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 28cm x45cm 천위에 유채

정기호 유작전 '하늘보다 눈부신 파랑'이 인사동 '갤러리 인덱스'에서 4월5일부터 24일까지 열린다.

 

정기호 화백은 미치도록 그림만 그리다, 정말 미쳐버린 화가다.

초반에는 탯줄 같이 뒤엉킨 잿빛의 시리즈를 그렸으나,

그 뒤는 천상의 세계를 연상케 하는 다소 몽상적이며 낙천적인 그림을 그렸다.

그만의 해학이 담긴 동화 같은 정기호의 작품세계는 명상에 의한 자기 수련의 한 방법이었는지도 모른다.

밤새도록 그림에 집중하다 실명 위기까지 간 적도 있었다는데, 결국 말년에 정신병원에 들어가셨다.

화구도 물감도 없는 정신 병원에서도 스케치북에 수많은 에스키스를 그리다 5년 전 운명하셨다.

 

행복한 화가일까? 불행한 화가일까?

 

글 / 조문호

고)정기호화백 / 조문호사진

 

평평한 존재자들의 세계

최근 과학기술학 등지에서 평평한 존재론(flat ontology)’이 뜨고 있다. 평평한 존재론은 크기와 상관없이, 권력의 편중과 상관없이 세상 만물에 우열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인간이 인간중심적 사고를 바탕으로 동물, 기계, 물질과 같은 비인간(nonhuman)을 도구화하고 도외시한 점을 비판하며, 모든 존재가 실재한다는 점에서 동등하며, 서로 연결되어 영향과 효과를 주고받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논자들은 객체들의 민주주의’, ‘사물정치등의 표현을 사용하는데, 그러한 용어들보다 더 효과적으로 평평한 존재자들의 세계를 가시화하고 있는 것이 정기호의 평면이다.

 

2008 72.5cm x 60.6cm 천위에 유채

평평한 존재자 1. 여인

 

정기호의 그림에서 여인은 부드럽다. 유려한 곡선과 흐름은 모두를 끌어안기에 적절하다. 자연 또는 실내에 누워 휴식을 취할 때도 세상을 향한 염려와 보호의 시선은 쉬지 않는다. 어머니의 품처럼 따뜻하지만 강함을 가진 존재이다.

 

1993 72.5cm x 60.6cm 천위에 유채

평평한 존재자 2. 자연

 

세모난 해의 햇살은 다리처럼 그 어디든 달려가서 비춘다. 나무는 곧게 또는 삐딱하게, 홀로 또는 함께 자라도 어디나 어우러진다. 꽃은 해만한 크기로 존재감을 드러내거나, 때로는 화가의 얼굴이 된다. 산과 바다, 연못과 같은 자연은 아예 인간의 형상이 되기도 한다.

 

2006 91cm x 72.7cm 천위에 유채

평평한 존재자 3. 동물

 

소는 그림을 그리거나, 여인을 관조하는 화가의 분신이다. 개는 여인의 곁에서 온기를 주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생활을 영위하는 독립체이기도 하다. 나무 꼭대기에 앉은 새는 세상을 향해 지저귀는데, 그 소리는 모든 존재자들에게 닿을 만큼 울림이 있다. 아이들을 태운 용은 하늘을 날면서 미소를 보인다. 정기호의 그림에서 동물들은 인간과 다름없거나 인간과 소통하는 존재다.

 

1994 72.7cm x 60.6cm 천위에 유채

평평한 존재자 4. 사물: , 이젤, 마차, , 교회

 

화가는 붓으로 이젤 위에 놓인 캔버스에 신의 숨결을 불어 넣는다. 인간에게 생기를 불어넣는 신의 숨결처럼 놀라운 창조와 변형 능력이다. 이성과 자연의 규칙을 초월해, 여인과 집, 나무를 태우고도 무거움을 모르는 마차는 구름과 바람의 도움을 받아 달린다.

 

1993 41cm x 31.8cm 천위에 유채

정기호의 그림에 등장하는 모든 존재는 평등하다. 이들은 나무-연못---얼굴 등으로 뗄 수 없는 사슬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 존재자들은 다시 다른 존재자와 결합하여 새로운 회집체(assemblage)를 만든다.

 

1990 40cm x 23cm 천위에 유채 ​

정기호가 만들어 놓은 매끈한 평면은 이러한 연결과 교환 그리고 새로운 배치를 자유롭게 실현한다. 이 평면에는 결합의 규칙과 같은 홈이 패여 있지 않다. 평면이 매끄럽기 때문에 무한 확장이 가능한 창조의 세계이다. 이곳에서 정기호는 존재자들의 크기와 형태를 다양화하고, 결합과 해체를 자유자재로 반복한다.

 

2002 53cm x 45.5cm 천위에 유채

그러나 이 세계의 화가는 다른 존재자들의 생사를 쥐락펴락하는 신과 같은 존재가 아니다. 정기호는 이 평평한 세계 안에 자리한 또 하나의 평평한 존재자, 단지 그림을 그리는 존재자로 머무는 것을 기뻐했다.

 

2008 72.7x60.6 천위에 유채

화가로서 그는 연결된 자연, 사물들이 이끄는 대로 숨을 참고 붓과 펜을 든 팔을 움직이는 수행자 역할을 했을 뿐이다. 그의 평면 위에서 이 모든 존재자들은 움직이고 새롭게 결합해 생명력과 자유로움을 누린다. 그 존재자들에게 하나하나 숨을 불어 넣어주었던 그가 그립다. 하늘이 눈부시게 파란 날에는 더욱 그렇다.

한의정 (미학, 충북대학교 교수)

 

 
1993 53x45.5 천위에 유채
1985 26.2x19 천위에 유채
1985 26.2x19 천위에 유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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