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너머_원계홍(元桂泓, 1923-1980) 탄생 100주년 기념전

Beyond_The Centennial Exhibition of Guei-Hong WON

원계홍展 / WONGUEIHONG / 元桂泓 / painting.archive 

2023_0316 ▶ 2023_0521 / 월요일 휴관

 

원계홍_수색역_캔버스에 유채_45.5×53.2cm_1979

첼로 연주회 / 2023_0316_목요일_05:00pm

윤해원 「바하 무반주 첼로 모음곡 2번」

 

주최 / 성곡미술관_원계홍기념사업회

주관,기획 / 성곡미술관

관람료 / 5,000원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입장마감_05:30pm / 월요일 휴관

 

 

성곡미술관

SUNGKOK ART MUSEUM

서울 종로구 경희궁길 42(신문로 2가 1-101번지) 1관

Tel. +82.(0)2.737.7650

www.sungkokmuseum.org@sungkokartmuseum

 

성곡미술관은 원계홍 화백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해 한국현대미술의 흐름 속에서 원계홍의 예술세계를 재조명하고, 아직 알려지지 않았거나 흐릿하게 지워져 가는 그의 업적들을 다시 복원하여 알리기 위한 『그 너머_원계홍(元桂泓, 1923-1980) 탄생 100주년 기념전』을 개최한다. 1940년대 초 경제학을 공부하기 위해 도쿄로 건너간 원계홍은 경제학보다는 미술이 좋아 사설 미술아카데미에서 회화공부를 시작했다. 이후 서울로 돌아온 그는 자신의 아틀리에에 홀로 파묻혀 그림을 그리고, 일본에서 보고 배운 세잔, 클레, 칸딘스키 같은 작가들의 미술이론 등 서양의 현대미술론을 스스로 파고들며 자신의 예술세계를 일구기 위한 고독한 연구에 몰두했다. 그렇게 원계홍은 마침내 1978년 12월 공간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그의 나이 55세였다. 이어서 화가로서 자신감을 얻은 그는 이듬해인 1979년 공간 화랑에서 제2회 개인전을 열었고, 1980년 제3회 『중앙미술대전』에 초대작가로 작품을 출품했다. 이후 원계홍은 1980년 미국으로 건너가 그해 12월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원계홍의 나이 고작 57세 되던 해이다. 그의 안타까운 타계 이후 1984년 6월 서울의 공창화랑에서 원계홍 유작전이, 1989년 7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원계홍 회고전이, 1990년 12월 공간 화랑에서 유작전이 열렸으며, 이어서 오늘 성곡미술관에서 그의 전작을 아우르는 회고전을 연다.

 

원계홍_골목(까치집)_캔버스에 유채_45×53cm_1979

원계홍 화백의 작품은 주로 1970년대에 작업한 10호 내외의 유화이다. 골목풍경과 정물화가 주를 이루며, 나머지는 인물화와 추상화, 그리고 드로잉 등이다. 그중에서도 1970년대 말 작업한 '골목 풍경 연작'은 한국의 경제개발 이전 서울 변두리의 뒷골목을 단순하고 명쾌한 필치로 그려냈다. 이때 텅 빈 골목길은 사실 묘사에 충실하기보다는 원계홍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던 세잔의 풍경화처럼 단순한 기하학적 구성과 명료하고 순도 높은 색채로 담아내었다. 그런데 여기서 멈추지 않고 좀 더 다가서 보면, 그의 전 작품에 스며들어 있는 회색조와 머뭇거리는 듯한 붓 자국들은 아직 무엇인가 더 그려야 할지 아니면 그만 멈추어야 할지를 결정하지 못한 채, 미완성인 양 캔버스 전체를 배회한다. 이러한 원계홍의 의도적 배회가 세잔의 작품과는 전혀 다른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바로 원계홍 회화의 고유성일 것이리라.

 

원계홍_홍은동 유진상가 뒷골목_캔버스에 유채_46×53cm_1979

그것은 순수하고 우직하게 창작에만 몰두했던 한국의 초기 서양화가들처럼 원계홍 역시 오직 예술을 위한 예술에만 매진했던 데서 오는 예술혼의 깊이 때문일 것이다. 한국 모더니즘 미술은 그 태동기에 새로운 문물인 서양화를 만나며 재료와 기법에 대한 엄청난 호기심과 관심을 보였지만, 놀랍게도 서구 모더니즘의 영향은 작가의 예술적 역량과 열정을 일깨우는 것으로 끝나고, 결국 어떤 사조에도 휩쓸리지 않은 채 자신들의 고유성을 창조해냈다. 바로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0도, 즉 "글쓰기의 0도(롤랑 바르트)", 혹은 탈 신화화한 미술 덕분에 우리가 본래 알고 있던, 혹은 잃어버린 예술의 본질이 원계홍의 캔버스 안에서 생생하게 살아남을 수 있게 된 것이 아닐까. 덕분에 우리가 원계홍의 회화를 대면하며 어떤 특정 사조나 시대와 정치, 혹은 선전이나 상업성에 물들지 않은 순수한 진국의 맛을 느낄 수 있는 것이리라. 현대미술의 사라짐의 위기에서 그의 예술은 결코 그러한 잡다한 시대적 상황들에 종속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원계홍_장충동 1가 뒷골목_캔버스에 유채_65×80.6cm_1980

원계홍 화백을 이렇게 다시 마주할 수 있게 해준 공로는 역시 일찌감치 작가의 작품 세계에 대해 깊은 공감력을 가졌던 두 분의 소장가 김태섭과 윤영주에게 돌려야 할 것 같다. 예술 애호가였던 두 분은 탁월한 안목으로 원계홍 작가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여 작품을 수집하고 소장함으로써, 이름 없이 먼지처럼 흩어져 버릴 뻔했던 작가와 작품을 보호했다. 어떤 작품을 가치 있는 예술 작품으로 탄생시키는 데는 작가의 수준 높은 창작 활동이 가장 중요하겠지만, 그 작품의 예술성을 평가하고 인정함으로써 헛되이 사라지지 않도록 단단히 잡아주는 소장가의 역할 역시 매우 중요하다. 그 어떤 사심도 없던 미술계의 기인이자 외골수였던 원계홍은 두 예술 애호가의 관심 덕분에 다시 세상에 나와 빛을 발할 수 있게 되었다. 예술을 사랑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못다 핀 작가의 작품을 보듬은 소장가의 마음이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에 어떤 울림을 주길 바라며, 두 분께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 이수균

 

원계홍_북한산_캔버스에 유채_33×45.5cm_연도 미상

원계홍의 말 ● "예술이란 항상 일종의 긍정의 작업이어서 말하자면 경이와 향수를 긍정하는 것이 된다. 기본적 형태, 색채, 선 등은 충분히 조직되어 명확히 한정된 심상을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존속시킬 것이라고 요망하지만, 그 심상이라고 하는 것도 다만 무엇이든 심상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구성적인 심상이 아니면 안 된다. 구성적인 심상이라고 할 때 그것은 내부에 생명을 강화시킬 힘이나 원망을 환기시켜 생존할 권리를 주장시켜 그것보다 이상의발전을 조성시키는 심상을 말한다." ● "회화는 일종의 구애와 같은 것이라고 말한 사람도 있다지만, 참다운 회화는 사랑일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은 현대에 있어서 인간의 유일한 자유이며 구제인 것이 아닐 수 없다. 이 구제라고 하는 것이 예술에 관한 주요한 기능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예술은 영원한 환희인 객관적인 아름다운 것이 아니면 안 된다. 감상은 예술이 아닌 것이다. 예술이 염원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존재의 과정을 강조하는 것. 일생을. 인간의 숙명이 가지는 의의를 단호히 주장하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없었더라면. 있는 것은 다만 허무주의, 다양한 형식의 자기기만뿐일 것이다. 모조품일 뿐이다." ● "예술은 일종의 구애와 같은 것이라고 그러나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구하고 있는 동안에 소비되어 가는 것일 것이다. 연소하여 다만 검은 재만이 남겨졌다." ● "예술가의 세계란 쟁투와 질투, 야망과 절망, 책모와 불성실 등이 소용돌이치는 절망적인 곳이며 거기서 살아남는 자는 선인에 한한다고 할 수는 없다. 끈질기지 않으면 안 되고 또한 겸허하고 탈속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최대의 위험은 성공이라는 것이다." ● "균형이 잡혀 있고 색채가 조화되어 있으면 작품으로서는 충분하다. 주제 같은 것은 필수한 것은 아니었다. 회화는 말하자면 그 자체가 주제이매 아름다운 것에 영원한 기쁨이었다." (원계홍, 「작가노트」 발췌)

 

원계홍_회색 지붕_캔버스에 유채_33.3×45.3cm_연도 미상

원계홍에 대하여 ● "필자가 원 화백을 만난 것은 60년대 후반으로 소급된다. 지금은 없어진 안국동 로터리에 면한 송현동 입구(풍문여고 맞은편)에 있었던 박고석 화실에서였다. 인상은 과묵한 편이었는데 예술에 대한 논지는 분명하고 예리했다. 두 사람이 펼치는 예술론은 좀처럼 볼 수 없는 진지한 것이었다. 그리고 한참 지나서 그의 작품을 대한 것은 78년 공간화랑에서였다. 이 전시가 그의 데뷔전인 셈이었다. 그의 나이가 55세였으니까 당시 정서로서는 만년에 자신을 알린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전은 그와 가깝게 지냈던 지인들뿐 아니라 적지 않은 관람자들에게 기이한 감흥을 안겨준 것이었다. (그의 작품을 본 지인의 경우도 대개 몇 점의 작품에국한된 것이었다) 그의 작품이 지닌 화격이 전연 예기치 않은 신선한 것이었음에 기인한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리고 이듬해 같은 공간에서 두 번째의 전시가 열리었다. 이어서 80년에 열린 『중앙미술대전』(중앙일보주최)에도 초대되면서(당시 『중앙미술대전』은 신인공모전이나 특별히 몇몇 개성적인 중견작가들을 초대한 바 있다) 당당한 한 사람의 화가로서 위상을 지니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80년 미국으로 진출하면서 새롭게 자신을 펼칠 무렵 심장마비로 급서하였으니 화가로서의 전체의 삶은 극히 짧은 한 시기로 끝나고 만 것이 되었다. 그가 화가로서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광수(미술평론가), 「원계홍의 세계_심상(心象)과 본질」 (2023) 中)

 

원계홍_장미_캔버스에 유채_34.5×26.5cm_1977

"원계홍의 도시 풍경화는 크게 두 타입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화가가 살았던 성북동과 부암동 같은 산동네 주거지 풍경이다. 높은 구릉지에 들어선 1층 혹은 미니 2층 주택들이 골목을 사이에 두고 리드미컬하게 병렬되는 방식인데, 유사한 형태의 지붕과 벽면체로 유닛(unit)을 이루면서도 높낮이를 달리하고 필요에 의해 2층을 올리고 방 하나를 덧붙이는 방식으로 증식하는, 생명체로서의 골목정서를 표현했다. 다른 하나는 서울 도심의 '철거-개발-이주' 정책에 의해 무허가 판자촌이 철거된 후 신축된 홍은동 유진상가, 양동, 북창동 빌딩의 뒷골목 풍경이다. 높이 솟은 빌딩의 수직성과 위압적 크기, 벽돌 건물의 강렬한 적색, 거칠고 날카롭게 건물과 대치하는 넓은 도로, 사람도 간판도 없는 뒷골목의 을씨년스러운 풍경에서는 1970년대 고도 성장기에 대한 암울한 비전이 표현되었다." (김현숙(한국현대미술사학자))

 

원계홍_정물_캔버스에 유채_31.3×40.5cm_1975

"그에게 그린다는 것은 산다는 것을 의미하는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의 생활이 굳건한 신조와 비탄에서 이루어졌듯이 그의 작품 속에는 시대나 인간을 날카롭게 통찰하며 순간에 빠지지 않고 영원과 대화하고자 하는 마음씨가 엿보인다. 나는 그의 집에서 그가 그려놓은 작품들을 보면서 이 화가는 늘 인간에게 절망하면서도 한 가닥 희망을 걸면서 아름답게 살아왔다는 사실을 알았었다. 그의 그림은 정신이 병들지 않고 기술이 숙련에 때묻지 않고 소박하며 원시적인 건강함에 빛나고 있었다. ... 특히 원계홍과 같이 천성적으로 반역아이고 천재인 사람인 경우에는 여간해서는 그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야생아라고 했지만 이 유형의 예술가에게는 속인과의 정상적인 인간관계가 불가능했는지도 모른다. 화가 원계홍을 대했을 적에 나는 인상파 화가들이 한참 기고만장했던 때의 모습을 상상했다. 유럽의 전통과 정면으로 대립해서 인상파라는 새로운 예술을 창조시킨 그들의 높은 기개가 바로 화가 원계홍의 모습에서도 살필 수가 있었다." (故이경성(전국립현대미술관관장)) ■  

 

원계홍_꽃(글라디올러스)_캔버스에 유채_58.3×44cm_1974

Celebrating the centenary of the birth of artist Guei-Hong WON, Sungkok Art Museum presents "Beyond_The Centennial Exhibition of Guei-Hong WON". This exhibition aims to shed new light on WON's oeuvre in the context of Korean contemporary art, while restoring and publicizing his achievements that remain unfamiliar to us or are fading into obscurity. In the early 1940s, WON traveled to Japan and began studying in the Department of Economics at Chuo University in Tokyo. Preferring art to economics, however, he started to learn painting at a private art academy. Later returning to Seoul at the end of World War II, WON buried himself in his atelier to draw pictures and delve into Western contemporary art theory that he had studied in Japan, such as those of Cézanne, Klee, and Kandinsky, focusing on his lonesome endeavors to expand upon his own oeuvre. As a result, WON finally held his first solo exhibition at Gallery SPACE in December 1978 at the age of 55. Subsequently gaining confidence as an independent artist, he held his second solo exhibition at Gallery SPACE the following year in 1979, and in 1980, he submitted his work as an invitational artist to the 3rd JoongAng Fine Arts Prize. Later, WON moved to the United States in 1980 and unexpectedly passed away from a heart attack in December of the same year. He was only 57 years old. Aer his lamentable death, he was commemorated with a posthumous exhibition at Gongchang Gallery in June 1984, a retrospective exhibition at the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in July 1989 and another posthumous exhibition at Gallery SPACE in December 1990. Succeeding these exhibitions, Sungkok Art Museum is now proud to present a retrospective exhibition of WON's entire body of work. ● Generally sized around 45×53cm, WON's works are largely comprised of oil paintings drawn in the 1970s. These majorly include landscape paintings of alleys and still-life paintings, while the rest are portraits, drawings, and abstract paintings. Among them, the "Landscape of Alleys" series, which were mainly created in the late 1970s, capture scenes from Seoul before Korea's economic development, using simple and clear brushstrokes. Rather than remaining faithful to representational depictions, WON depicted empty alleyways in Seoul with simple yet lucid geometric compositions and high degree of color purity like Cézanne's landscape paintings. Upon closer examination, however, viewers will sense a world that is completely dierent from that of Cézanne and most Impressionist painters, as WON's paintings exude a subtle ambience in hazy gray tones as if they are still unfinished. This is the source of relief that viewers feel upon encountering his work and stems from the profundity of WON's artistic soul that delved into art for the sake of art, with a pure and honest devotion to artistic creation. Although WON surprisingly developed a tremendous sense of curiosity and interest in painting upon encountering Western painting during the early days of Korean modernism, he was simply influenced by Western modernism to awaken his artistic competence and passion, without allowing himself to be swept away by any particular trend. Thanks to "Le degré zéro de l'écriture (Roland Barthes)" and demythologization, viewers are able to vividly witness the surviving essence of art that theyhad known before or lost. This is the reason why WON's paintings allow viewers to savor genuine purity that has not been tainted with any specific trend, time, and politics, or tinged with propaganda, instigation, and commercialism. Amid today's crisis in which modern art even faces the possibility of extinction, his works speak volumes that art is never subject to such miscellaneous circumstances of the times. ● The credit for allowing the public to rediscover WON's works should be given to the two art collectors, Kim tae sup and Yoon Young Ju, who had the deepest sympathy for the artist's oeuvre. Based on their superb discernment as connoisseurs of art, the two collectors highly valued WON as an artist from an early era. By collecting and housing his works, they protected the artist and his works from vanishing like dust in the wind. Elevating a painting into a valuable work of art above all requires the artist's sophisticated creative touch, but the role of collectors is no less important as they prevent artwork from disappearing helplessly and preserve it by evaluating and acknowledging the artistry behind it. Thanks to the attention of the two collectors, new light will be shed on the work of WON, a loner and eccentric in the art circle who had little interest in worldly success. We at the museum would like to express our deepest gratitude to the two collectors in the hope that their wishes in embracing an artist's unfinished oeuvre based on a pure love for art will resonate in our own hearts as we view his work today. ■ Soukyoun LEE

 

□ 첼로 연주회- 곡명: 『바하 무반주 첼로 모음곡 2번』

연주자: 윤해원

일시: 2023년 3월 16일(목) 오후 5시         

2023년 4월 15일(토) 오후 2시         

2023년 5월 13일(토) 오후 2시

장소: 성곡미술관

 

□ 전시 연계 특별 강연 1

주제: 『잊혀진 화가, 원계홍의 발견』

강연자: 김현숙 박사

일시: 2023년 4월 8일(토) 오후 2시

장소: 성곡미술관 내

 

□ 전시 연계 특별 강연 2

주제: 『한국 근대 컬렉터와 컬렉션의 문화사』

강연자: 김상엽 특임연구관(국외소재문화재재단)

일시: 2023년 4월 22일(토) 오후 2시

장소: 성곡미술관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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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회 사각사각(四角思刻) 회원전’ 22일가지 개최

어라연전각(篆刻)연구회 김현숙 소장, “돌에 무한한 우리의 생각 새긴다”

 

▲ 어라연전각연구소 & 아카데미 대표 어라연 김현숙 (사진제공=어라연전각연구회)

“전각에 대해 조금이나마 관심을 갖는 분이 있다면 먼저 본인 이름이라도 직접 새겨 보기를 권하고 싶다. 생각 보다 부드러운 돌 위에 사각사각 새기면서 느껴지는 흥미로움과 신기함을 맛보시기를 바란다. 돌이라는 딱딱한 사물 위에 자신이 새기고 싶은 뭔가를 조각하는 시간은 무엇보다 나를 집중하게 만드는 매력에 빠지게 할 것이다.”

어라연전각연구회 탄생의 주인공 김현숙 소장이 전각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다. 그는 전각이 도장이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회화나 한글 캘리그라피 작품, 설치 예술로 승화시키며 미술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기존 전각(篆刻)과 다른 다양한 면모를 선보이면서 이를 대중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탄생한 어라연전각연구회가 16일부터 오는 22일까지 인사동 경인미술관 제5전시관에서 ‘제10회 사각사각(四角思刻) 회원전’을 진행한다. 이번 회원전에는 총 26명의 회원 작품들이 전시돼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다. 

 

전각은 한자 전서(篆書)로 새겼다고 해서 전각이란 이름이 붙었다. 기존의 전각은 서예나 동양화 같은 예술 작품에 찍는 낙관이나 통장, 서류에 찍는 실용적인 도장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실용성과 예술성을 모두 지니고 발전해 왔다. 

 

〇 전시된 작품들에 대하여

 

김현숙 소장은 전시된 작품들에 대해 “기존과 다르게 예술로 확장된 전각은 다양한 재료에 문자 외에도 회화, 조각, 공예, 디자인적 요소들과 결합하게 됐고 이번 전시회에는 그런 작품들을 많이 볼 수 있다”면서 “전통성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기법을 다양화해 기존의 인장 범주를 넘은 것들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여러 색상, 여러 형태로 표현하고, 돌, 나무, 안료 등 다양한 재료를 혼합해 새롭게 진화한 전각 예술의 세계를 잘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 어라연전각연구회 10회 정기회원전 공동주제 '우리나라 자랑스러운 유산을 전각으로 표현하기' 출품 작 


김 소장은 회원들의 공동 주제 작품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매년 정기 회원전 마다 주제를 다르게 정하는데, 올 해의 주제는 ‘우리 나라의 자랑스러운 문화 유산을 전각으로 표현하기’로 정했다”며 “회원들이 선정한 우리의 문화 유산들을 주제로 완성한 작품들은 정교한 새김부터 담백한 표현과 함께 돌에 색상을 입혀 시각적 효과를 줌으로써 보는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는다”고 강조했다.

 

〇 어라연전각연구회는

 

어라연전각연구회에 대한 소개를 부탁했다. 김 소장은 “어라전각연구회는 2012년에 설립된 순수 문화예술 단체다. 회원들이 서로가 지닌 지식과 경험을 공유하면서 우리 사회에 전각에 대한 인식을 확대하는 활동을 함께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올해로 10회째 개최되고 있는 회원전을 통해 전각 예술을 대중에게 널리 알리고 있으며, 한글날 한글전각체험, 전각 새기기 무료 체험행사 등 공공기관 주최 사업 참여와 각 급 학교 학생과 외국인 등을 대상으로 체험 프로그램을 활발히 운영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〇 ‘사각사각(四角思刻)’의 의미와 향후 계획

 

▲ 어라연전각연구회 정기회원전 로고 '사각사각' 


2016년 제4회 회원전부터 사용한 사각사각(四角思刻)이란 명칭은 어라연전각연구회를 대표하는 상징이 되었다. 김 소장은 “한 밤 중 고요한 눈 길 위를 밟을 때 들리는 소리의 의성어인 ‘사각사각’은 정성을 다해 전각도로 돌 위에 새하얀 눈들을 새겨 넣는 창작의 순간도 의미한다. 또한 작은 네모난(四角) 돌 위에 무한한 우리의 생각을 새기는 숭고함도 담고 있다”고 말했다.

 

향후 활동계획에 대해 김 소장은 “정기 회원전을 변함없이 진행하고, 내년에는 소규모 개인 부스전도 기획해 회원들의 역량을 한 단계 높일 좋은 기회가 되리라 본다”면서 “기존 국가공모사업도 지속적으로 수행하면서 전각을 심도 있게 배울 수 있는 아카데미 활동과 전각 체험관을 더욱 활성화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한편, 22일까지 진행되는 이번전시회는 각 작품에 부착된 QR코드를 스마트폰으로 스캔하면 작가의 작품설명을 AI 성우가 녹음한 목소리로 들을 수 있으며, 엽서크기의 안내서를 무료로 제공한다. 또한 전시장에 방문할 수 없는 관람객들을 위해 전자도록을 배포해 누구나 무료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문화저널21 박명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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