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기억: 백정기의 접촉주술

 

 


인도의 성스러운 강, 강가(Ganga; 갠지스 Ganges)는 비슈누 신의 연꽃 모양 발에서부터 솟아 나와 하늘나라를 흐르는 은하수였다가 시바 신의 헝클어진 머리 타래를 타고 땅으로 내려온 물줄기라는 전설이 있다. 인도 대륙에서도 손꼽히는 성지인 이 강의 물을 마시거나 이 물로 목욕을 하면 세상의 더러움, 외양은 물론 더럽혀진 영혼과 업(Karma)까지도 씻어내는 효험이 있다고 세속의 인간은 믿는다. 종교의식에서 물이 정화(淨化)의 의미로 쓰이는 것은 비단 힌두교에서만이 아니다. 일본의 신사를 들어설 때면 데미즈야(手水舍)에서 몸과 마음의 때를 씻어내고 신 앞에 나아가며, 천주교에서는 성수(aqua benedicta)를 뿌려 축성하고, 우리 어머니들은 이른 새벽 첫 우물물로 정화수를 길어 치성을 드리기도 하였다. 마음에 품고 기원하는 대상은 다를망정, 물은 삶과 죽음, 물질과 영혼, 성과 속, 천상과 지상을 잇는 매개였다. 그런데 여기에 줄곧 궁금증이 남는다. 온 세계에서 물에 씻어낸 더러움은 대체 어디로 가버리는 것일까.

 
공교롭게도 지난 십여 년간 백정기의 활동을 살펴보면, 그의 작업은 꾸준히 변모해왔음에도 작품의 상당수가 물을 다루고 있다. 마르지 않도록 바셀린을 발라 물을 가두고, 기우제로 단비를 부르며, 그도 아니라면 각종 실험 도구들로 물을 분석하고, 희석하고 또 정제한다. 그가 그토록 물을 통해 찾고 있는 것은, 여전히 세상에서 설명되지 않는 ‘무엇’이다. 과학의 설명도 구해보고 주술적 의식에도 빌어보지만, 그래도 세상은 아직 불가해한 일로 가득 차 있다. 세상의 본질이자 원리라고도 할 그 ‘무엇’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어, 백정기의 예술은 바로 이 ‘알 수 없는’ 커다란 세상을 총체적으로 탐구한다. 그리고 물은 곧 그에게 세계를 이해하는 단서이자 동시에 세계를 하나로 이어주는 연결고리이다.

 
백정기의 이번 개인전<접촉주술>도 물을 다루는 일에서부터 출발한다. 미술관의 입구에 들어서면 물의 신인 용(龍)이 한껏 전시장을 받쳐 들고 있다. 아무도 실체를 본 적이 없기에 ‘상상의 영수(靈獸)’라고 일컫는 용이지만, 옛 건축물의 장식이나 복장, 하다못해 오늘날에는 누군가의 몸에 그려진 문신으로 수시로 보이는 구체적인 이미지로 익숙한 존재이다. 반쯤은 허구에서, 나머지 반쯤은 실생활 속에서 마주하는 용에게 치수(治水)를 구하는 선인들의 방법은 크게 두 방식이었다고 한다. 하나는 용에게 정성을 들여 비바람을 부르거나 잠재우는 것이고, 또 하나는 용을 도리어 괴롭히고 자극하여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허무맹랑해 보여도 때때로 이런 기우제가 정말로 작용하였다니, 적어도 영험 하다고 옛사람들은 믿었다니, 사뭇 지금과는 다른 앎과 믿음의 체계이다. 백정기는 이 전시에서 기우제라는 의식을 오늘날로 소환하여, 3D 프린터로 제작한 용두(龍頭)와 건축용 비계를 세워 가상의 용소(龍沼)를 전시장에 구현한다. 과거를 답습하거나 전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전시장을 실제적이면서도 주술적 장소로, 일종의 상징 공간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사실 물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많은 정보가 들어있다. 그의 <Is of>연작은 어느 특정 현장의 물에 담긴 자연적/환경적 성분을 염료로 전환하는 실험이다. 그 중 <Is of: 서울>은 서울의 대표적인 풍경을 프린트한 작업으로 적 양배추에서 추출한 시료로 직접 리트머스지를 만들고, 여기에 한강 물을 잉크로 사용했다. 익히 알려진 대로 리트머스는 산성과 염기성을 측정하는 지시약이다. 한 도시를 흐르는 강의 산/염기도는 이 물이 어디에서 흘러 들어왔는지, 비는 얼마나 내렸는지, 오염도는 어떠한지, 무엇이 강을 오염시키는지, 여기에는 얼마나 많은 인구와 산업체가 관여하는지 등 여러 환경 요인과 행위 주체에 대한 정보를 함유한다. “물은 기억한다(water memory)”는 구절로 요약되는 저장소로서의 물의 특성은 동종요법(homeopathy)에서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치료에 활용하고 있다. 많은 양에 노출될 때에는 암을 유발하는 원인이지만 적은 양은 치료에 사용되는 방사능처럼, 동종요법은 질병 원인과 같은 물질을 극소량 사용하여 신체의 자연치유력을 높이는 방법이다. 다량의 물에 희석된 독은 더는 독으로 작용하지 않고, 오히려 몸의 면역 기능을 촉진하는 약이 된다. 백정기의 는 이와 같은 동종요법을 적용한 작업이다. 유독한 물질을 희석하고 정제하여 약으로 만드는 과정을 영상과 설치 작품으로 보여주는데, 관찰력이 좋은 관객이라면 이 작업에 쓰인 원료 봉지에 ‘녹은 플라스틱’이라 적힌 화면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플라스틱을 사람이 먹어도 되나, 아니, 그전에 저 재료는 무슨 사연으로 또 어디에서 구했단 말인가 하는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게끔 하는 장면으로, 실은 이 작업은 작가가 실제 화재 사고의 현장에서 직접 채집해온 검은 재를 물에 풀어 그 성분을 정제하여 약을 만드는 시도이다. 물에 독을 씻어낸다고 할 수 있는 이 과정에서 ‘독’은 단지 물질적인 잔재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화마(火魔)가 불러온 아픔이나 슬픔, 공포, 원망, 회한과 같은 모진 마음의 독까지도 풀어내는 심리적 제의이다.
 
다시 이 글의 서두에서 던진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면, 씻어낸 더러움은 어디로 가는가? 그것은 여전히 물속에 있다. 다만 그것이 천 배, 만 배 희석되어 ‘더럽다’는 경계를 녹여내며 다른 곳에서, 다른 기능으로,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 갔을 테다. 어느 지표면을 흐르며, 어딘가에 고이고, 누군가의 몸으로 흡수되며 말이다. 결국 우리는 같은 물을 조금씩 나누어 가진 존재들이다. 기억의 보관소인 동시에 물질/영혼의 전환소이자 공유소인 물을 백정기는 <자연사박물관>이라는 생물학적인 메타포로 담백하게 제시한다. 이 작업에서 그는 ‘자, 여기, 지구상의 포유류 샘플이 있는데 그 라벨에서 보다시피 저마다 다른 특징을 지닌다. 하지만 이 여러 종의 생명체는 물이라는 접점을 통하여 공시적일 뿐만 아니라 통시적으로도 연결되어 있다.’는 고찰을 거시적으로 보여준다. 물은 어디에나 있다, 다양한 크기와 형태의 유리병에 담겨 바로 당신의 눈앞에, 그리고 당신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대류 안에도, 심지어 당신의 살과 뼈 속에도. 결국 물의 기억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다만 어딘가에 저장될 뿐.
 
이번 전시에서 시종 일관된 관점을 제시해온 백정기가 피날레로 선택한 작품은 <Is of: 가을>이다. 이번에는 가을 명산에 알록달록 단풍이 든 잎사귀로부터 잉크를 추출하여, 그 산을 찍은 풍경 사진을 출력했다. 실제 가을 산의 풍경이 가공되어 사진 속 풍경으로 전이되는 이 작품은, 안타깝게도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색이 바랜다. 아무리 자외선을 차단하고 아크릴수지에 담가 산소와의 접촉을 방지하더라도, 그 변화를 지연시킬 뿐 완전히 변색을 막지는 못한다. 하지만 사라진 색의 성분도 아마도 어딘가에 남겨져 있을 것이다. 한 인간이 감지할 수 없는 저 큰 시공간의 소용돌이 속 어느 곳에.
 
우리가 설명하지 못할 일이 세상에는 너무도 많기에 우리가 아는 것이 정말 ‘아는’ 것일까, 우리가 우연이라고 치부하는 일들이 진짜로 ‘우연’일까, 어느 큰 맥락에서는 모두 프로그래밍이 되어 있는 규칙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아닐까? 백정기는 내내 이와 같은 근원적 질문을 던지며 답을 구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건축적인 구조나 과학 기초 이론, 실증적이고 구체적인 실험이 기반하기도 하는데, 물론 세인의 눈에는 전시장에 놓인 파이프와 시험관, 기다란 호스와 시약 따위가 생소할 수는 있겠으나, 이는 그 스스로 답을 얻기 위해 선택한 방법론적 전략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크게 본다면 과학이니 주술이니 예술이니 철학이니, 그런 차이가 다 무어란 말인가. 지구의 나이 46억 년 중 인류가 출현한 것은 길게 잡아도 고작 5백만 년, 그 중 한 사람의 생은 어림잡아 80년, 그야말로 티끌보다 작은 정도만을 차지하고 있다. 당연하게도 우리가 아는 것은 지극히 일부분일 터, 우리는 단지 우리가 만지고 스쳐 지나간 모든 것들로부터 맞닿아 접촉주술에 걸려 있는지도 모르겠다. 백정기의 작업이 우리의 시선을 오래도록 잡아두는 것은 그것이 상식으로 당연하게 여겨온 우리의 인식에 의문을 품게 하며, 어렴풋이 감지되는 근원적 에너지나 힘, 불가항력적 존재에 대하여 환기하기 때문이다. 물질로 이루어져 있으나 영혼에 이르는 물, 이곳에서 저곳으로 유연히 흐르는 물처럼 그의 작업 역시 이 사람에서 저 사람에게로 전달되며 예술이라는 이름의 주술을 걸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그의 주술에 기꺼이 현혹되어 보는 것은 어떨까. 이번 전시가 백정기가 취하는 마법의 언어와 행위로 우리를 ‘전염’시킬 수 있기를 기대한다.

 

 

김소라 (OCI미술관 수석큐레이터)

 

 올인원



종교, 예술, 과학의 광활한 세계를 지탱하는 공통의 사고를 가늠해본다. 종교는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을 절대적 가치의 영립을 추구하고, 과학은 사고의 일관성을 유지하며 특정 체계 안에서 세계를 지속적으로 재발명, 업데이트한다. 그에 반해 예술은 모든 가설과 사고가 정해진 법칙에 따라 체계화될 수 없음을 인지하고 원인은 반드시 결과를 포함한다는, 그리고 그 인과관계가 하나의 절대적 가치에 귀속된다는 신학적 개념을 의심한다. 하지만 동시에 예술은 마치 과학처럼 나름의 사고와 가설을 공유 가능한 체계-형식으로 전환 구술하기도 하고 때론, 아니 사실은 아주 오랫동안 종교처럼 탈시간적 절대적 가치를 추구해왔다. 분명한 차이를 보이지만 결코 서로 타자화할 수 없는 종교, 예술, 과학의 세계에는 어떤 공통의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그 공통의 시학을 굳이 따져본다면 의례로 구동되는 세계가 드러난다. 종교, 예술, 과학의 세계는 이 ‘의례-형식-체계’의 고용 없이 그 어느 곳에도 당도하지 않는다. 오늘이 화려한 사유에 열광하며 형식을 지루한 관습으로 치부하더라도 형식의 실천이 사유와 이상으로 향하는 길임은 부정할 수 없다.  

 
백정기는 종교, 예술, 과학의 의례와 형식을 사회, 역사, 문화, 지리 등의 다양한 맥락으로 확장 탐구해왔다. 작가가 지속해 온 기우제 작업은 그러한 시도의 한 사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왜 기우제를 현재의 시공에, 그것도 전시라는 미술의 체계 안에 재구성하는 것일까? 먼저 기우제는 작가의 오랜 관심인 ‘물’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하지만 물과의 연결을 잠시 제쳐두더라도 기우 의례는 그 자체로 다채로운 사회적 역사적 역동성을 내포한다. 대부분의 기우제는 가뭄 해갈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다시 말해 위기를 극복하고 불시의 재앙에서 구제받으려는 열망과 함께 진행된다. 절박한 상황에서 진행된 이 임시 의례에는 염원의 행위뿐 아니라 자신을 돌아보는 행위, 지난 잘못을 반성하고 주변 문제와 상황을 헤아려보는 행위도 함께 수반된다. 기우제가 거행되는 기간 동안 왕이 뜨거운 노천으로 전각을 옮겨 지냈다는 고증은 기우 의례가 일상의 여유를 견제하고 스스로를 반성하는 태도를 전제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현재의 시공에 기우 의례를 재구성하는 작업은 주변을 헤아리고 자신을 돌아보는 행위와 그것의 가치를 오늘 다시금 고양시키려는 것은 아닌지 유추해 본다.
 
작가의 이번 개인전 <접촉주술>역시 기우 의례와 관련된 <용소>와 <침호두>를 포함한다. 전시장 입구를 시작으로 공간 전체를 아우르는 <용소>는 용의 머리를 형상화한 결속부위(joint)에 흔히 말하는 비계파이프를 연결한 구조물로, 제목 그대로 용의 거처(龍沼)를 시각화한다. 그리고 전시장 1층 가장 안쪽에 작은 재단처럼 만들어진 <침호두>에는 용과 상극인 동물-호랑이를 상징하는 물질인 철광석이 놓인다. 이 두 작업은 다양한 기우 의례 중 용신(龍神)과 관련된 기우제룡(祈雨祭龍)의 방식을, 그중에서도 상룡과 잠룡기우의 형식을 재현한다. 풀어 설명하면, 작업은 강우의 직능을 가진 용을 형상화해 비를 기원하고(상룡) 용소에 머물고 있는 잠룡을 자극해 경천동지할 비상을 이끌어 강우를 얻어내는(잠룡기우) 주술 방식을 재구성한다. 이 작업에서 특기할만한 점은 용과 재단을 재현하는 의례의 핵심 과정을 3D프린터가 대신한다는 것이다. 작가는 여러 유적지와 박물관을 방문해 전통 건축양식의 다양한 용두를 3D 스캐닝 기술로 디지털화하고 조인트로 설계해 3D 프린터로 출력한다. 기우 의례에 내재된 염원과 반성의 행위를 몸소 실천하듯 줄곧 노동 집약적 과정을 통해 기우제를 재현한 이전과 달리, 3D프린터라는 비교적 새로운 기술을 작업의 중심부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물론 작가는 이전에도 기술과 과학의 예술적 접목을 나름의 실험으로 전유해왔다. 그럼에도 이번 시도가 남다르게 다가오는 이유는 그 기술의 적용과 전유가 이전보다 실제적 차원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또 그것이 작업 과정과 형식의 간소화와 직접적으로 연결되기 때문일 것이다. 중요한 점은 그러한 적용이 작가의 원래 사유를 왜곡하거나 어설프게 단순화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작업에 전유된 기술은 결코 새로움, 미래, 외부, 타자를 무조건적으로 찬양하는 않는다. 오히려 새로움의 개념은 본질적으로 이전, 전통, 내부와 같이 반대의 것과 결부되어 있음을, 오직 그러한 관계에서만 가치화될 수 있음을 인지하게 한다. 전통건축 양식인 용두를 3D 프린터로 출력하고 이를 조인트 삼아 구조물을 가설하는 작업은 그렇게 의례와 기술, 개인의 열망과 미술의 형식, 또 전통과 현대가 결합(joint)된 상태를 구현하다. 그리고 이는 너무 멀리 있어서 혹은 이미 일반화되어 쉽게 감지되지 않는 새로움, 외부, 타자의 세계를 고찰하게 한다. 다름이라는 텅 빈 구멍 안에 모든 가치를 밀어 넣는 것이 아니라 그 구멍으로 아득한 외부를, 보다 다양한 세계를 접지하는 것이다.
 
이처럼 전시는 주변을 헤아리고 나를 돌아보는 행위의 가치를 인정하며 보다 넓은 세계와 존재를 감지한다. 그리고 이는 물을 매개로 거대한 전체를 상상하고 다양한 존재를 고찰하는 <자연사박물관>과 <Is of: 서울>, 그리고 <Is of: 가을>로 확장 연결된다. 먼저 전시장 2층에 설치된 을 보면 여러 종류의 물병들이 어떤 법칙에 의거한 듯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다. 수십 개의 유리병에 담긴 것은 무엇일까? 작가는 병에 수돗물을 담아 마치 자연사박물관의 전시실처럼 인간을 포함한 포유류의 여러 종을 구분하고 표기해 나열한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물’을 공유하게 때문에 ‘물’이 곧 생명체를 지시하는 표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구상에 물이 생성된 이후 그것의 총량은 증가하지도 감소하지도 않았다. 여기서 작가는 모든 생명체의 탄생과 멸종, 진화의 과정은 ‘하나의 물’이 만드는 전체 세계를 공유한다고 설명한다. 작업이 애써 구분하고 나열한 생명체들은 어쩌면 병에 담긴 물처럼 애초에 분리 불가능 존재일지 모른다. 물을 통해 쉽게 구분되지 않는 것을 억지로 나누고 정렬하는 행위는 역설적으로 생명의 통합과 순환을 떠올리게 한다. 다시 말해, 작업은 선택된 몇몇 종을 무대 위에 올리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한 구분으로 존재 자체를 사유하는 방식을 고찰하게 한다. 이러한 시도는 오만한 인간의 허영에서 비롯된 것일까. 작업을 가까이 들여다보면 그것이 인간을 탁월한 존재로, 선택된 절대자로 간주하기보다 폭넓은 존재를 사유하는 최소치로 설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을 메타포로 하나의 전체를 가설하고, 인간을 최소값으로 존재를 탐구하는 작업은 세상 모든 생명체의 개별성이 녹아 구분이 모호해지는 곳, 그래서 존재한다는 사실만이 분명해지는 거대한 존재의 심연을 상상하게 한다.

 
이렇듯 전시장의 물(병)은 비규정성의 심연을 전제로 무수히 많은 존재의 임시적 규정을 가시화한다. 다시 말해 작업은 거대한 심연 안에 다양한 갈래와 분기를 가설하는 방식으로 외부 존재를 인식한다. 희미하게 감지되는 존재는 언제든 현재의 장면과 결속될 수 있다고, 대상의 구체적 사유는 현재에 내밀한 조건을 가설하며 가능해진다고 제안하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과 을 통해 보다 분명해진다. <Is of: 가을>은 가을 산의 풍경을 담은 사진 시리즈 작업이다. 작업 과정을 간략히 살펴보면, 작가는 가을 산을 방문해 가지각색의 단풍잎을 수집하고 여러 장치를 이용해 단풍잎의 색소를 추출한다. 그리고 그 색소를 잉크 삼아 단풍이 든 가을 산의 풍경을 프린트하고 특수 설계된 장치로 보존한다. <Is of: 가을>역시 비슷한 과정을 통해 진행된다. 작가는 작업을 위해 한강 물을 채집하고 이를 잉크처럼 사용해 리트머스 종이에 서울의 풍경을 프린트한다. 두 작업 모두 조건의 가설을 통해 비규정적 성질(색소, 물)을 분명한 현재의 장면으로, 규정성 가득한 상황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상황만을 전환할 뿐 대상의 본래 속성은 탈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작업은 비규정적 성질을 규정성의 요체로 차용하며 서로 다른 두 성질의 등치를 시도한다. 낙엽에서 추출한 색소로 프린트한 사진은 대상의 재현이 정확하지 못하고 빛이나 산소에 의해 색이 쉽게 변질되는데, 이는 수시로 변하고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실제 가을 단풍의 성질을 고스란히 전달한다. 또 강물은 도시 환경과 기후에 따라 고유의 산성도(pH)를 갖는데, 이 산성도로 프린트된 도시 이미지는 해당 장소의 생태환경, 경제, 문화를 가늠하는 여러 실질적 지표를 포함한다. 여기서 관객은 이미지를 보며 대상이 기인한 세계를 감지하는 경험을 하며 규정성과 비규정성이 서로 상통함을 재확인한다.
 
전시 전반을 관통하는 순환의 개념은 <Materia Medica: Cinis>에서 다시 치유의 개념과 포개진다. 작가는 질병을 일으키는 성분(독)으로 해당 질병(독)을 치료한다는 동종요법(homeopathy)의 과정을 직접 실행한다. 그리고 그를 기록한 영상과 실제 제조한 치료제-알약을 함께 전시한다. 처참한 사고가 있었던 곳에서 몇 가지 물질/성분들을 채집해 약을 만드는, 일종의 유사 과학을 실행하는 영상 속 장면은 엄숙함을 넘어 제의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애초에 작업의 목적은 약을 제조하거나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 아닌 그 행위 자체에, 그러니까 의례의 실천에 있었을지 모른다. 마치 삶 밖으로 밀려난 받아들이기 불편한 것들을 내 안의 세계로 조심스레 끌어안듯, 작가는 지워버리고 싶은 상처와 기억들을 치유의 물질로 분쇄하고 희석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이를 통해 저 멀리 밀어 둔 기억들을 현재의 시공으로 재호명하며 치유의 개념을 재고한다. 상처는 상처를 마주할 때 아물기 시작한다고 말하는 작업, 상처와 치료의 개념을 순환의 체계 안에 위치시키는 작업은 물의 순환을 통해 치유를 사유한 작가의 기우제 작업, 또 존재론적 고찰을 시도한 <자연사박물관>, <Is of>시리즈와 함께 독해된다.
 
전시는 서로 다른 개념을 뒤섞고 순환시키며 통합과 치유를, 보다 넓은 존재의 사유를 시도한다. 그 안에는 하나의 대전제가 존재한다. 대상의 고찰을 시도하기 이전에 이미 대상이 존재한다고 믿는 진술의 엇갈림, 시차를 수긍하는 것이다.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거대한 철학적 질문이 이미 존재를 인정하며 시작했듯 새로움, 타자, 외부를 사유하는 작가의 작업은 이미 다른 존재를 긍정하며 진행된다. 다만 작업은 앞서 받아들인 세계와 존재를 다양한 상황과 가설을 통해 감각할 뿐이다. 그럼 그것은 실재를 창조하지 못하는 추상적 존재의 무한한 변주인가. 전시는 새로운 대상, 외부 세계의 인지란 결국 존재를 창조하거나 발견하는 게 아니라 이미 드러난 것, 알고 있다고 믿는 것의 가치를 전도하며 시작된다고 역설한다. 작가는 이러한 인식과 가치의 전복을 기술과 의례, 형식과 삶, 비규정성과 규정성을 등치시키는 상황으로 구현하는 것이다. 전시 전반에는 객체와 전체가 혼합된 정서가 흐른다. 그리고 거기에는 무한한 존재에 대한 호기심이, 마주하기 힘든 상처와 기억을 보듬으려는 태도가, 통념적 질서를 재고하고 반감을 공감하려는 행위가 함께한다. 우리는 서로 다른 것들의 경계를 지우고 전체로 엮어내려는 전시를 개별 존재의 특이성을 제거하는 것이 아닌, 보다 넓은 세계를 포착하려는 시도로 봐야 할 것이다. 그렇게 확장된 세계를 사유하고 언제든 그 안에 다른 세계가 틈입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작가가 말하는 스쳐간 모든 것이 연결되는 접촉주술의 세상이다.

 

 

권혁규 (독립큐레이터)



물의 기억: 백정기의 접촉주술

 

 


인도의 성스러운 강, 강가(Ganga; 갠지스 Ganges)는 비슈누 신의 연꽃 모양 발에서부터 솟아 나와 하늘나라를 흐르는 은하수였다가 시바 신의 헝클어진 머리 타래를 타고 땅으로 내려온 물줄기라는 전설이 있다. 인도 대륙에서도 손꼽히는 성지인 이 강의 물을 마시거나 이 물로 목욕을 하면 세상의 더러움, 외양은 물론 더럽혀진 영혼과 업(Karma)까지도 씻어내는 효험이 있다고 세속의 인간은 믿는다. 종교의식에서 물이 정화(淨化)의 의미로 쓰이는 것은 비단 힌두교에서만이 아니다. 일본의 신사를 들어설 때면 데미즈야(手水舍)에서 몸과 마음의 때를 씻어내고 신 앞에 나아가며, 천주교에서는 성수(aqua benedicta)를 뿌려 축성하고, 우리 어머니들은 이른 새벽 첫 우물물로 정화수를 길어 치성을 드리기도 하였다. 마음에 품고 기원하는 대상은 다를망정, 물은 삶과 죽음, 물질과 영혼, 성과 속, 천상과 지상을 잇는 매개였다. 그런데 여기에 줄곧 궁금증이 남는다. 온 세계에서 물에 씻어낸 더러움은 대체 어디로 가버리는 것일까.

 
공교롭게도 지난 십여 년간 백정기의 활동을 살펴보면, 그의 작업은 꾸준히 변모해왔음에도 작품의 상당수가 물을 다루고 있다. 마르지 않도록 바셀린을 발라 물을 가두고, 기우제로 단비를 부르며, 그도 아니라면 각종 실험 도구들로 물을 분석하고, 희석하고 또 정제한다. 그가 그토록 물을 통해 찾고 있는 것은, 여전히 세상에서 설명되지 않는 ‘무엇’이다. 과학의 설명도 구해보고 주술적 의식에도 빌어보지만, 그래도 세상은 아직 불가해한 일로 가득 차 있다. 세상의 본질이자 원리라고도 할 그 ‘무엇’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어, 백정기의 예술은 바로 이 ‘알 수 없는’ 커다란 세상을 총체적으로 탐구한다. 그리고 물은 곧 그에게 세계를 이해하는 단서이자 동시에 세계를 하나로 이어주는 연결고리이다.

 
백정기의 이번 개인전<접촉주술>도 물을 다루는 일에서부터 출발한다. 미술관의 입구에 들어서면 물의 신인 용(龍)이 한껏 전시장을 받쳐 들고 있다. 아무도 실체를 본 적이 없기에 ‘상상의 영수(靈獸)’라고 일컫는 용이지만, 옛 건축물의 장식이나 복장, 하다못해 오늘날에는 누군가의 몸에 그려진 문신으로 수시로 보이는 구체적인 이미지로 익숙한 존재이다. 반쯤은 허구에서, 나머지 반쯤은 실생활 속에서 마주하는 용에게 치수(治水)를 구하는 선인들의 방법은 크게 두 방식이었다고 한다. 하나는 용에게 정성을 들여 비바람을 부르거나 잠재우는 것이고, 또 하나는 용을 도리어 괴롭히고 자극하여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허무맹랑해 보여도 때때로 이런 기우제가 정말로 작용하였다니, 적어도 영험 하다고 옛사람들은 믿었다니, 사뭇 지금과는 다른 앎과 믿음의 체계이다. 백정기는 이 전시에서 기우제라는 의식을 오늘날로 소환하여, 3D 프린터로 제작한 용두(龍頭)와 건축용 비계를 세워 가상의 용소(龍沼)를 전시장에 구현한다. 과거를 답습하거나 전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전시장을 실제적이면서도 주술적 장소로, 일종의 상징 공간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사실 물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많은 정보가 들어있다. 그의 <Is of>연작은 어느 특정 현장의 물에 담긴 자연적/환경적 성분을 염료로 전환하는 실험이다. 그 중 <Is of: 서울>은 서울의 대표적인 풍경을 프린트한 작업으로 적 양배추에서 추출한 시료로 직접 리트머스지를 만들고, 여기에 한강 물을 잉크로 사용했다. 익히 알려진 대로 리트머스는 산성과 염기성을 측정하는 지시약이다. 한 도시를 흐르는 강의 산/염기도는 이 물이 어디에서 흘러 들어왔는지, 비는 얼마나 내렸는지, 오염도는 어떠한지, 무엇이 강을 오염시키는지, 여기에는 얼마나 많은 인구와 산업체가 관여하는지 등 여러 환경 요인과 행위 주체에 대한 정보를 함유한다. “물은 기억한다(water memory)”는 구절로 요약되는 저장소로서의 물의 특성은 동종요법(homeopathy)에서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치료에 활용하고 있다. 많은 양에 노출될 때에는 암을 유발하는 원인이지만 적은 양은 치료에 사용되는 방사능처럼, 동종요법은 질병 원인과 같은 물질을 극소량 사용하여 신체의 자연치유력을 높이는 방법이다. 다량의 물에 희석된 독은 더는 독으로 작용하지 않고, 오히려 몸의 면역 기능을 촉진하는 약이 된다. 백정기의 는 이와 같은 동종요법을 적용한 작업이다. 유독한 물질을 희석하고 정제하여 약으로 만드는 과정을 영상과 설치 작품으로 보여주는데, 관찰력이 좋은 관객이라면 이 작업에 쓰인 원료 봉지에 ‘녹은 플라스틱’이라 적힌 화면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플라스틱을 사람이 먹어도 되나, 아니, 그전에 저 재료는 무슨 사연으로 또 어디에서 구했단 말인가 하는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게끔 하는 장면으로, 실은 이 작업은 작가가 실제 화재 사고의 현장에서 직접 채집해온 검은 재를 물에 풀어 그 성분을 정제하여 약을 만드는 시도이다. 물에 독을 씻어낸다고 할 수 있는 이 과정에서 ‘독’은 단지 물질적인 잔재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화마(火魔)가 불러온 아픔이나 슬픔, 공포, 원망, 회한과 같은 모진 마음의 독까지도 풀어내는 심리적 제의이다.
 
다시 이 글의 서두에서 던진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면, 씻어낸 더러움은 어디로 가는가? 그것은 여전히 물속에 있다. 다만 그것이 천 배, 만 배 희석되어 ‘더럽다’는 경계를 녹여내며 다른 곳에서, 다른 기능으로,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 갔을 테다. 어느 지표면을 흐르며, 어딘가에 고이고, 누군가의 몸으로 흡수되며 말이다. 결국 우리는 같은 물을 조금씩 나누어 가진 존재들이다. 기억의 보관소인 동시에 물질/영혼의 전환소이자 공유소인 물을 백정기는 <자연사박물관>이라는 생물학적인 메타포로 담백하게 제시한다. 이 작업에서 그는 ‘자, 여기, 지구상의 포유류 샘플이 있는데 그 라벨에서 보다시피 저마다 다른 특징을 지닌다. 하지만 이 여러 종의 생명체는 물이라는 접점을 통하여 공시적일 뿐만 아니라 통시적으로도 연결되어 있다.’는 고찰을 거시적으로 보여준다. 물은 어디에나 있다, 다양한 크기와 형태의 유리병에 담겨 바로 당신의 눈앞에, 그리고 당신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대류 안에도, 심지어 당신의 살과 뼈 속에도. 결국 물의 기억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다만 어딘가에 저장될 뿐.
 
이번 전시에서 시종 일관된 관점을 제시해온 백정기가 피날레로 선택한 작품은 <Is of: 가을>이다. 이번에는 가을 명산에 알록달록 단풍이 든 잎사귀로부터 잉크를 추출하여, 그 산을 찍은 풍경 사진을 출력했다. 실제 가을 산의 풍경이 가공되어 사진 속 풍경으로 전이되는 이 작품은, 안타깝게도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색이 바랜다. 아무리 자외선을 차단하고 아크릴수지에 담가 산소와의 접촉을 방지하더라도, 그 변화를 지연시킬 뿐 완전히 변색을 막지는 못한다. 하지만 사라진 색의 성분도 아마도 어딘가에 남겨져 있을 것이다. 한 인간이 감지할 수 없는 저 큰 시공간의 소용돌이 속 어느 곳에.
 
우리가 설명하지 못할 일이 세상에는 너무도 많기에 우리가 아는 것이 정말 ‘아는’ 것일까, 우리가 우연이라고 치부하는 일들이 진짜로 ‘우연’일까, 어느 큰 맥락에서는 모두 프로그래밍이 되어 있는 규칙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아닐까? 백정기는 내내 이와 같은 근원적 질문을 던지며 답을 구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건축적인 구조나 과학 기초 이론, 실증적이고 구체적인 실험이 기반하기도 하는데, 물론 세인의 눈에는 전시장에 놓인 파이프와 시험관, 기다란 호스와 시약 따위가 생소할 수는 있겠으나, 이는 그 스스로 답을 얻기 위해 선택한 방법론적 전략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크게 본다면 과학이니 주술이니 예술이니 철학이니, 그런 차이가 다 무어란 말인가. 지구의 나이 46억 년 중 인류가 출현한 것은 길게 잡아도 고작 5백만 년, 그 중 한 사람의 생은 어림잡아 80년, 그야말로 티끌보다 작은 정도만을 차지하고 있다. 당연하게도 우리가 아는 것은 지극히 일부분일 터, 우리는 단지 우리가 만지고 스쳐 지나간 모든 것들로부터 맞닿아 접촉주술에 걸려 있는지도 모르겠다. 백정기의 작업이 우리의 시선을 오래도록 잡아두는 것은 그것이 상식으로 당연하게 여겨온 우리의 인식에 의문을 품게 하며, 어렴풋이 감지되는 근원적 에너지나 힘, 불가항력적 존재에 대하여 환기하기 때문이다. 물질로 이루어져 있으나 영혼에 이르는 물, 이곳에서 저곳으로 유연히 흐르는 물처럼 그의 작업 역시 이 사람에서 저 사람에게로 전달되며 예술이라는 이름의 주술을 걸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그의 주술에 기꺼이 현혹되어 보는 것은 어떨까. 이번 전시가 백정기가 취하는 마법의 언어와 행위로 우리를 ‘전염’시킬 수 있기를 기대한다.

 

 

김소라 (OCI미술관 수석큐레이터) 


올인원

 

 
종교, 예술, 과학의 광활한 세계를 지탱하는 공통의 사고를 가늠해본다. 종교는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을 절대적 가치의 영립을 추구하고, 과학은 사고의 일관성을 유지하며 특정 체계 안에서 세계를 지속적으로 재발명, 업데이트한다. 그에 반해 예술은 모든 가설과 사고가 정해진 법칙에 따라 체계화될 수 없음을 인지하고 원인은 반드시 결과를 포함한다는, 그리고 그 인과관계가 하나의 절대적 가치에 귀속된다는 신학적 개념을 의심한다. 하지만 동시에 예술은 마치 과학처럼 나름의 사고와 가설을 공유 가능한 체계-형식으로 전환 구술하기도 하고 때론, 아니 사실은 아주 오랫동안 종교처럼 탈시간적 절대적 가치를 추구해왔다. 분명한 차이를 보이지만 결코 서로 타자화할 수 없는 종교, 예술, 과학의 세계에는 어떤 공통의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그 공통의 시학을 굳이 따져본다면 의례로 구동되는 세계가 드러난다. 종교, 예술, 과학의 세계는 이 ‘의례-형식-체계’의 고용 없이 그 어느 곳에도 당도하지 않는다. 오늘이 화려한 사유에 열광하며 형식을 지루한 관습으로 치부하더라도 형식의 실천이 사유와 이상으로 향하는 길임은 부정할 수 없다.  

 
백정기는 종교, 예술, 과학의 의례와 형식을 사회, 역사, 문화, 지리 등의 다양한 맥락으로 확장 탐구해왔다. 작가가 지속해 온 기우제 작업은 그러한 시도의 한 사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왜 기우제를 현재의 시공에, 그것도 전시라는 미술의 체계 안에 재구성하는 것일까? 먼저 기우제는 작가의 오랜 관심인 ‘물’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하지만 물과의 연결을 잠시 제쳐두더라도 기우 의례는 그 자체로 다채로운 사회적 역사적 역동성을 내포한다. 대부분의 기우제는 가뭄 해갈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다시 말해 위기를 극복하고 불시의 재앙에서 구제받으려는 열망과 함께 진행된다. 절박한 상황에서 진행된 이 임시 의례에는 염원의 행위뿐 아니라 자신을 돌아보는 행위, 지난 잘못을 반성하고 주변 문제와 상황을 헤아려보는 행위도 함께 수반된다. 기우제가 거행되는 기간 동안 왕이 뜨거운 노천으로 전각을 옮겨 지냈다는 고증은 기우 의례가 일상의 여유를 견제하고 스스로를 반성하는 태도를 전제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현재의 시공에 기우 의례를 재구성하는 작업은 주변을 헤아리고 자신을 돌아보는 행위와 그것의 가치를 오늘 다시금 고양시키려는 것은 아닌지 유추해 본다.
 
작가의 이번 개인전 <접촉주술>역시 기우 의례와 관련된 <용소>와 <침호두>를 포함한다. 전시장 입구를 시작으로 공간 전체를 아우르는 <용소>는 용의 머리를 형상화한 결속부위(joint)에 흔히 말하는 비계파이프를 연결한 구조물로, 제목 그대로 용의 거처(龍沼)를 시각화한다. 그리고 전시장 1층 가장 안쪽에 작은 재단처럼 만들어진 <침호두>에는 용과 상극인 동물-호랑이를 상징하는 물질인 철광석이 놓인다. 이 두 작업은 다양한 기우 의례 중 용신(龍神)과 관련된 기우제룡(祈雨祭龍)의 방식을, 그중에서도 상룡과 잠룡기우의 형식을 재현한다. 풀어 설명하면, 작업은 강우의 직능을 가진 용을 형상화해 비를 기원하고(상룡) 용소에 머물고 있는 잠룡을 자극해 경천동지할 비상을 이끌어 강우를 얻어내는(잠룡기우) 주술 방식을 재구성한다. 이 작업에서 특기할만한 점은 용과 재단을 재현하는 의례의 핵심 과정을 3D프린터가 대신한다는 것이다. 작가는 여러 유적지와 박물관을 방문해 전통 건축양식의 다양한 용두를 3D 스캐닝 기술로 디지털화하고 조인트로 설계해 3D 프린터로 출력한다. 기우 의례에 내재된 염원과 반성의 행위를 몸소 실천하듯 줄곧 노동 집약적 과정을 통해 기우제를 재현한 이전과 달리, 3D프린터라는 비교적 새로운 기술을 작업의 중심부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물론 작가는 이전에도 기술과 과학의 예술적 접목을 나름의 실험으로 전유해왔다. 그럼에도 이번 시도가 남다르게 다가오는 이유는 그 기술의 적용과 전유가 이전보다 실제적 차원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또 그것이 작업 과정과 형식의 간소화와 직접적으로 연결되기 때문일 것이다. 중요한 점은 그러한 적용이 작가의 원래 사유를 왜곡하거나 어설프게 단순화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작업에 전유된 기술은 결코 새로움, 미래, 외부, 타자를 무조건적으로 찬양하는 않는다. 오히려 새로움의 개념은 본질적으로 이전, 전통, 내부와 같이 반대의 것과 결부되어 있음을, 오직 그러한 관계에서만 가치화될 수 있음을 인지하게 한다. 전통건축 양식인 용두를 3D 프린터로 출력하고 이를 조인트 삼아 구조물을 가설하는 작업은 그렇게 의례와 기술, 개인의 열망과 미술의 형식, 또 전통과 현대가 결합(joint)된 상태를 구현하다. 그리고 이는 너무 멀리 있어서 혹은 이미 일반화되어 쉽게 감지되지 않는 새로움, 외부, 타자의 세계를 고찰하게 한다. 다름이라는 텅 빈 구멍 안에 모든 가치를 밀어 넣는 것이 아니라 그 구멍으로 아득한 외부를, 보다 다양한 세계를 접지하는 것이다.
 
이처럼 전시는 주변을 헤아리고 나를 돌아보는 행위의 가치를 인정하며 보다 넓은 세계와 존재를 감지한다. 그리고 이는 물을 매개로 거대한 전체를 상상하고 다양한 존재를 고찰하는 <자연사박물관>과 <Is of: 서울>, 그리고 <Is of: 가을>로 확장 연결된다. 먼저 전시장 2층에 설치된 을 보면 여러 종류의 물병들이 어떤 법칙에 의거한 듯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다. 수십 개의 유리병에 담긴 것은 무엇일까? 작가는 병에 수돗물을 담아 마치 자연사박물관의 전시실처럼 인간을 포함한 포유류의 여러 종을 구분하고 표기해 나열한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물’을 공유하게 때문에 ‘물’이 곧 생명체를 지시하는 표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구상에 물이 생성된 이후 그것의 총량은 증가하지도 감소하지도 않았다. 여기서 작가는 모든 생명체의 탄생과 멸종, 진화의 과정은 ‘하나의 물’이 만드는 전체 세계를 공유한다고 설명한다. 작업이 애써 구분하고 나열한 생명체들은 어쩌면 병에 담긴 물처럼 애초에 분리 불가능 존재일지 모른다. 물을 통해 쉽게 구분되지 않는 것을 억지로 나누고 정렬하는 행위는 역설적으로 생명의 통합과 순환을 떠올리게 한다. 다시 말해, 작업은 선택된 몇몇 종을 무대 위에 올리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한 구분으로 존재 자체를 사유하는 방식을 고찰하게 한다. 이러한 시도는 오만한 인간의 허영에서 비롯된 것일까. 작업을 가까이 들여다보면 그것이 인간을 탁월한 존재로, 선택된 절대자로 간주하기보다 폭넓은 존재를 사유하는 최소치로 설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을 메타포로 하나의 전체를 가설하고, 인간을 최소값으로 존재를 탐구하는 작업은 세상 모든 생명체의 개별성이 녹아 구분이 모호해지는 곳, 그래서 존재한다는 사실만이 분명해지는 거대한 존재의 심연을 상상하게 한다.

 
이렇듯 전시장의 물(병)은 비규정성의 심연을 전제로 무수히 많은 존재의 임시적 규정을 가시화한다. 다시 말해 작업은 거대한 심연 안에 다양한 갈래와 분기를 가설하는 방식으로 외부 존재를 인식한다. 희미하게 감지되는 존재는 언제든 현재의 장면과 결속될 수 있다고, 대상의 구체적 사유는 현재에 내밀한 조건을 가설하며 가능해진다고 제안하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과 을 통해 보다 분명해진다. <Is of: 가을>은 가을 산의 풍경을 담은 사진 시리즈 작업이다. 작업 과정을 간략히 살펴보면, 작가는 가을 산을 방문해 가지각색의 단풍잎을 수집하고 여러 장치를 이용해 단풍잎의 색소를 추출한다. 그리고 그 색소를 잉크 삼아 단풍이 든 가을 산의 풍경을 프린트하고 특수 설계된 장치로 보존한다. <Is of: 가을>역시 비슷한 과정을 통해 진행된다. 작가는 작업을 위해 한강 물을 채집하고 이를 잉크처럼 사용해 리트머스 종이에 서울의 풍경을 프린트한다. 두 작업 모두 조건의 가설을 통해 비규정적 성질(색소, 물)을 분명한 현재의 장면으로, 규정성 가득한 상황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상황만을 전환할 뿐 대상의 본래 속성은 탈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작업은 비규정적 성질을 규정성의 요체로 차용하며 서로 다른 두 성질의 등치를 시도한다. 낙엽에서 추출한 색소로 프린트한 사진은 대상의 재현이 정확하지 못하고 빛이나 산소에 의해 색이 쉽게 변질되는데, 이는 수시로 변하고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실제 가을 단풍의 성질을 고스란히 전달한다. 또 강물은 도시 환경과 기후에 따라 고유의 산성도(pH)를 갖는데, 이 산성도로 프린트된 도시 이미지는 해당 장소의 생태환경, 경제, 문화를 가늠하는 여러 실질적 지표를 포함한다. 여기서 관객은 이미지를 보며 대상이 기인한 세계를 감지하는 경험을 하며 규정성과 비규정성이 서로 상통함을 재확인한다.
 
전시 전반을 관통하는 순환의 개념은 <Materia Medica: Cinis>에서 다시 치유의 개념과 포개진다. 작가는 질병을 일으키는 성분(독)으로 해당 질병(독)을 치료한다는 동종요법(homeopathy)의 과정을 직접 실행한다. 그리고 그를 기록한 영상과 실제 제조한 치료제-알약을 함께 전시한다. 처참한 사고가 있었던 곳에서 몇 가지 물질/성분들을 채집해 약을 만드는, 일종의 유사 과학을 실행하는 영상 속 장면은 엄숙함을 넘어 제의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애초에 작업의 목적은 약을 제조하거나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 아닌 그 행위 자체에, 그러니까 의례의 실천에 있었을지 모른다. 마치 삶 밖으로 밀려난 받아들이기 불편한 것들을 내 안의 세계로 조심스레 끌어안듯, 작가는 지워버리고 싶은 상처와 기억들을 치유의 물질로 분쇄하고 희석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이를 통해 저 멀리 밀어 둔 기억들을 현재의 시공으로 재호명하며 치유의 개념을 재고한다. 상처는 상처를 마주할 때 아물기 시작한다고 말하는 작업, 상처와 치료의 개념을 순환의 체계 안에 위치시키는 작업은 물의 순환을 통해 치유를 사유한 작가의 기우제 작업, 또 존재론적 고찰을 시도한 <자연사박물관>, <Is of>시리즈와 함께 독해된다.
 
전시는 서로 다른 개념을 뒤섞고 순환시키며 통합과 치유를, 보다 넓은 존재의 사유를 시도한다. 그 안에는 하나의 대전제가 존재한다. 대상의 고찰을 시도하기 이전에 이미 대상이 존재한다고 믿는 진술의 엇갈림, 시차를 수긍하는 것이다.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거대한 철학적 질문이 이미 존재를 인정하며 시작했듯 새로움, 타자, 외부를 사유하는 작가의 작업은 이미 다른 존재를 긍정하며 진행된다. 다만 작업은 앞서 받아들인 세계와 존재를 다양한 상황과 가설을 통해 감각할 뿐이다. 그럼 그것은 실재를 창조하지 못하는 추상적 존재의 무한한 변주인가. 전시는 새로운 대상, 외부 세계의 인지란 결국 존재를 창조하거나 발견하는 게 아니라 이미 드러난 것, 알고 있다고 믿는 것의 가치를 전도하며 시작된다고 역설한다. 작가는 이러한 인식과 가치의 전복을 기술과 의례, 형식과 삶, 비규정성과 규정성을 등치시키는 상황으로 구현하는 것이다. 전시 전반에는 객체와 전체가 혼합된 정서가 흐른다. 그리고 거기에는 무한한 존재에 대한 호기심이, 마주하기 힘든 상처와 기억을 보듬으려는 태도가, 통념적 질서를 재고하고 반감을 공감하려는 행위가 함께한다. 우리는 서로 다른 것들의 경계를 지우고 전체로 엮어내려는 전시를 개별 존재의 특이성을 제거하는 것이 아닌, 보다 넓은 세계를 포착하려는 시도로 봐야 할 것이다. 그렇게 확장된 세계를 사유하고 언제든 그 안에 다른 세계가 틈입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작가가 말하는 스쳐간 모든 것이 연결되는 접촉주술의 세상이다.

                                                                                                                                                        

                                                                                                                                                         권혁규 (독립큐레이터)



백정기


 

학력

2008 글라스고 미술학교 순수미술 석사, 글라스고, 영국

2007 첼시 미술학교 순수미술 수료, 런던, 영국

2004 국민대학교 입체미술과 학사, 서울

 

개인전

2018 접촉주술, OCI미술관, 서울

2015 Revelation, 두산갤러리 뉴욕, 뉴욕, 미국

Mind Walk, 두산갤러리 서울, 서울

2012 Is of, 대안공간루프, 서울

2011 The 20th Bridge Guard, 브릿지 가드 아트 앤 사이언스 센터, 스투로보, 슬로바키아

2010 Sweet Rain, 인사미술공간, 서울

Blue Pond, 스톤앤워터, 안양

2009 Wasser + Oleon, 스페이스 15번지, 서울

2006 Finger’s Madam Ch. 6, BMH (Blind Sound Media Hub), 서울

 


 
단체전

2019 Greetings from South Korea, Three Shadows Photography Art Centre, 베이징, 중국

2018 Power Play, Defina Foundation X 주영한국문화원, 런던, 영국

Will you be there?, Project Fulfill Art Space, 타이페이, 타이완

예술+농촌, 공감-농업과 기술의 연결, 인사아트센터, 서울

Delfina in SongEun: Power play, 송은아트스페이스, 서울

Jimei x Arles International Photography Festival, 샤먼, 중국

고체-액체 임계점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스페이스 윌링앤딜링, 서울

날씨의 맛,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서울

2017 Spirit from objects, Caso(Contemporary Art Space Osaka), 오사카, 일본

Ecology of Creation, Fukuoka Asian Art Museum, 후쿠오카, 일본

송은 수장고: Not your ordinary art storage, 송은수장고, 서울

2016 Neo-Eden, Jinjihu Lake Art Museum, 쑤저우, 중국

Nanjing International Art Festival, Baijia Lake Museum, 난징, 중국

한 뼘의 온도-관계 측정의 미학, 블루메미술관, 파주

OLD & NEW, 간송미술관, 서울

Apmap_Make Link,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서울

아트스펙트럼, 삼성 리움미술관, 서울

다중시간, 백남준아트센터, 용인

2015 SEOUL, Vité, Vité, Lille Tripostal, 릴, 프랑스

Singapore Open Media Festival 2015, Gillman Barracks, 싱가포르

2014 그만의 방, 아트선재센터, 서울

청춘과 잉여, 커몬 센터, 서울

Gate Opener, 베이징 꼬뮨, 베이징, 중국

초자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서울

드림 소사이어티, 서울 미술관, 서울

Unseen Photo Fair, 베스터가스파브리크, 암스테르담, 네덜란드

Apmap_Between Wave,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제주 서광다원

가방 방정식, 0914 갤러리, 서울

네오산수, 대구시립미술관, 대구

CMCP: 기억 반성 비전, 대구지하철1호선 중앙로역, 대구

2013 Roots of Relations, 송주앙미술관, 베이징, 중국

The Nest Generation, 두산갤러리, 서울

젊은모색,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2012 Hydromemories, 토리노 자연사 박물관, 토리노, 이탈리아

정신건강검진, 남송미술관, 가평

10CURATORS&10FUTURES, 한가람미술관, 서울

2011 FORMA fest, Pre-Freetex, 수트로보, 슬로바키아

아이파크 아티스트 레지던시 오픈 스튜디오, 커넥티컷, 미국

2010 동동 숲으로의 여행, 북서울 꿈의 숲 아트센터, 서울

사랑의 시작, 류화랑, 서울

2009 플랫폼 인 기무사, 옛 기무사 터, 서울

Hydromemories, 카라카스 시립현대미술관, 카라카스, 베네수엘라

Wasserleben, 워터 페어 베를린, 독일

기침, 보충대리공간 스톤앤워터, 안양

또 다른 상식, 어반아트, 서울

2008 Apartment Viewing, 아드 비아 베를린, 베를린, 독일

And so it goes, 아트뉴스 프로젝트, 베를린, 독일

Read your tea carefully, 현대미술센터, 글라스고, 영국

Flock Glasgow-TLV, 브뤼셀 갤러리, 텔아비브, 이스라엘

2007 Black Milk, 트라이앵글 스페이스, 런던, 영국

2004 사랑 그 힘, 키미 갤러리, 서울
 

수상 및 레지던시

2018 Exit 레지던시, 인도한국문화원, 델리, 인도

2016 델피나 파운데이션 아티스트 레지던시, 런던, 영국

2015 산 뉴욕 레지던시, 두산 갤러리, 뉴욕, 미국

2014 노마딕 아티스트 레지던시문화예술위원회, 체나이, 인도

2013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2012 송은미술대상, 송은아트스페이스, 서울

2011 아이파크 파운데이션 아티스트 레지던시, 커넥티컷, 미국

노마딕 아티스트 레지던시문화예술위원회, 체나이, 인도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2008 아드 비아 갤러리 아티스트 레지던시, 베를린, 독일

2004 제 3회 전국 대학 대학원생 조각대전, 대교문화재단,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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