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초파일부터 시작된 비가 이틀 동안 쉼 없이 추적추적 내렸다.

연휴를 맞아 녹번동에서 한가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좋으나, 비 올때는 담배 피우기가 지랄 같다.

비 때문에 무슨 죄 지은 사람처럼 얼굴을 우산에 가리고 피워야하니, 쪽방 생각이 절로났다.

 

담배를 피우고 집에 들어가니, 정동지가 멋진 제안을 했다.

“부처님 오신 날은 어제지만, 가까운 '흥국사'에 한 번 가보자”는 것이다.

 

흥국사는 녹번동에서 30분 내에 갈수 있는 절인데, 여태 한 번 밖에 못 간, 등잔 밑이 어두운 천년고찰이다.

마침 비까지 부슬부슬 내려 절집 운치도 괜찮을 것 같아, 말 떨어지기가 무섭게 시동부터 걸었다.

 

고양시 지축동, 한미산(노고산) 동쪽 기슭에 자리 잡은 흥국사는 661년 문무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아담하지만 유서 깊은 사찰이다.

조선 후기인 1707년에는 영조 임금이 자신의 생모인 숙빈 최씨 묘가 있는 ‘소령원’에 다녀오는 길에

폭설에 갇혀 이 절에서 잠시 묵었는데, 그때 절 이름을 ‘흥성암’에서 지금의 '흥국사'로 바꾸었다.

'흥국사'를 왕실의 원찰로 삼으며, 친필로 약사전 편액 글씨까지 내려주었다고 한다.

 

글의‘짜임새가 단정하고 중후한 멋을 풍기는 ’약사전’ 편액은 초파일 연등에 가려 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조선 후기에는 '흥국사'에서 ‘만일염불회’를 만들어 염불 불교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일주문을 지나면 불이문이요. 불이문으로 들어서서 뒤돌아보면, 해탈문으로 변한다.

경내에는 약사전과 나한전, 명부전, 삼성각, 미타전 등 여러 전각이 있으나,

약발 세다는 약사전 여래좌상께 기도하며 참회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동안 주변 사람을 잃은 자책이었다.

한 때는 좋은 것이 좋다는 생각에 잘 못을 알고도 모른 체 했으나, 그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잘 못된 일을 공개적으로 지적함에 따른 부작용이 만만찮았다.

주변부터 바꿔 보고 싶었지만, 주제넘은 짓이었다.

평생 사람이 좋아 사람 사진을 찍어 왔는데, 가족과 친구는 물론 가까운 사람들을 많이 잃었다.

심지어 쪽방 주민들마저 등 돌리는 사람이 생겨났다.

하기야! 자기 잘 못을 까발리는데,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나?

 

그리고 상대방을 위해 올린 각종 리뷰도 말썽을 일으키기는 마찬가지였다.

개인적 감상문에 불과하지만, 다들 비판은 듣기 싫어했다.

같은 소리만 반복하는 앵무새 보다 말 못하는 벙어리가 나을 것 같아, 일체의 비판 글은 쓰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지난 일을 돌아보며, 한 분 한 분 용서를 구하며 화해하기로 했다.

무슨 원한 맺힌 일은 아니니, 양해해 줄 것으로 믿는다.

북한산 전망대 의자에 앉아 흥국사 지붕 위로 보이는 북한산 능선을 바라보며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겼는데,

나를 비웃 듯, 산봉우리마저 구름에 숨어버리네.

 

사진, 글 / 조문호

 

 

[출처] 작성자 인사동 이야기 2023,5,31]

생일이던 지난 94, 정동지와 여수로 여행을 가기로 했으나,

때 마침 밀어닥친 태풍으로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미루고 미루다 한 달도 더 지난 지난 109일에서야 나서게 되었는데,

평소와 달리 일박이일이라 모처럼의 한가로운 여행이었다.

 

다녀 왔다는 이야기조차 미루고 미루다 두 달이 지나서야 올린다.

새삼 지난 이야기를 꺼내려니, 기억력의 한계를 느끼기도 한다.

 

목적지 여수로 가기 전에 순천만부터 들렸다.

장돌뱅이는 여행을 떠나도 제일 먼저 들리는 곳이 장터다.

 

그 날은 순천 웃장을 찾았지만, 웃장 뿐 아니라 아랫장도 있다.

웃장은 위쪽에 있는 장으로 순천의 북쪽에 있는 장이고,

아랫장은 순천 남쪽에 있는 장이다.

 

순천 웃장은 할머니들이 모인 좌판이 정겹지만, 국밥집으로 유명한 곳이다.

 

때 마침, 국밥축제가 열려 광주식당’에 들어갔는데, 서비스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국밥을 두 그릇 이상 주문하면 삶은 돼지머리 수육과

선지를 넣은 순대를 무료로 주었는데, 양도 넉넉하지만 맛이 일품이었다.

 

국밥집에서 내려다보이는 생선파는 할머니는 계속해서 돈만 세고 있었다.

손님 없는 무료함을 견디는 방법인지 모르지만, 센 돈을 반복해서 세었다.

벌기 힘든 돈이라 만지기만해도 기분 좋은 모양이다.

 

장터에서 나와 습지생태 체험관광지인 순천만국가정원으로 갔다.

순천 도사동 일대에 조성된 부지 34만 평엔 갖가지 수목들이 어울려 장관을 이루었다.

주요 동선에 팽나무와 느티나무 등을 많이 심어, 자연 그늘 막도 만들어 놓았다.

 

한 쪽에는 홍학들이 노닐고, 한쪽에는 화려한 국화 조형물이 반기지만,

호수에 설치된 최병수씨와 최평곤씨 작품이 더 눈길을 끌었다.

 

순천만 정원과 순천문학관을 오가는 작은 무인궤도 열차도 다녔는데,

2023년에는 이곳에서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가 열린다고 한다.

 

지방교육을 담당해 온 옥천서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옥천서원1564년 순천부사 이정을 중심으로 한 지방유림의 발원으로,

1568옥천(玉川)’이라고 사액되어 서원으로 승격되었다고 한다.

 

1597년에 소실되었다가 1604년 허건, 심윤, 정지추 등에 의하여 중건되었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막 내려 유림에 의해 복원되었다.

 

경내에는 김굉필의 위패를 모신 사우, 서원의 강당인 경현당,

유생들이 거처하는 지도재와 의인재가 동재와 서재로 나누어져 있었고,

향례때 제수를 마련해 보관하는 전사청도 있었다.

 

그 외에도 내삼문, 외삼문, 고직사 등이 있는데,

주말인데도 문이 잠겨, 담 너머로 들여다 볼 수 밖에 없었다.

 

전라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이 옥천서원에는

선조가 내린 사서를 비롯하여 200여 권의 장서가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서원 옆에 자리 잡은 비각 임청대의 자태도 예사롭지 않았다.

옥개석과 비신, 대좌로 이루어진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비석과 달리

비신 위에 옥개석이 없고, 대좌에 불교유적에서나 볼 수 있는 연화문이 새겨져 있었다.

 

임청대는 무오사화 때 김굉필과 조위가 이 곳에 유배되어 귀양살이를 하던 중,

옥천서원 근방의 계곡을 벗 삼아 소일할 때 임청대라 부른데서 비롯되었단다.

비석 뒷면에는 비를 세운 경위를 밝혀 놓았다.

 

동양의 나폴리로 불리는 목적지 여수로 갔다. 

넓은 바다를 오가는 선박과 섬이 어울어진 바다풍경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여수는 유물 유적을 중심으로 풍부한 관광자원을 지녔다.

그 중 충무공 이순신장군과 관련된 유적 유물이 유달리 많다.

 

먼저 간 '오동도'의 이름은 오동나무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섬의 모양이 오동나무 잎을 닮았고, 섬에 오동나무가 숲을 이루었다고 한다.

본래 여수항 동쪽 섬이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축조된 길이 768m의 방파제가 생기며 육지와 연결된 것이다.

 

오동도까지 가는 동백열차를 타지 않고 방파제 따라 걸었는데,

늙은이가 걷기로는 만만찮은 거리였다.

 

오동도에는 '여순사건기념관'도 있었다.

그곳에는 해방 이후 혼란기를 겪었던 우리나라 상황과 전개 과정,

특별법 제정을 위한 민·관 노력 등 6개의 아카이브와 포토존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시전동에 있는 망마산 서쪽 산기슭에 자리 잡은 선소는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만들었던 곳으로 전해진다.

 

바다 위로 해가 넘어 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온 몸과 생각까지 석양 빛에 물들 것 같은 나른함에 젖어들었다.

 

어두워지기 전에 서둘러 빠져나와 어시장을 찾아갔다.

 

생선 잡아오는 어선을 만나러 갔는데,

싸고 잘하는 횟집도 소개받아 오물오물 맛있게 먹었.

 

때 늦은 생일상이지만, 이런 생일상을 받아 본 적이 있었던가?

갖가지 해산물을 안주로 소주 한 병을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비웠더니, 늦가을에 봄바람이 일었다.

여지껏 일 끝나기가 무섭게 올라 왔으나, 모처럼 여행의 즐거움을 맛본 것이다.

 

이튿 날은 조선후기 전라좌수영 부속 관청이던 진남관’을 찾았으나

보수정비공사로 관람할 수 없었다.

꿩 대신 닭이라 진남관 아래 있는 임란유물전시장을 둘러보았다.

 

임란 유물전시관에는 이순신장군이 남긴 갖가지 유물과 기록물이 보존되어 있었다.

 

7년간의 전란에서 겪은 모든 것을 기록한 난중일기를 비롯하여

해전사 출전도나 거북선을 만들고 무기를 시험해 보던 선소와

임진왜란의 유명전투들이 대부분 재현되어 있었다.

 

수군을 통제하고 지휘한 내용과 군영 내 일어난 사건 등, 폭넓은 내용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순신 장군을 도와 왜적과 싸운 승려들의 근거지 향일암을 찾아 갔다.

화엄사 말사인 향일암은 수직 절벽위에 지어진 절인데, 경치가 끝내준다.

 

 해돋이는 말할 것도 없고, 하늘과 맞닿은 봉황산의 지평선이 아스라하다.

 남해 금산으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해상경관을 볼 수 있는 최적의 자연 조망지다.

 

644년 원효가 창건하여 원통암이라 지었으며, 958년 윤필이 중창한 뒤 금오암이라 불렀다.

 

근대에 이르러 영구암이라 불렀다는데,

뒷산 바위가 거북 등처럼 생겼다 하여 붙인 이름이란다.

스님 말씀에 의하면 이름처럼 “신령한 거북이 팔만대장경을 싣고

용왕께 불법을 전하러 간다는 전설도 있다고 한다

 

해 뜨는 경관이 아름다워 붙여진 향일암은 최근에 붙여진 이름이란다.

 

임진왜란 때 승군의 본거지로 사용되었던 향일암’의 당우로는

대웅전을 비롯해서 관음전, 용궁전, 삼성각, 요사 등이 있다.

 

양양 낙산사, 남해 보리암, 강화 보문사와 더불어

우리나라 4대 해수관음기도도량으로 꼽힌다.

 

향일암을 품은 금오산은 갖가지 기암괴석으로 이루어 졌는데,

이는 팔만대장경을 뜻한다고 한다.

 

절 뒷산의 정상 부근에는 한 사람이 흔들거나 열 사람이 흔들거나,

그 흔들리는 폭이 일정한 흔들바위도 있다.

 

아찔한 절벽의 쉼터바위허우적대며 재롱 피우는 물개바위

곰 바위두꺼비바위 등 각양각색의 바위는 이곳만의 자랑이다.

 

절 마당에서 바닷가를 내려다보면 거북이가 입수하는 모습이 조각한 듯 뚜렷하고

이 산을 이루는 모든 바위의 단면이 신기하게도 거북이 등 문양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매표구 옆 일주문을 지나면 해탈문이 나온다

폭이 40~50cm밖에 되지 않는 틈새를 10미터 가량 들어가면 대웅전에 이른다.

 

좌측에 범종각 우측에 종무실요사채삼성전이 있고,

대웅전 앞을 지난 아래에 천수관음전이 있다.

 

다시 올라와 대웅전 옆의 동굴을 지나니, 관음전이 나왔다.

마당 아래 동전을 던지고 한 가지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좌선대가 수평선을 향해 의젓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동굴을 지나 대웅전을 뒤로하고 내려오니,

삼성각 앞 커다란 바위에 팔만대장겅을 상징하는 “경전바위“ 가 있었.

 

기암절벽 사이로 동백나무숲이 어우러진 절경이 발길을 잡았다.

 

우리나라 주요 관음기도도량 중 하나로 알려진 향일암

원효대사가 수도 중 관세음보살을 친견했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남해안 일출 명소인 향일암은 명승으로 지정된 국가지정문화재다.

 

마지막은 영취산 중턱에 자리잡은 흥국사를 찾아갔다.

이 절은 국가가 바로 되고, 불교 본연의 자세로 돌아갈 것을 염원하며 보조국사가 세웠다.

 

고려 명종 25년에 창건한 이후 국찰로 번성하였으나,

1559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법수대사가 중창했다.

임진왜란 때는 기암대사가 왜적을 무찌르기 위해 승려들을 이끈 절이기도한데,

전란 중에 타버리고, 1624년 계특대사가 삼창했다.

 

흥국사는 임진왜란시 승병의 훈련소로 활용되기도 했는데,

승군들은 이순신 장군 휘하에서 전투에 참여했다고 한다.

 

지금의 당우로는 대웅전(보물)과 원통전, 불조전, 무사전,

적묵당, 심검당, 백련사, 법왕문, 봉황루, 영성문, 천왕문 등이 있다.

 

보물로 지정된 중요문화재로는 대웅전후불탱화’, ‘흥국사노사나불괘불탱’,

흥국사수월관음도’, ‘흥국사십육나한도’, ‘흥국사삼장보살도’, ‘흥국사 동종‘,

홍교흥국사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일괄 및 복장유물 등이 있다.

 

그리고 흥국사제석도를 비롯하여 경판 236, 경전 93, 부도 13기도 있다.

 

흥국사의 가람배치는 법화경에 의한 구도라는 것이 특이하다,

대웅전에 빗살문을 달아 전부 개방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흥국사 대웅전은 앞면 3칸, 옆면 3칸이며 단층 팔작지붕 건물이다.

갑석이 있는 단층기단 위에 민흘림 기둥을 세웠는데, 기둥 높이보다 기둥 사이가 더 넓다.

이와 같은 평야적 요소는 수덕사 대웅전과 무위사 극락전에서도 볼 수 있다.

앞면에는 모두 사분합문을 달았는데 밑에는 2단의 궁창판을 두었으며,

위에는 문의 일부를 구획하여 교창처럼 꾸몄다.

 

공포는 다포계로 귀공포의 구조가 매우 복잡하다.

내부 바닥은 마루이며 천장은 우물반자로 되어 있다.

이 건물은 포작의 안쪽에 연꽃과 서조를 새기는 등 장식적이면서도 견고한 면으로 보아,

조선 중기에서 후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성격을 지닌 것으로 추정한다.

 

 

흥국사에서 조금만 들어가면 ‘흥국사백팔돌탑공원’이 나온다.

이 돌탑은 임진왜란 전장에서 산화한 의승군의 넋을 위로하고

여수산단 조성으로 희생된 산업역군들의 영혼을 기리기 위해

대신기공 김철희 대표가 조성하였단다.

 

흥국사 입구에 있는 홍교는 다리 길이가 40m, 너비 3.45m, 높이 5.5m로,

현재까지 알려진 홍예형 돌다리로서는 가장 높고 긴 다리다.

 

시냇가 암석 위에 편단석을 놓고 그 위에 같은 모양의 86개 석재를 중첩하여 

홍예를 구성하고, 앞뒤 양측 벽은 자연석을 쌓아 완만하고 긴 노면을 이루었다.

                                   꼭대기에는 행시의 무게를 대비해 장방형 석재를 덮어놓았다.                                                                                     

이 다리의 건립 유래는 순천 선암사 승선교와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흥국사'는 나라의 융성을 기원하기 위해 세워진 사찰이다.

흥국사란 이름처럼 ‘이 절이 흥하면 나라가 흥하고, 

이 절이 망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염원이 담겼다.  

 

정영신 동지 덕분에 기억에서 가물가물한 여수반도의 추억을 돌아 보았다.

여지껏 많은 촬영여행을 다녔지만, 생일기념이란 이름을 단 여행도 난생 처음이었다.

평생 생일을 챙기지 않았으나 정동지 등살에 생일 밥은 물론, 생일여행까지 간 것이다.

덕분에 기억마저 아득한 순천만과 여수반도를 두루 돌아볼 수 있었는데,

미루고 미루다 계절이 바뀌고서야 올리는 이 태생적인 게으름을 우짤꼬!

 

그동안 인사동 사람들 블로그를 운영하며 주변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을 기록하여 올려왔으나, 밀려 난 기사도 제법 있었다.

미적거리다 날자 놓친 전시리뷰에서부터 행사 취재에 이르기까지

많은 자료들이 타고 난 게으름으로 버려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처음이며 마지막일지도 모를 생일여행의 기록을 어찌 파묻을 수야 있겠는가?

 

이틀간의 길지 않은 여행이었지만, 많은 깨우침을 준 소중한 여행이었다.

그녀를 만난 지가 이십년을 눈앞에 두고서야, 새삼 소중함과 고마움을 느낀 것이다.

말이 이십년이지 온 종일 붙어다니며 장터 촬영을 함께 다녔으니,

그 부딪힌 시간을 더한다면 다른 사람의 반평생 삶이나 다름없을 것으로 본다.

 

장거리 운전의 피곤함도 잊고 어디든 돌아 다닐 수 있었던 것은

여행지의 아름다움이나 유익함 보다 곁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쪽팔려 삼가해 온 사랑이란 말까지 나오는 걸 보니, 죽을 때가 되었나보다.

 

치매수준의 기억력이지만, 그 녀와 함께한 시간만은 빠짐없이 기억하고 싶다.

 

사진, 글 / 조문호

 

순천웃장

 

습지생태 체험관광지인 순천만국가정원

 

여수 오동도

 

어시장

 

향일암

 

흥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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