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과 비정상이 권력자의 눈높이에 따라 바뀌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군인들이 판친 정치를 사기꾼도 모자라 검사까지 설쳐대니, 나라꼴이 말이 아니다.

 

누가 집권하던 집권자의 입맛에 따라 정상과 비정상이 뒤집혀버리는 것은

어제 오늘만의 일이 아니다. 정상적으로 사는 사람만 바보가 되는 격이다.

 

세상 돌아가는 꼬락서니를 보니 좋아 지기는 커녕, 날이 갈수록 도를 넘고 있다.

인간들이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

 

빗방울이 떨어지는 지난 월요일 정오 무렵, 서울 사는 고향 친구들의 인사동 오찬모임이 있었다.

인사동 골목에 둥지 튼 여자만에 구정희, 이수만, 김이만, 윤성관,

하금순, 김순남씨 등 일곱 명이 모여 즐거운 시간을 가진 것이다.

 

한 달 전, 고향친구들이 상경하여 인사동 호텔에 여장을 풀고

청와대와 롯데월드를 둘러 한강유람섬까지 타는 일박이일 일정의 서울 관광을 다녔는데,

그때 찍은 사진을 모아 이수만씨가 사진집으로 엮어 왔다.

 

이수만, 신규식씨가 만들었다는 사진집에는 340여장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사진 뿐 아니라 인사동사람들블로그에 올린

서울 구경 온 고향친구들, 인생졸업사진 찍다는 수필까지 올려

무려 175페이지에 달하는 사진집이 된 것이다.

 

중복된 사진이 많은데다 무작위적인 편집이 눈에 거슬렸으나,

찍힌 친구들에게 사진 보내 줄 일을 들게 되어 고맙기 그지없었다.

 

6년 전, 정동지의 장날전시 때, 장흥의 마동욱 사진가

전시 개막식사진을 찍어 사진집으로 만들어 준적도 있었다.

소량으로 만들면 큰 돈 들이지 않고 만들 수 있는 방법을 그 때 알았는데,

왜 진즉 활용하여 정동지의 오래된 빚을 갚지 못했을까?

고향친구들 사진집을 보니, 그 일이 떠올라 마음이 다급해졌다.

 

오래전부터 정영신의 사진집을 먼들기 위해 틈틈이 기록해 왔다.

그러나 사진의 량도 만만치 않지만, 여러가지 비용이 마음에 걸렸는데,

두 권만 만든다면 큰돈 들이지 않고도 만들 수 있다기에 일을 벌이기로 했다.

사진을 년도 별로 구분하여 당시의 추억을 끌어내는 글까지 곁들인다면,

당사자에게는 최고의 선물이 될 것 아니겠는가?

 

정동지는 생일이나 명절만 되면 선물타령을 해대지만, 그동안 못들은 척 해왔다.

알라도 아이고 선물은 무슨 선물이고?“라며,

한쪽 귀로 듣고 한 쪽 귀로 흘린 수십 년의 세월이 늘 마음에 걸렸는데,

결혼 20주년을 기념해 처음이고 마지막이 될 선물 하나 만들어 주고 싶었다.

 

만약에 초상권 침해라며 압수해 간 정동지의 알몸 사진을 표지로 감는다면, 흥행도 가능할 것으로 여겨진다.

그 사진은 십 육년 전 장대비가 쏟아지는 만지산에서 찍은 그녀의 모습이다.

 

흙탕물이 튕겨 오르는 폭우 속에 검붉은 맨드라미까지 더해, 을씨년스런 풍경을

연출하는 그 때 장면은 처연하다 못해 처절한 느낌이 드는 걸작이었다,

그러나 정영신 개인 파일에 들어간 후로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사진이 되고 말았다.

설마 사진가가 자기 사진집 만든다는데도 내놓지 않을까?

 

그런데, 마동욱씨가 만들어 준 장터개막식 사진집도 줄 때만 좋았지, 두 번 다시 볼 기회는 생기지 않았다.

마침 고향친구들의 서울관광 사진집과 비교해 보기 위해 어렵사리 그 책을 찾아 낸 것이다.

그러나 그때의 추억을 되새기는 이외의 감동은 없었다.

 

결국 비슷한 사진들의 나열 보다 좋은 사진을 선정하는 안목과

편집 능력에 따라 책이 달라진다는 것을 새삼 절감한 것이다.

 

어렵게 구입한 책도 세월에 밀려 버려지는 것이 어디 한 두 권이던가?

인쇄물 홍수시대에 자칫 쓰레기를 양산하는 일은 만들지 않아야 할 것 아닌가?

특히 두고두고 보아야 할 가족 앨범이라면 좀 더 세심한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오자 하나 글씨 체 하나에 책의 품위와 격이 달라진다.

 

그리고 무조건 사진이 많다거나 책 면수가 두터워야 좋은 것도 아니다.

어떤 사진을 어떻게 배열하고, 어떤 캡션을 어떻게 붙이냐에 따라

책의 가치가 달라지는 것을 염두에 두어 제대로 한 번 만들어 볼 작정이다.

 

찍은 사진을 년대별로 분류하여 당시의 추억을 들추어내거나

삶의 의미까지 더해 준다면 책장에서 잠이나 자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그런 사진집은 안 될 것으로 여겨진다.

 

세상은 많이 달라졌다.

어쩌면 만들려는 정영신 사진집도 책이 아니라 e북으로 만들어야 할지 모른다.

책장보다 컴퓨터 앞이 더 쉽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젠 량과 부피가 아니고, 질이며 가치다.

 

이날 여자만에서 가진 오찬비용은 구정회씨가 부담했다.

그런데, 이미례씨가 '여자만 경영에 손을 땠을까? 음식도 달라졌고 종업원들이 불친절하기 짝이 없었다.

밑반찬도 다시 요구할 수 없는데다, 가져 온 밥도 바짝 말라 있었다.

밥을 바꾸어 달라고 하니 손님 먹는 밥을 손가락으로 꾹꾹 찔러보는 무례도 서슴지 않았다.

 

처음부터 툇마루에서 오찬모임을 갖기로 했으나,

 괜찮은 집으로 가자는 구정회씨 이야기에 여자만으로 정했는데, 후회막급이었다.

주인 없이 장사 잘되는 집 없고, 불친절에 다시 가고 싶은 집 없다.

 

구정회씨는 어릴 때 이외는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고향에서 떠나오며 기억에서 멀어졌는데, 듣기로는 긴 세월을 군인으로 살았다고 한다.

그의 절제된 삶과 빈틈없는 생활습관에서 군인정신을 가늠할 수 있었지만,

그 역시 내가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도 모를 것이다.

그동안 고향친구도 잊고, 다들 엄청 바쁘게 살았던 것 같다.

 

나야 민방위 출신이라 군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게 없지만, 어디서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했다.

'군대생활은 어디서 했고 전역 계급은 뭐냐?"고 물었더니, 입 무거운 구정회씨가 말문을 열었다.

 

귀가 어두운데다 말도 조근조근 하는 바람에 정확히 알아들을 수도 없었다.

두 차례에 걸쳐 군에서 죽을 고비를 넘겼는데, 한번은 소위로 임관하여 월남전에 참전했을 때이고

한번은 12.12사태를 일으킨 전두환 졸개들 총에 죽을 뻔 했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전두환의 12,12사태에 저항한 정병주 특전사령관 참모로 일했으나,

반란군들의 쿠테다가 성공하는 바람에 소령으로 강제 전역되었다고 한다.

명령을 생명으로 여기는 군인이 상관에게 총질을 해대는 더러운 판에 무슨 미련이 있겠냐마는,

간신처럼 달라붙어 승승장구하는 동료들을 보며 어찌 간이 뒤집히지 않겠는가?

 

전두환의 쿠테타 암호명인 생일집잔치의 최대 희생양은 정병주, 장태완, 김진기 장군이었다.

그들이 받은 수모는 말 할 수 없었다고 한다.

만약 정병주사령관 수하 였던 박희도, 최세창, 장기오 같은 간신배처럼 상관을 배신했더라면

그런 처참한 수모는 당하지 않을 것 아닌가?

 

하기야! 만약 전두환을 직속상관으로 두었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명령에 죽고 사는 군인이 상관의 명령을 어찌 거부할 수 있겠는가?

이게 군인이 짊어져야 할 숙명인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정당하지 않은 명령까지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이다.

 

나쁜 일은 상관이 아니라 부모의 말도 듣지 않는 것이 사나이가 갈 길이 아니겠는가?

그 때 쿠테타 군부에 고개 조아려 충성서약이라도 했다면,

처자식은 편하게 살았을지 모르지만, 실패한 인생이나 다름없다.

 

그는 소령으로 전역해야 할 타고 난 운명이며 팔자였다. 

장한 사람을 만들어 주었으니, 팔자가 나쁘지는 않다.

우리가 정치군인들의 비참한 말로를 똑똑히 보지 않았던가?

어떤 이는 죽어서도 반역자의 이름표를 가슴에 달고 살지만, 자네는 용기 있는 군인으로 길이 남는다.

 

여자만에서 일어나 찻집으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여자만맞은편에 있는 귀천에는 손님이 많아 앉을 자리가 없었다.

이수만씨의 안내에 따라 찻집 인사동으로 갔다.

그곳은 젊은이들이 찾는 찻집이지만, 안쪽에 작은 정원이 있어 사진 찍기 좋은 장소다.

인사동에는 자판기 커피가 없어 달콤한 팥죽을 시켰는데, 찻값은 하금순씨가 냈다.

 

그 자리에서 서울모임 회장으로 이수만씨가 추천되어, 두 달에 한 번씩 정기적인 모임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얼굴보고 밥 먹는 모임이 아니라 의미 있는 시간을 창출해 내야 할 것이다.

하다못해 가물가물한 어릴 때 기억의 퍼즐이라도 맞춰, 잘못 알고있는 고향의 역사는 없는지 살펴보자.

 

그 곳에서 늙은 군인의 초상사진이라도 한 장 남기고 싶었다.

안쪽 작은 정원으로 구정희씨를 불러내어 사진을 찍었으나, 썩 마음에 드는 배경이 없었다.

사진 값이라도 하라는 듯 십만원을 꺼내 주기에, 고맙다는 말도 못하고 받아 챙겼다.

서울역에는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이 많아서다.

 

날씨는 금방이라도 빗방울이 떨어질 것처럼 잔뜩 지푸려 있었다.

인사동 길을 걸어 나오며 자랑스러운 친구의 얼굴을 바라보니,

김민기가 만든 늙은 군인의 노래‘가 떠 올랐.

 

 

나 태어난 이 강산에 군인이 되어
꽃 피고 눈 내리기 어언 삼십년
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바라느냐
나 죽어 이 흙 속에 묻히면 그만이지

아 다시 못 올 흘러간 내 청춘
푸른 옷에 실려간 꽃다운 이 내 청춘

 

아들아 내 딸들아 서러워 마라
너희들은 자랑스런 군인의 자식이다
좋은 옷 입고프냐 맛난 것 먹고프냐
아서라 말아라 군인 아들 너로다

아 다시 못 올 흘러간 내 청춘
푸른 옷에 실려간 꽃다운 이 내 청춘"

 

사진,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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