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4회 겸재 내일의 작가

공모 수상자

2023_0804 2023_0905 / 월요일 휴관

초대일시 / 2023_0804_금요일_12: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주말_10:00am~05:00pm / 월요일 휴관

전시종료 1시간 전 입장마감

관람료 / 어른 1,000 / 청소년·군경 500원

 

참여작가

전효경_신제현_전혜진_김민지

이정윤_박준식_배지인_성필하

 

주최,주관 / 서울강서문화원_겸재정선미술관

후원 / 서울특별시 강서구_강서구의회

 

겸재정선미술관

GYEOMJAEJEONGSEON ART MUSEUM

서울 강서구 양천로4736

(가양1243-1번지) 1,2기획전시실

Tel. +82.(0)2.2659.2206

www.gjjs.or.kr

 

겸재정선미술관에서는 올해로 14회를 맞이하는 "2023 겸재 내일의 작가 공모"가 진행되었다. "겸재 내일의 작가 공모"는 겸재의 화혼을 오늘에 되살려 미래의 한국과 세계의 미술을 이끌어갈 작가 발굴 및 가능성을 지닌 만20세 이상 ~ 40세 이하 젊은 작가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재료와 기법, 뛰어난 창의력을 지닌 수준 높은 작가들을 공모하였다. 이번 공모에서는 한국화, 서양화 작가 127명의 640여점의 작품이 심사 대상에 올랐다. 작가로서 자신의 세계를 의식적으로나 양식적으로 얼마나 성취하고 있는가에 주안점을 두고 심사위원들의 심사가 이루어졌으며, 나름의 스타일을 일구어가고 있는 작가들이 수상하게 되었다. 심사결과는 '대상'에 전효경 작가, '최우수상'에는 신제현 작가, '우수상'에는 전혜진 작가가 선정되었다. 이들에게는 각각 상금으로 500만원, 300만원, 200만원 총 1,000만원이 수여되며, 대상 수상자는 내년(2024) 겸재정선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어준다. 또한, 내일의 작가로는 한국화 부문-김민지, 이정윤 작가, 서양화 부문에서는 박준식, 배지인, 성필하 작가가 선정되었다. 이들에게는 '겸재 내일의 작가 증서'가 수여된다. 대상에 선정된 전효경 작가는 스킬이나 테크닉에서도 인정될 만하지만 그 정신 혹은 모험에서도 승인되었다. 회화로서 전통성과 그 변형 가능성을 모색한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최우수상의 신제현 작가는 정말 기대가 크다. 이른바 동서양 회화 비교미학의 경지를 나름대로 꿰뚫고 있었다. 그리고 회화로서 동시대성을 획득하고 그 모색을 지속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수상의 전혜진 작가는 1차 심사에서 주목을 받았으나 아이디어에 비해 회화적 밀도와 분위기가 조금 미흡했지만, 심사위원들은 그 가능성을 보면서 높은 기대감을 가졌다. 이들 외에 선정된 5명의 작가들도 각자의 개성을 드러내고 있었으며, 그 성취도에 대한 의견을 나누면서 심의 과정의 심사위원들은 그 이후 작업들을 기대하게 했다. 이번 내일의 작가 전시는 2023. 8. 4. () ~ 9. 5. ()까지 33일간 1층 제1기획전시실에서 내일의 작가로 선정된 작가 8명의 작품들을 한데 모아 부스전을 연다. 김병수 평론 부문 심사위원은 "예술에 있어서 전통적이고 역사적인 것들과 동시대적 감각을 융화하고 접속시키는 것은 거의 모순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지점에 대한 성찰과 예술가로서 실존적 고뇌와 용기를 보여주는 작업들을 만날 수 있었다. "라고 말했다. 또한, 김용권 겸재정선미술관장은 "겸재 또한 젊은 시절의 고뇌를 이겨내고 새로운 미술의 길을 개척했던 바 이 또한 젊은 작가들에게 귀감이 되기를 기대하며, 이들 중에 새로운 겸재가 탄생하기를 소원한다."라고 전했다. 겸재정선미술관

 

대상 / 전효경_유령뱀과 나무아미타불행_장지에 수묵채색_41.5×169cm_2023

나의 작업은 유년 시절부터 지금까지 연속되어 작용하는 '이사'라는 개념에서 시작된다. 본질적으로 인류는 생성된 지점에서 벗어나 새로운 곳으로 떠나고 정착하고 떠나는 것을 반복하며 발전해왔다. 수많은 나이테가 생기며 일 년의 기억이 좁아지는 그 순간들마다 사람들은 정착의 기분을 제대로 느껴본 적이나 있을까. 혹시 찰나의 순간이었다면 그게 정착이라는 단어로 정의될 수 있는 것일까. 유난히 많은 이사를 겪은 나는 이사를 갈 때마다 버려지고 새로 사는 사물들이 아쉬워 간소한 삶을 추구했다. 버리지 않기 위해 모으지 않았다. 첨약하고 사사로운 것들을 모으지 않는 동안, 주름처럼 새겨지는 나이테 틈에 끼어 손금에 새겨진 지도를 돛대 삼아 이윽고 빈손으로 다니는 법을 배웠다.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삶의 방식에 역설적이게도 나의 작업은 난잡하게 얽힌 오브제들로 화면이 빼곡하다. 외부적 경험을 토대로 보편적 형상을 추출해 자동기술법으로 나열하는 방식의 작업은 이윽고 한 화면 내에서 묘한 안정감을 만들어낸다. 이는 내가 궁극적으로 원하던 무정착의 정착 방식인 것이다. 이미지의 동기는 범위가 아득하게 확장된다. 이따금씩 본 영화나 소설, 외의 여러 경험들을 토대로 머릿속에서 떠올라 유영하는 단어들을 건져낸다. 자음과 모음이 분해되어 점자 도서들 속의 기호처럼, 모스 부호의 그것처럼 원래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수많은 점들을 원래 형태로 다시 조립해서 꺼내다 보면, 의외로 통일성과 규칙성 없지만 괜찮은 단어들의 조합이 나온다. 그리고 먹을 기반으로 뼈대를 세우고 작업을 진행하여 순간적인 이미지에서 파생되는 사고와 은유에 연쇄적으로 서사를 부여한다. 의미로 점철된 세상 속에서 저마다 무기물에 갖고 있는 의미는 다르다. 어떠한 한 사물을 대할 때, 나의 의미는 다르고 관람자의 의미는 다르고 또 다른 타인의 의미는 또 다르다. 각자가 바라보는 세상은 개인적이고 그 세상을 기억해내는 감정들은 은밀하다. 여태 살아온 개인의 경험이 응축된 삶 속에서 아주 하찮은 사물도 모든 매체에게 다른 작용을 일으킨다. 나는 착각과 변형을 통해 종이 위 아무렇게나 움직여 만들어내는 낙서 소리처럼 사사롭게 작업을 진행한다. 이지적이지 못한 관람자의 시선을 통해, 나의 작업은 완성 뒤에도 끊임없이 진행된다. 전효경

 

최우수상 / 신제현_마리를 찾아서 – 제주 11_ 투명 아크릴판에 아크릴채색, 배채법 채색_90×65cm_2018
나는 지난 21년간 동양화의 기법을 서양화로 재해석한 그림을 그리고 있다. 과거 우리 조상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했던 대마잎을 태워 아교풀과 섞어 먹을 만들어 대마잎을 그린다던가, 동양화의 배체법背彩法, 휙 등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업을 하고 있다. 문자도에서 보이는 특이한 원근법과 개념미술적인 글자의 활용법을 아크릴판에 역순으로 그리기도 하고 자개기법으로 한국의 주식 시장을 수학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또한 그림이라는 매체의 한계를 넘어 전통 자개 금박 기법으로 가야금이나 해금을 만들거나 궁중 안무인 춘앵무, 봉래의의 치화평을 재해석한 현대 무용을 연출하고 현대미술 퍼포먼스로 제작하기도 했다. 나의 가장 큰 관심사는 한국 전통문화의 본질을 연구하고 현재 나에게 가장 흥미롭고 적절한 방식으로 재해석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나는 나의 정체성과 내 작품의 방향을 찾아가고 있다. 대학시절부터 24년간 매일 그림을 그리면서 여러 가지 고민을 해 보았다. 동아시아 출생에 유교, 불교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자란 내가 서양화를 배우고 수채화와 유화, 아크릴물감으로 그림 그리는 것에 대해. 유럽 백인들이 미술사에서 만든 역사속의 말과 글을 가져와 익숙히 사용하는 나의 모습을 벗어나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그러한 고민 속에서 아직까지도 여러 가지 시도를 하고 있다. 나는 대학 학부 때부터 동양화의 배체법背彩法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그림을 그리고 있다. 배체법이란 약간 투명한 비단의 앞면이 아닌 뒷면에 색을 올려 반대편인 앞면에 색이 은은하게 드러나는 기법으로 대상의 겉이 아닌 속을 그리는 기법이다. 나는 아크릴 물감으로 유리판 위에 여러 번 덧칠을 해 색을 올려 마지막에는 배경이 되는 검은색을 칠해 완전히 모든 면이 검은색이 되면 다시 유리를 돌려 벽에 건다. 유리판 위에 한 층 한 층 물감을 그리면서 올리며 그리는데 맨 처음 칠한 물감이 유리의 가장 바닥에 깔려 보이지 않지만 유리판을 돌리면 이 부분이 그림의 가장 윗면이 된다. 그런 그림 한 장을 그리려면 50호 유리판에 아크릴물감으로 매일 9시간씩 꼬박 두 달이 걸린다. 흰색 하이라이트를 칠하고 밝은색부터 올려 잘 칠해지지 않는 유리 위에 아크릴 물감을 한 붓질 당 5~7회씩 그려 올리고 나면 일주일 후부터는 내가 그린 그림이 나중에 유리판을 돌렸을 때 어떻게 그려질지 알 수 없는 불안감 속에서 그림을 그리게 된다. 그러고 나면 10개의 그림 중 7~8번은 처음부터 다시 그려야 한다. 그리는 방식의 특성상 중간부터는 수정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면을 붓이 미끄러지는 유리 위에 그리는 이 수행에 가까운 이 기법을 시작한 지 15년이 지난 2017년이 되어서야 나는 제대로 무엇인가를 표현할 수 있었다. 이 기법은 나 자신을 보여주는 하나의 거울이다. 항상 불안하고 경계에 서서 고민하는 내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나는 숲이나 강, 바다와 같은 자연의 경계에 선 내 모습이나 내 주변의 비슷한 청년들의 모습을 그린다. 바다가 시작하는 경계점이나 숲이 시작하는 경계점에 선 사람의 뒷모습은 관객에게 하나의 시선을 보여준다. 그림의 인물을 자신 있게 맞대어 마주 보는 시선이 아닌 그 사람이 나아가는 시선과 방향에 관객을 둔다. 그림 속의 사람이 숲으로 들어갈지 돌아올지 나는 알 수 없다. 나는 항상 그런 마음으로 살기 때문이다. 신제현

 

우수상 / 전혜진_죽음의 공간_장지에 먹, 물감_72.7×116.8cm_2017

시체를 화장해 유골을 그릇에 담아 안치해두는 납골당은 죽음을 맞이한 후에도 현대의 사회 문제점들을 다를 바 없이 가지고 있는 장소다. 사람들은 삶의 마감 후에 안치되는 공간을 선택할 때마저 자신의 경제능력, 그 안에서 나누어지는 빈부, 또 남겨진 사람들의 편리함을 고려해야 한다. 남겨진 사람들 또한 그러한 요인들과 망자에 대한 개인적 감정들로 인해 오묘한 죄책감을 갖게 된다. 죽은 사람을 한 곳에 박스를 쌓아놓듯 모아 놓은 광경은 납골당을 추모 외의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그 공간은 현대사회의 도시 풍경, 특히 아파트와 같은 모습이다. 아파트의 층마다 다른 값, 즉 로얄층이라는 개념은 납골당에도 그대로 존재한다. 이는 현대사회의 모습을 '납골당'이라는 한정된 공간을 통해 작은 이미지로 보여주는 느낌을 준다. 그 공간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공간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죄책감이 증폭되고 기억조차 나지 않던 잘못한 일들이 파도처럼 밀려와 머릿속을 채운다. 남골당이라는 공간은 자주 찾아오지 못해 죄책감을 가진 사람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관련없는 사람들 또한 알 수 없는 죄책감을 가지게 하는 곳이다. 세상을 떠난 이들이 어떤 인연들과 함께 그곳에 있는지 모른다는 것이 남겨진 이들에게 죄책감을 더욱 불어 넣는 것은 아닐까? 마지막 안식처로 만들어져 있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들어가는 순간 느껴지는 알 수 없는 냉기와 천천히 움직이는 공기의 흐름이 보이는 듯한 공간. 어떤 옷을 입어도, 어떤 표정을 지어도 침묵을 만들고 차디찬 공기만을 느낄 수 있는 납골당은 언제 가도 낯선 공간이란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공간이 회화작업으로 변하면 비로소 현대사회가 투영되는 공간, 웅장하지만 너무나 차가운 공간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래서 이 작업은 납골당에서 보여지는 죽음과 삶의 모습, 현대사회의 문제점들에 관해 유추해 나가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먼저 공간을 크게 변형시키지 않은 채 스스로 바라본 다양한 관점들을 나타낸다. 모든 작업은 푸른빛이 도는 무채색 색감으로 제작돼 들어가는 순간 완전히 달라져버리는 감정, 생각, 기분 들을 만들어낸다. 젖은 상태에서 색을 올리고 또 올려 전의 번짐과 새로운 번짐이 만나 경계선이 흐릿해지고 공기가 흐르다 멈춘, 느리게 일렁이는 느낌을 준다. 이러한 색감과 채색방식으로 공간의 웅장하지만 정적인 차가움, 은은하게 들어오는 빛이 예민하고 조심스럽게 건물 안을 거닐고 있는 느낌을 주려 강한 어둠을 잡지 않고 묽고 탁한 색감으로 처리하여 흐릿하고 묘한 인상을 준다. 또 유골함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의 모습을 상상했던 어렸을 적 내 시선을 대리석 무늬에 초점을 맞춰 비치듯 그려넣으며 쌓이는 묘사들은 자연스럽게 재현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그대로의 유골함을 바라보는 내 현재의 시선도 함께 나타낸다. 새롭게 유골함들을 만드는 납골당의 모습을 보면 언젠간 유골함이 천장까지 채워질 수 있다는 생각을 주게됨을 표현하기 위해 천장의 벽면들에 수많은 유골함들을 빽빽하게 그려 넣고 위에서 들어오는 빛으로 인해 희미하게 가려진 느낌으로 재현적인 표현을 놓치지 않으면서 녹아들게끔 한다. 손에 닿을 수 없을 만큼 높은 곳, 가까이 할 수 없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공간을 합리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천장까지 유골함을 무리하게 넣어 이 작업이 현대사회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음을 전달한다. 이 작업을 통해 마지막 안식처를 선택하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크고도 작은 이 공간에서 서로의 다양한 인연들과 함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새로운 시선들을 갖게끔 하고, 이곳이 우리에게 주는 감정과 죄책감, 현대의 사회문제, 도덕적 문제를 보여주며 모든 사람들의 공통적인 큰 삶과 각자의 개인적인 작은 삶들 또한 투영하여 볼 수 있는 공간임을 나타내고자 한다. 전혜진

 

김민지_비 오는 139km의 풍경18_한지에 먹_162.2×112.1cm_2019

누구든 타지 생활을 한 번이라도 해본 사람이라면 고향에 대한 그리운 마음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른 시기에 학업을 이유로 물리적인 독립을 해야 했던 나는 13년간 반복적으로 잦은 이사를 겪으며 안정적인 삶을 꿈꾸게 되었다. 나에게 '고향'은 점차 주변인들의 풍경으로 변해가는 가까운 듯 먼듯한 '색다른 풍경'이다. 여기서 색다른 풍경이란, 독립이라는 경험을 통해 익숙했던 풍경이 여행지가 된 듯 낯설게 느껴지는 생경한 풍경이다. 이런 삶은 정착하는 삶에 대한 동경으로 이어졌고 이 동경은 나무에 대한 관심으로 연결되었다. 이를 고향을 오가는 버스 창밖의 풍경, 그중에서도 비 오는 버스 창밖의 풍경으로 그려내기 시작했다. 동양화를 전공하여 전통적 매체인 수묵을 이용한 풍경은 당시 나의 심리적 상태나 심정을 나타낸다. 처음 학업을 위해 도시인 타지에서 거주하며 고향인 강원도를 오가는 버스 창밖의 비 오는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고, 이제는 도시에 익숙해진 내가 보는 자연의 낯설어진 풍경에 나의 이동과 정착에 대한 동경을 담는다. 김민지

 

이정윤_영혼의 숲5_종이에 분채_162×130cm_2023

나는 하얀 사슴을 통해 인간의 의지, 생존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자 한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본능이 문명을 만들어낸 기본 원리라고 생각한다. 문화예술의 기저에도 불안과 두려움을 다른 감정으로 치환시켜야만 살아갈 수 있는 생존의 원리가 작용한다. '감동'에는 같은 감정을 느껴본 이들의 일종의 동질감일지도 모른다. 그런 두려움, 그런 무서움, 그런 슬픔의 감정들이 응어리지고, 마치 살풀이하듯이 풀어내는 것이 예술이지 않을까. 한 개인의 해방이 누군가에게 공명하여 감동을 주는 것, 어떤 감정의 해방감과 해탈을 느끼게 만들어 주는 것, 인간이 가진 불완전함을 일시적으로 해방 시켜 주는 것이 궁극적인 예술의 역할이자 존재 이유이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하얀 사슴은 작고 여린 존재로 시작했다. 목마르고 방황하는 나약한 인간의 영혼, 감정, 정신을 상징한다. 나에게 하얀색은 물들이기 쉬운, 상처받기 쉬운 색으로 여겨졌다. 작업을 진행하면서, 사슴은 성장하는 자아로, 하얀색은 스스로 빛을 발하는 영혼으로 발전했다. 붓질이 쌓여 가면서, 마치 기도문을 쓰듯 반복된 행위는 감정이 해소되며, 평온함을 찾게 한다. 감정의 덩어리만큼, 딱 그만큼의 평온함이 찾아온다. 그래서 사슴은 조금씩 세상으로 나오고, 세상을 인식하고, 직면하게 된다. 작업은 내가 서 있는 위치를, 내가 인식하는 세상을, 내가 느끼는 감정을 투명하게 받아들이는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재료는 크게 한지에 분채, 캔버스에 유화를 사용한다. 채색화의 문인화 적인 붓의 운용을 통해 실험하기도 하고, 전통적 채색방식인 바림이나 적묵법이 아닌, 더 과감하고 독특한 채색화를 그려보고자 한다. 유화는 캔버스 위에서 물감이 계속 쌓이고, 경계를 뭉개어 몽환적이고 깊숙이 침잠하는 방식으로 나타낸다. 하얀색과 깊은 초록색을 주요색으로 하여 화면의 색채대비를 크게 하고, 사슴이 화면 정 중앙에 바깥을 응시하는 조형의 방식을 선택했다. 이것은 세상을 직면하는 삶의 방식을 투영한 것이다. 예술이 염원의 방식으로 쓰였다는 것의 하나로 민화를 들 수 있다. 삶의 길흉화복을 그림으로 그려 넣고,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복을 기원한다는 것, 그것은 그만큼 삶이 고난이었고, 두려움이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백록(白鹿)은 음()이 비슷하다고 하여 백복(百福)의 의미를 가진다. 하얀 사슴 한 마리가 그려진 그림을 선물하면, 백가지 복을 선물한다는 의미로 전환된다는 것. 삶의 두려움에 맞서는 인간의 생존 본능이 집안 곳곳에서 색으로, 형태로 남겨졌던 것이다. 나는 현재에도 인간의 불완전함은 여전하고, 오히려 더 많은 것들을 알기에 더 많은 두려움에 떨며 살아가는 현대인을 발견한다. 이러한 생존 본능의 하나로써, 삶을 회피하지 않고, 세상을 직면하는 하얀 사슴의 형상으로 세상을 그려내고자 한다. 이정윤

 

박준식 _29 세까지의 죽음을 넘어 _ 캔버스에 혼합재료 _162.2×130.3cm_2022

나는 언제나 예술을 함에 있어서 삶에 대한 한계 없는 탐구, 자유로운 사유와 대담한 발상, 거침없는 표현들이 용이해야 된다고 늘 생각한다. 그렇기에 단지 예술을 도구나 수단 따위로 여기며 오만하고 교조적인 태도로 일방적으로 주장하고 선동하며 교정 시키려고 하는 데에 이용해선 안된다고 생각한다. 이는 사이비 교주나 테러리스트 같은 작자들이 하는 짓이나 마찬가지이며 예술이라는 미명하에 우리를 현혹시키고 뒤틀리게 하며 망가뜨릴 뿐이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작업을 하고 활동을 이어감에 있어서 늘 국가, 정당, 단체, 공동체, 젠더, 이데올로기 등등 그 무엇에도 얽매이거나 하지 않고자 한다. 언제나 나는 작업에 임함에 있어서 독립적인 입장에서 지금 이 순간 스스로가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그 가치와 이유를 증명하기 위해 임할 뿐 누군가나 무언가의 옳고 그름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우리가 늘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고 받아들이고 있는 누군가와 무언가의 옳고 그름에 대하여 물음을 던지며 이에 대한 자신만의 해답을 도출해내기 위해 전시와 작업에 임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보다 자유롭게 감각하고 지각하며 언제나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으로서 살아가려 한다. 나의 경우 주로 회화를 중심으로 드로잉과 페인팅, 북아트와 콜라주로서 작업이 전개된다. 나는 언제나 자신의 눈앞에 맞닿아 있는 실존적 세계와 이를 통해 계속적으로 마주치고 스쳐 지나가는 다양한 사람들과 사건들에서 비롯되는 여러 복잡다단한 인간 군상의 일면들을 그려내고 있다. 그런 가운데 그 모습들을 여러 각도에서의 관점과 시선, 거리에서 총체적으로 반복적으로 교차시키고 결합시키며 이미지의 시작과 끝에서 자신의 물음에 대한 나름대로의 분명한 해답에 도달하고자 한다. 물론 그 해답이 지금 이 순간에 한해서 적절한 것일 수도 있으나 이러한 여정들 끝에 결과적으론 언젠가 보다 완전한 답에 도달할 수 있으라고 난 확신한다. 점차 시간이 지나며 시대의 급격한 변화와 혼란들이 극심해지는 가운데 우리는 살고 싶은 날 보다 죽고 싶은 날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 그에 따라 나의 삶과 작업도 마찬가지로 매순간 극적인 생각과 감정들로 천국과 지옥을 오가고 있다. 매일 매일이 마지막 순간처럼 느껴지며 마치 자신의 전부를 걸고 비장한 각오와 함께 정말 숨이 멎어버릴 듯한 기분 아래 결투를 하듯이 임하게 된다. 그런 끝에 자신의 모든 것들을 불태우며 무척 고통스러우면서도 동시에 강렬한 희열을 느끼게 되는데 결국 그 어떤 후회도 미련도 남지 않는 완전연소에 이르고자 한다. 나는 적절히 배합되고 계산된 생산품이나 상품으로서의 무늬나 기호, 패턴, 낙서 같은 것을 그릴 생각이 없으며 이러한 것들에 나의 삶과 시간들을 결코 헛되이 보내고 싶지 않다. 나는 오직 매 순간 자신이 고뇌하고 갈등하며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가운데 직면하게 되는 삶과 그런 현실에서 처절하게 맞이하게 되는 시련과 역경을 반드시 극복해내기위한 전시와 작업들을 계속적으로 이뤄나갈 수 있기를 원한다. 나는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어디까지나 한 사람의 작가이자 인간으로서 자신이 임하고자 하는 삶에 충실히 살아가며 이를 통해 결국 자신이 최종적으로 갈구하고자 하는 자유와 구제 그리고 해방에 반드시 도달하고자 한다. 박준식

 

배지인_flowers_캔버스에 유채_116.8×91cm_2023
우리삶 속에서 빛났다가 사라지기도 하는 순간들이 남긴 정적을 그린다. 사람은 하나의 우주와 같다. 우연히 생겨난 작은 별들 하나하나가 모여 있는 것이 마치 기억의 조각들로 이루어진 우리의 모습과 닮아있다. 시간이 지나도 찬란하게 반짝이는 날이 있는가 하면 짙은 어둠으로 뒤덮인 날도 있다. 그리고 선명하지 않고 모호하게 그 사이를 둘러싸고 있는 흔적들이 있다. 항성이나 은화와 달리 빛을 내지 않지만, 주변에 미치는 중력을 통해 존재한다고 유추되는 암흑물질, 그렇게 원인도 모른 채 암흑 속에서 우리와 함께 존재하는 공기를 하나의 장면으로 전달한다. 우리는 경험했던 장면들이 혼재되고 알 수 없는 상황들이 끊임없이 전개되는 꿈에서 어떠한 의미를 찾으려고 한다. 나의 꿈은 미래를 보여 주지 않는다. 그저 나를 스친 인물들이 불현듯 등장했다가 사라진다. 꿈에는 시작도 결말도 없다. 분명 또렷이 바라보았던 눈동자도, 표정도, 꿈에서 깨고 나면 안개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내가 그곳에서 경험한 모든 것들은 내 뇌리에 남은 자욱일 뿐, 실존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시간을 통해 다른 기억을 체험할 수 있다. 이러한 서사가 담긴 작업을 그리기와 지우기를 반복하는 붓질로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살아온 날들이 남긴 자국을 붓질로써 표현한다.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지는 것들을 포착하고 외면하듯 다시 지워낸다. 꺠끗이 씻기지 않은 터치를 따라 다른 빛깔로 다시 물감을 올린다. 우리는 스스로 기억을 왜곡 시키기도 그러다가 다시 진실을 마주하기도 한다. 이런 우리의 모습이 내가 그림을 그리는 행위와 닮아 있다고 생각한다. 이미지를 그려내고 다시 지우고, 그리기를 반복하며 어쩌면 그날을 지우고 싶은지도, 다시 한번 그때의 향수를 만끽하고 싶은 것 일 수도 있다. 나는 그렇게 아른거리는 무언가를 쫒아 끊임없이 붓질을 하며 우리 안에 남은 흔적들을 캔버스에 옮겨 담는다. 배지인
 
성필하_정지된 흐름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2.7×90.9cm_2023

단순히 재현이나 강조를 통해서는 드러나지 않는 것이 있다. 정확히 인지할 수 없거나 아직 몸으로 습득하지 못한 자연의 언어일 것이라 생각한다. 간혹 내가 알고 설명할 수 있는 것과 다른 방식으로 그 감각의 순간들을 마주하기도 하는데, 경험하면서도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을 그림으로 그릴 수 있다면 생각과 감각 사이에 차이가 좁혀지지 않을까 한다. 감각의 상태를 설명 가능한 의미로 접근하기보다는 바라보게 할 하나의 시선으로서, 시선의 누적들이 쌓여 만들어낸 풍경의 사건을 이야기 하고자 했다. 시선과 붓질을 하나로 묶어 풍경의 발자취를 쫓아 형식을 이루고, 상호 작용하는 과정을 통해 또 다른 질문 태의 화면을 구축해간다. 의미를 두지 않으면서도 그림을 그리는 과정 안에서 획득한 감각의 표현들을 통해 화면과 나의 관계에서 이루어진 호흡을 계속해서 유지하고 싶다. 성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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