_natural rhythm_부분

그리고 작가는 근작에서 종전 작업과는 사뭇 다른 작업을 예시해주고 있다. 기왕의 판각 작업과는 별도로 꽤 오랫동안 형식실험 해왔던 페인팅 작업을 근작에서 본격적으로 시도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그림을 보면 어둑한 화면 위로 무분별한 붓질이 가로지르는 것이 한눈에도 추상표현주의 회화를 떠올리게 한다. 몸이 부르는 대로 감각이 이끄는 대로 그린 그림이란 점에서 몸 그림으로 정의해도 좋을 것이다. 배경 화면과 붓질이 유기적인 전체를 이루고 있는 것이 마치 배경 화면이 밀어 올린 붓질들의 춤을 보는 것 같고, 그 깊이의 끝을 헤아릴 수 없는 심연에서 건져 올린 파토스가 자기실현을 얻은 것도 같다. 자기에 오롯이 집중해야 하는 판각 작업이 에토스가 그린 그림이라면, 자기를 방기한 채 직관에 내 맞긴 그림이 파토스가 그린 그림이라고 해야 할까. ● 그처럼 무분별한 붓질이 어둑한 배경 화면과 대비되면서 얼핏 산세가 보이고 풍경이 보인다. 심연으로부터 건져 올린 풍경이라고 해야 할까. 풍경이 된 파토스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작가는 하얀 산맥과 풍경이 된 파토스를 그리고 있었다. ■ 고충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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