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훈·한혜진 감독의 애니메이션
<메밀꽃, 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

한국 대표 단편소설 셋, 옴니버스로 구성
SICAF 2014 개막작, 8월21일 개봉 예정

 

 

애니메이션 <메밀꽃, 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의 한 장면

 

'이지러는 졌으나 보름을 갓 지난 달은 부드러운 빛을 흔붓이 흘리고 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붓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이 문장을 읽고 잠시 숨을 쉴 수가 없었던 적이 있었다. 묘한 기분이었다. 가슴은 쿵쾅댔으나, 머리는 평온했다. 가슴은 단 두 문장으로 머릿속에 거대한 메밀꽃밭을 그려놓은 문장력에 놀란 반면 머리는 그려진 그 장면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느라 평화로웠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은 그런 소설이다. 도시에서 태어나 줄곧 시외버스정류장 근처에서 매연을 맡으며 자란 이에게 문장만으로 몸 전체를 꽃밭에 던져놓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줬다.

자신에게 일종의 신화가 되어버린 원작소설을 마음 깊이 품고 있는 이에게 소설을 다른 방법으로 재현한 텍스트는 영화가 됐든 애니메이션이 됐든 대체로 실망감을 주는 경우가 많다. 소설이 머릿속에 심어놓은 상상, 그 상상이 파생한 신화 같은 이미지를 영화나 애니메이션이 적절히 재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아니, 재현한다 하더라도 만족하긴 어렵다는 말이 더 정확하겠다.

 

애니메이션 <메밀꽃, 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의 한 장면

 

그런데 한국의 대표적인 단편소설 셋을 옴니버스식으로 구성한 안재훈ㆍ한혜진 감독의 애니메이션 <메밀꽃, 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에서 그려놓은, 흔붓한 달빛 아래 춤추듯 하늘거리는 메밀꽃밭 장면을 보는 순간, 잠시 그때 그 묘했던 기분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아득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 장면은 절대 실사 영화로 재현할 수 없다. 소설 속 장면의 픽션은, 애니메이션의 픽션만으로 근소하게 극복할 수 있겠다.’

그런 생각은 <봄봄>에 이르러서도 반복됐다. 1인칭 독백으로 마름인 장인이 데릴사위 풍속을 이용해 순진한 청년을 기만하는 과정을 해학과 풍자로 그려낸 <봄봄>을 이 애니메이션이 재현한 방법은 바로 판소리였다. 미련하리만큼 아둔한 청년이 별의별 약삭빠른 수단을 동원한 장인에게 착취당하는 현실, 이를 해학으로 그려낸 김유정의 토속적이고 질퍽한 말들은 배우들의 대사로 어찌 녹여낼 수 있는 성질이 아니었다. 하지만 1인칭 시점과 전지적 작가 시점을 오가는 판소리 도창은 소설 속 어휘들이 가지고 있는 그 어감과 리듬까지 톡톡히 살려내며 극장 안 관객들을 이야기의 굴곡에 따라 들썩이게 만들었다.

 

애니메이션 <메밀꽃, 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의 한 장면

 

세 번째 작품인 <운수 좋은 날>은 1920년대 경성 시내 광화문과 종로, 인사동과 남대문 앞 거리와 전차, 상점과 성곽 길을 접사와 원사를 오가며 세밀하게 묘사하는 극사실주의 장면들을 재현해냈다. 안재훈ㆍ한혜진 감독은 서울역사박물관 사료, 외국 선교사들과 화가들이 남긴 사진, 도서관에서 우연히 찾은 수필집 속 사진과 신문 기록, 개인이 가보로 간직하고 있던 사진 등을 모두 종합해 현진건의 사실주의 소설만큼이나 살아 숨쉬는 경성의 장면들을 그려냈다.

 

애니메이션 <메밀꽃, 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의 포스터

 

장면과 묘사만큼이나 서사의 흐름도 의미를 더한다. <메밀꽃, 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은 회한과 인연을 조합한 <메밀꽃 필 무렵>, 기만과 웃음을 공존시킨 <봄봄>, 행과 불행을 교차시킨 <운수 좋은 날>의 이야기로 인생의 희로애락을 오밀조밀 엮어낸다. 안 감독은 “동시대 소설가들에게 ‘소설을 배반한 소설’이라고 불렸던 <메밀꽃 필 무렵>으로 한국 문학 속 언어의 깊이와 풍경에 대한 연민을 보여주고 싶었고, <봄봄>을 통해 아기자기한 해학을 전달하고 싶었으며, <운수 좋은 날> 속 경성의 모습과 하층민들의 삶을 통해 2014년 지금의 우리에게 서울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되새김질할 수 있는 시간을 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우리 세대는 교과서에서 읽었던 이 작품들이 점점 지금 교과서에서 사라져가면서, 이제는 영원히 이 작품들이 읽히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아 고른 이유도 있다”고 덧붙였다.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SICAF) 2014 개막작으로 선정된 애니메이션 <메밀꽃, 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은 오는 8월 21일 40여 개 정도의 상영관에서 개봉할 예정이다.

 

 

한겨레 /이재훈 기자 n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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