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ind, inner landscape

김지현/ KIMJIHYUN / 金芝賢 / painting

2023_0908 2023_0920 / 월요일 휴관

김지현_삶2_종이에 채색_91×116.8cm_2023

김지현 인스타그램_@iamjihyun.art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그리다

GALLERY GRIDA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1221

(창성동 108-12번지) B1

Tel. +82.(0)2.720.6167

www.gallerygrida.com

 

우연은 필연을 향한 여정이다 "안다는 것은 본 것을 기억하는 것이며, 본다는 것은 기억하지도 않고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어둠을 기억하는 것이다" (오르한 파묵 내 이름은 빨강, 김상욱 울림과 떨림에서 재인용) 모든 흔적은 의미를 남긴다. 의미는 존재에 대한 기억이다. 흔적에서 감지된 의미, 즉 존재의 기억은 물리적 시공간을 초월한다. 기억은 지나간 시간을 반추하지만, 존재는 지금 여기 우리 눈앞에 현존하기 때문이다. 과거와 현재를 횡단하는 '흔적'처럼 '그림'이라는 사물의 본질도 이와 유사하다. 작가의 철학적 사유를 몸짓으로 풀어내 형상화한 것, 이것이 의미다. 그리고 인식과 물질의 상호작용을 통해 만들어낸 유의미한 결과물, 이것이 존재다. 그림이란 결국, 이미 사라진 시간의 체취를 시각적으로 부활시켜 현존하는 물질 형상으로 드러낸 사물을 말한다. 김지현 그림을 보고 흔적을 떠올린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지현_삶1,2,3_종이에 채색_91×116.8cm_2023

실제로 2020년 이후 제작된 드로잉 연작 제목이 흔적이다. 경험에서 비롯된 내면의 기억을 몸 밖으로 끄집어낸 결과물이 그의 작품이다. 이미지는 대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비구상-추상회화 형식으로 표출된다. 따라서 보는 사람의 해석은 열려있다. 형식은 내용을 담는 그릇인데, 그 속에 담긴 것이 무엇인지 한눈에 알아보기는 쉽지 않다. 사실적으로 재현된 구체적 이미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철저히 주관적인 심상의 표현, 비가시적인 내면 풍경이 김지현 작품의 알맹이다. 사변적이지도 않고, 친절하게 내러티브를 전달해 보여주지도 않는 미지의 세계다. 직접화법이 아닌 은유법이 동원됐다. 절제된 함축미도 감지된다. 비정형 도상과 화려하지 않은 색채, 생동하는 몸짓으로만 구성된 화면은 시적(詩的) 감흥을 물씬 풍긴다.

 

김지현_몇 마음_종이에 채색_56×60cm_2023
김지현_산 사이로_종이에 채색_45.5×53cm_2023

그림의 모티프는 어떤 사건에서 출발한다. 키우던 대형 반려견과 함께한 산책 에피소드다. 늘 같은 시간 같은 코스를 지났던 공원 숲길과 주변 풍경들, 그리고 예기치 못한 반려견의 갑작스러운 죽음...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었다. 어쩌면 다른 사람들도 이미 겪었을 법한 소소한 일상의 단편일지도 모른다. 동서고금 막론하고 모든 예술작품엔 작가의 삶이 반영된다. 평범을 특별함으로 만드는 사람들이 예술가다. 아니나 다를까, 김지현이 체감한 감정의 파동은 각별했다. 여느 일반인과 달리 그 기억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우연처럼 맞닥트린 작은 사건이 인생-삶의 가치관마저 바꿔버리는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다. 자신의 선택과 판단을 무한 긍정하고, 조형적으로 열린 가능성을 화면 위에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했다. 이런 마음가짐은 의도된 창작행위로 승화되었고, 결과는 그림 속에 선명히 각인되었다.

 

김지현_침전된 찰나_종이에 채색_45.5×53cm_2023
김지현_바람 부는 날_종이에 채색_45.5×53cm_2023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김지현 그림은 과거지향적이라 할 수 있다. 기억 속에 저장된 특정 사건을 집요하게 되뇌어 표현하기 때문이다. 망각의 지평선 너머로 가라앉았던 섬세한 감정은 재현을 뛰어넘는 추상 이미지로 환생시켰다. 이성과 의식 이면에 잠재됐던 감성과 본능을 스스로 흔들어 깨웠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오듯 내면의 파동이 부지불식 분출되기 시작했다. 흔들리는 나뭇가지, 흘러가는 구름, 일렁이는 물결... 이 모든 현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이 가시적으로 만들어낸 자연의 조화다. 선과 획, 면과 색의 겹침, 질감과 여백의 어울림, 붓놀림의 방향과 속도... 차별화되고 독창적인 스타일을 만들어낸 김지현의 조형 능력의 원천 또한 눈에 보이지 않는다. 화가의 내면에 잠재된 에너지 역시 바람 같기 때문이다. 김지현이 창조한 작은 우주, 그의 그림은 바람이 만들어낸 풍경처럼 경이롭다.

 

김지현_있었던, 잊었던_종이에 채색_39.6×54.8cm_2023

과거를 회상하며 즉흥적으로 풀어내는 제작과정엔 우연이라는 요소가 강하게 개입된다. 우연은 언젠가 필연과 맞닥뜨린다. 이 둘은 동전 양면처럼 한 몸으로 이뤄진 운명이다. 곰곰이 생각하면, 우연과 필연이 낳은 결과는 서로 얽혀있다는 결론에 다다를 수밖에 없다. 현대물리학, 특히 양자역학을 연구하는 과학자들도 비슷한 고민을 한다. 예컨대 그들은 빛이 파동이면서 동시에 입자이기도 하다는 난해한 난제를 관측만 했을뿐, 그 원인을 명쾌히 증명하지 못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 재밌는 건, 김지현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는 것이다. "내 작업 방식은 필연적이기도 우연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거의 우연에 가깝다. 사건들이 내 마음에 고정된 것은 필연이지만, 작업에 쓰일 재료들을 선택하는 것은 우연이다. 무의식 속 선택의 순간을 재조합하는 작업은 불확실한 자연과 사물로 기억될 수밖에 없다". 짧은 글이지만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김지현_기억의 재조합1_종이에 채색_26.4×19.3cm_2023

문장을 부분으로 쪼개고, 단어의 뜻을 곱씹어 본다.(굵은 글씨에 주목!) "작업에 쓰일 재료를 선택하는 것은 우연"이고, "무의식 속 선택의 순간을 재조합"한다며, "작업은 불확실한 사물로 기억될 수밖에 없다"고 단언한다. 이를 한 번 더 축약하면 "작업-재료-선택-우연, 무의식-재조합, 불확실-기억"으로 정리된다. 그렇다. "우연히 선택된 재료가 무의식으로 재조합된 불확실한 사물로 기억될 것", 이것이 바로 김지현 그림의 정체다.

 

김지현_기억의 재조합2_종이에 채색_19.3×26.4cm_2023
김지현_내, 풍경_종이에 채색_15.8×22.7_2023

한편, 작가는 동양화를 전공했다. 그렇지만 동양화니 서양화니 하는 구분은 무의미하다. 졸업장에 찍힌 학과 이름으로 장르를 재단하는 건 형편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김지현 그림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이것일 수도 있고 저것일 수도 있는 '그냥 그림'이다. 뜬금없이 서양 철학사와 잘 알지도 못하는 첨단 현대물리학 분야인 양자역학, 심지어 신유물론 같은 새로운 과학이론과 혁신적인 사상을 들먹여본다. 데카르트가 설파한 명제 '코기토 cogito ergo sum' 이후, 인간은 신-종교로부터 벋어났다. 이성을 지닌 주체적 자아를 자각하게 된 것. 비로소 근대(화)의 서막이 열린 것이다. 이때부터 인간은 이원론적 시각으로 세상을 구분하기 시작했다. 인식하는 주체(나)와 대상으로서 객체(너) 뿐만 아니라 선-악, 신체-정신, 물질-영혼, 자연-문화, 생물-무생물, 남성-여성, 정상-비정상, 서양-동양, 전통-현대, 미시-거시... 미처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모든 것을 능동과 수동으로 나누는 이항 대립적 세계관을 지니게 됐다. 하지만 영원불변, 절대 진리는 없는 법. 패러다임은 변하고, 절대적인 것처럼 여겨지던 과학적 원리는 전복되기 마련이다.

 

김지현_바람과 경치1_캔버스천에 채색_140×270cm_2022
김지현_바람과 경치2_종이에 채색_51×64.7cm_2022

예컨대 현대물리학, 특히 미시세계를 연구하는 양자역학에서 제기된 '불확정성의 원리'는 서양철학과 과학의 뿌리를 근본적으로 뒤집으며 새로운 과학혁명을 예고하고 있다.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 '물질'에 대한 새로운 사유와 인식을 주장하는 '신유물론'의 등장도 눈여겨 주시해야 한다. 같은 맥락에서 제기된 '인류세 Anthropocene' 개념도 무시하고 외면할 수 없는 화두임에 틀림없다. 근대 이후 폭주해 온 인류에 대해 지구가 반응하며 내놓은 위험경고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덩달아 예술-미술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반성도 필요하다. 여하튼, 개인적으로 최근 흥미롭게 살펴 보는 사상이 바로 신유물론이다. '행위자-연결망 이론(Actor Network Theory, ANT)'을 주장한 과학기술학자 브뤼노 라투로(Bruno Latour, 1947~2022) 견해에 많은 부분 공감한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자꾸 그런 입장으로 그림을 해석하려는 경향을 감추지 못하겠다.

 

김지현_바람과 경치3_종이에 채색_45.3×41cm_2022

이런 배경을 전제로 김지현 작품에 대한 의견을 정리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김지현 그림은 단순히 추상적 이미지를 보여주는 동양회화로 규정 지울 수 없다. 예술이라는 불확정한 가치판단 개념을 내포한 유의미한 사물이기 때문이다. 기억과 존재의 의미는 작품의 핵심요소다. 그림은 인간과 비인간-물질 상태에서 얽혀서 횡단하며 관계 맺는다. 어떤 사건의 결과가 흔적이라면, 그림 역시 흔적을 간직한 사물이다. 인간과 물질의 행위가 결합 되어 보여주는 우연의 결과, 유의미한 이미지를 발산하는 필연의 사물이다. 어둠을 기억하는 밝은 표면. 이것이 김지현 그림이다. 이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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