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복수의 자궁으로 가는 지도-1’전이 106일부터 30일까지 인사동 올미아트스페이스에서 열린다.

 

화가 정복수는 반평생을 억눌린 인간의 본성이나 실존에 대한 문제를 인체 구조로 표현해 온 작가다.

 

그는 탐욕의 인간을 가장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육체라는 믿음으로 인간의 절단된 몸을 그려 왔다.

 

오래전 그의 작업실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하나의 충격이었다.

마치 종합병원 정형외과에 온 것 같았다.

작업실에는 사방에 해체되고 절단된 인체가 걸려 있었다.

팔다리가 잘려 나간 형체나 표정에서 사악해지는 인간의 실체를 보는 것 같았다.

 

한편으론 짐승 같은 인간 본능의 원초적 욕망이 이글거리는 생존을 그린 투시도 같았다.

바로 병들어가는 현대인의 자화상이었다.

 

이번 개인전은 자궁으로 가는 지도라는 제목이 붙었다.

이건 돌아갈 수 없는 지도가 아닌가?

갑자기 존덴버 노래 ’Take Me Home, Country Roads‘가 떠올랐다.

"시골길이여 나를 집으로 데려가줘요. 나의 보금자리로..."가 아니라 어머니 뱃속으로...

 

신비한 자궁의 세계를 엿 볼 기회라며 들어갔는데, 마치 사주 보는 점집에 들어 온 기분이었다.

손금과 눈이 그려진 손바닥 그림 몇 점이 다가왔는데,

마치 스스로를 알라는 듯 묘한 뉘앙스를 풍겼다.

 

인간은 어머니의 자궁에서 출발했으나 결코 돌아갈 수 없는, 인간 회귀의 욕망을 부추겼다.

어찌보면 길 잃은 인간들을 안내하는 지도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처음 보는 작가의 자화상도 걸려 있었다.

작품에 대한 해설은 미술평론가 김진하씨 서문으로 대신한다.

 

영원한 청춘일듯하던 인생도 종국에 는 맞닥뜨리는 게 있다. 생명체라면 모두 피할 수 없는 운명, 생장해서 성숙해지 는 만큼 소멸이 가까워지는 게 세상 이치다. 생명의 끝 지점. 자궁으로부터 출발 했으나 결코 자궁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그런 회귀 불가능은 더욱 회귀에의 욕망을 증폭시킨다. 그 도저함의 사막에서 마지막 한 방울 생명수가 모래 사이로 스 며들어 버렸을 때, 마침내 우리의 모든 기억에서 자궁이 지워지는 암전 상태가 된 다. 페이드 아웃. 디 엔드. 이름하여 죽음.

 

정복수의 그림엔 항상 무엇인가 하는 인간들이 즐비했다. 50여 년의 화력을 돌이켜보면 초지일관 무엇인가 행위 하는 인간을 그렸다. 뱉고, 욕설하고, 먹고, 마시고, 싸고, 싸우고, 자위하고, 섹스하고, 거부하는 인간들. 그야말로 본능의 상태에서, 짐승과 같이 생존의 원초적인 욕망이 가득한, 생래적으로 죽음과는 거 리가 먼 듯한 살아있는 인간들의 생존경연장이자 투기장이었다.

 

그 숱한 공격적 동사형의 인간을 그리던 정복수도 이제는 그의 그림의 출발 지점인 10대 시절보다 좀 더 먼 과거를 유영해보려는 모양이다. 출생의 기표인 지문과 손금이라는 나침반을 꼼꼼히 분석하면서, 또 타고 난 눈빛과 얼굴과 성정을 참조하면서, 성장하면서 경험했던 사건들과 섭취했던 온갖 욕망을 하나 둘 해체 하며 자궁으로 가는 지도를 그리고 있다. 따지고 보면 인간의 생은 회갑을 기준으로 그 이전에는 미래에 의 욕망과 그에 비례하는 기억의 축적이 느리게 진행되고, 그 이후에는 과거로의 회귀 욕망의 증대와 추억을 망각하는 속도가 빨라지는 생태성으로 구성된 듯하다. 그래서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를 화 두로 삼았으되, 결국은 그 중간 지대인 현실에서의 번뇌와 고통과 헤맴으로 인해, 자궁으로 회귀하는 길을 찾지 못하는 것 일게다.

 

그래선가, 이번 근작들에선, 정복수 특유의 이빨, 성기 노출, 사정과 같은 이미지들은 많이 소거 됐다. 대 신에 자궁으로 가는 지도’, ‘깊은 인생’, ‘너무 깊은 생각’, ‘생각의 입’, ‘생각의 핏줄’, ‘을 찾는 방법’, ‘인간 은 무시무시한 벌레등과 같은 철학적 사유를 동반하는 제목들이 등장한다. 화가도 인간인 이상 그의 나이 에 비례해서 자기 존재성이나 내면을 반영하는 일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또 그만큼 삶에 대한 내밀한 관념 과 인식을 화면에 드러내게 된다. 정복수의 근작도 이런 경향을 여지없이 반영한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정 복수의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여전히 치열하다. 힘을 빼려는 자의, 힘을 빼는 과정에 집중하는 치열성이라고 해야 하나. 그림 속으로 파고 들어가서 채굴하고, 다시 묻고, 또 그 옆의 구멍에 천착해서 관통하고 나간 뒤 근처에서 돌아오기 위한 구멍을 다시 판다. 그림 그리기에 대한 정복수의 기본적 태도다. 버리기 위해서 버 리는 것에 더 깊이 몰두하는 습관이나 체질과 같은 태도 말이다.

 

한편, 그 치열한 자궁으로의 회귀 욕망과 기억과 기록을 더듬는 정복수의 진술은 남은 삶에의 욕망이자, 더불어서 죽음의 길을 순연하게 찾기 위해 작성하는 지도다. 정복수에게 그림은 그 지도를 제작하는 것으로 부터 그 지도에 표기하는 메모와 주의사항들을 꼼꼼하게 형상으로 확인하는 절차이기도 하고. 자궁에서 나 왔을 때부터 그의 의식에 지문처럼 새겨진 죽음에 대한 메멘토 모리를 통해 끊임없이 의심-저항-확인-수 용해온 지난 50년의 작업적 변증이, 정복수에게는 자궁으로 돌아가고픈 그의 본능과 의지의 생산 과정이었 다고 하겠다. 기실, 그게 화가의 일이다. 그가 출발해서 떠나왔던 자궁 입구를 찾기 위해 그리는 삶과, 마침 내 그곳에 다다랐을 때 비로소 그리기를 멈추는 것 말이다. 그 궤적을 그림으로 기록하고 표현하는 게 바로 작가적 삶과 죽음의 표지일지니, 여적 그리고픈 인간이 많다는 정복수에게 자궁으로 가는 지도는 또 새 로운 인간 유형을 탐색하는 길을 열어 줄 것이다. 67년을 걸어온 만큼 회귀하는 길 또한 만만치 않게 길 터 이니, 그가 그릴 인간들은 아직 많이 남았을 것이다. 다만, 이제는, 격렬한 본능보다는 존재를 사유하고 탐 색하는 깊은 인간형이 더 많아지지 않을까 유추해본다.“ 김진하(미술평론)

 

전시 개막 시간을 밝히지 않아 정동지와 오후 5시경 전시장을 찾았는데,

이미 2층 전시실은 먼저 온 분들이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주인공 정복수씨를 비롯하여 장경호, 장석원, 임정희, 조준영, 한상진,

김수길, 전강호, 조해인, 이재민씨 등 많은 분이 모여 있었는데,

혼잡스러워 뒤풀이 집으로 정한 '부산식당'으로 옮겨야 했다.

 

'부산식당'에는, 전시장에서 뵌 분 외에도 최석태, 황준연, 구경숙씨도 와 있었다.

그 많은 손님들 마신 술값이나 식사비가 만만 찮을텐데,

뒤늦게 나타난 올미아트스페이스 황순미씨가 계산해 버렸다.

 

여지 껏 수많은 전시 뒤풀이에 다녀 보았으나,

갤러리 주인이 화끈하게 뒤풀이 비용 내는 곳은 처음 보았다.

"돈은 이렇게 기분 좋게 쓰면 되돌아 가는 거야!"

 

정영신사진

와인을 주는 대로 마신데다 소주까지 섞었으니, 버텨 낼 수가 없었다.

정동지를 담보로 간다는 말도 없이 바람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사진, / 조문호

 

 

 

살(생.사.육)
김재홍展 / KIMJAEHONG / 金宰弘 / painting
2018_0221 ▶ 2018_0313



김재홍_살_캔버스에 유채_58×28cm×108_2017_부분

초대일시 / 2018_0221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00am~06:30pm


나무화랑

NAMU ARTIST'S SPACE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54-1 4층

Tel.+82.(0)2.722.7760



파편적이고 비규정적인 이미지, 새롭게 존재론적 지평을 열다 ● 오랜만에 김재홍의 유화작업들을 만난다. 2월 21일부터 3월 13일까지 인사동에 위치한 나무화랑에서 열리는 개인전으로. 14년만이다. 전시서문을 쓰기도 전에 화가 김재홍은 여러 차례에 걸쳐 자신의 SNS를 통해 전시될 작품들의 일부를 해상도 높은 사진 자료로 공개하였고, '살', '벌거벗은', '동행'의 세 가지 주제 범주에 따라 씌여진 작업노트도 공개하였다. 너무 선명한 작품 사진들과 작업의 의도를 매우 분명하게 밝힌 작업노트 때문에 전시 서문이 한낱 요식행위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문을 쓴다면, 화가 자신이 전한 메시지와 화가가 그린 이미지 사이가 기울어진 경사면으로 이어지고 있고, 꽤 넓은 틈이 벌어져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경사 때문에 한 쪽으로 쏠리고, 틈새 때문에 새어나간 세계를 펴고 주워 메꿔서 사잇길을 다시 놓으려 한다. 이 사잇길에서 더 많은 세계들과 더 작고 더 짧고 더 긴 세계들이 만나기를, 불분명한 소리와 다양한 몸짓과 낯선 냄새로 소통하면서. ● 김재홍의 작업은 이미지를 일종의 텍스트로, 즉 인간이 서로의사소통하는 언어로 다루어왔다. 여기에서 이미지와 텍스트의 관계는 일의적으로 확정될 수 없는 역사적 관계로 맺어져 있는데, 그 배면에는 이미지와 텍스트의 동질화 또는 이질화가 역사적 단계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는 전제도 자리잡고 있었다(분단의 땅과 갈라터진 피부). 자연스럽게 화가는 이미지 자체를 사회적 실천의 산물로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이미지 자체를 이데올로기적 의미를 담는 기호로 확장시키면서, 자신의 그림을 일정한 방식으로 의미작용의 조직체로 간주해서 상이한 단계에 맞춘 형상들을 작업해 왔다. 

 


김재홍_동행_캔버스에 유채_182×91cm_2017



이미지와 텍스트가 장애없이 전환되거나 번역될 수 있고, 이미지와 텍스트는 근본적으로 동일한 공통의 근원을 가지고 있다는 화가의 입장에 근거해서야, 이미지를 이데올로기 비판의 차원으로까지 끌어올린 작업의 내재적, 심층적 의미를 파악할 수 있었다. 언어와 시각이미지가 공통적인 근원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 그 생각이 아마도 의미론적 차원에서 언어로 번역할 수 있는 그림의 형태와 표현방식을 결정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림의 형태와 표현방식에 일정 코드를 개입시키고 이미지의 담론적 성격을 강화함으로써, 관람자들 이 그림과 직접 조우하는 대신 관람자들의 자유로운 접근과 능동적인 참여로 이루어지는 사회적 공론장을 형성하고 공동의 가치와 공통의 의미를 확인코자 하였을 것이다. 그에게 그림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참된 가치와 동형적인 이미지였고, 이 이미지를 통해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역사적으로 논쟁적인 사안들이 다루어지는 문화적 공론장의 중심을 세워가려는 참여적 실천행위였을 것이다. ● 이미지는 시각적으로 드러난 사상이라는 김재홍의 작업태도에 변화가 생겼다. 김재홍은 하나의 동질적인 전체로 포괄될 수 없는 현실, 무한히 산재되어 있는 파편으로서의 세계, 세계와의 직접적 만남이 사라진 물화된 세계를 육감과 직관의 복귀를 통해 전면적으로 현전시킨다. 총체성을 파악하는 이미지의 종합으로서가 아니라, 이미지의 파편으로, 그리고 이미지의 비규정성을 토대로. 오랜만에 만나는 김재홍의 작업에서 우리는 균열의 시간, 비시간적 시간, 소멸의 시간이 흐르는 동요와 떨림을 '느낄' 수 있고, 죽어버린 시간에 자리한 어둠의 냄새를 '맡을' 수 있으며, 사라진 시간의 흔적을 '만질' 수 있다.






김재홍_동행_캔버스에 유채_182×91cm×3_2017



이번에 전시되는 그의 회화작업들은 이전 작업들처럼 서사와 구상을 미적 체험의 의미론적 조건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14년 전인 2004년 '사비나 미술관'에서 보여준 리얼리즘적 재현 형식과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역사적 현상에 총체적인 시각을 부과하려던 유토피아적 추동력은 약화되거나 소멸되었고, 역사적 상황을 현실적인 매개로 단단하게 연결시켜 서로를 상관적으로 입증하려는 서사 구성의 유기적인 특성도 사라졌다. 또한 형식에 대한 주된 관심을 형태의 개별화와 단편화에 집중함으로써, 시각적 중심원근법에 따른 묘사의 일관성과 이미지의 안정적인 의미생산 코드를 동요시키고, 추상적 보편성과 초역사적인 함축에 갇혀 있던 리얼리즘 회화의 진부한 전통에서도 벗어나 있다. ● 놀랍게도 이번 전시 작품들의 서사와 구상은 전적으로 언어적 의미작용에 따라 이미 도식화되어 고정성을 획득한 것만을 직접 관계하지 않는다. 오히려 혼란스러운 감각을 용인하고 고정성을 유동화시키며 층위간의 상호전환을 활성화하는 잠재적 공간(예컨대 간간이 붓질의 흔적이 남겨진 검은 색조 띤 중립적 배경으로 이루어진 빈 공간, 그림 전체에 위치한 차갑고 음울한 배경면, 그리고 몸의 형상에 끼인 그림자)도 함께 관계 맺는다. 작가가 느낌으로 열어 보이는 세계인 이 잠재적 공간은 번역불가능하고 코드화되지 않고 비재현적이다. 잠재적 공간, 또는 잠재적 비존재가 출현함으로써 그의 그림에는 새롭게 존재론적 지평이 열렸다. 전시되는 대부분의 작품에서 서사와 구상(형상)은 탈서사와 비구상(비형상)과 동시에, 언어와 이미지가 동시에, 형태의 출몰을 동시에, 상반된 감정을 동시에, 풀고 엮는다. ● 관습적으로 선행경험에 의존하던 의미는 경험 중에, 경험의 경과 속에서도 생겨날 수 있다. 고통과 분노, 기쁨과 슬픔은 고통과 분노의 기억이나 기쁨과 슬픔의 기억에 의해서만 사후적으로 그 의미를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나 분노를 그리고 기쁨이나 슬픔을 느끼는 그 순간에도 새롭고 독특한 의미가 생겨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통과 분노, 기쁨과 슬픔을 느끼는 신체의 다양한 반응들, 몸짓과 표정, 근육의 수축과 이완, 피부의 땡김과 쳐짐처럼 의식의 통제를 벗어난 감각적 표현이라 해서 의미의 목록이 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김재홍의 이번 전시에는 이전에 작품의 의미체계에 속해있지 않던, 또는 은폐되어 있던 감각적 표현이라는 항목이 추가되었고, 모호함의 영역에서 만들어진 감각적 표현(또는 이미지의 세부)은 변형된 소재(도축된 닭의 몸통 그리고 그 위에 중첩된 인간의 몸), 주제의 특이함('육식의 종말'), 정서적 폭력성, 그리고 강한 색채감과 더불어 새로운 의미를 구성한다.




김재홍_Undressed_캔버스에 유채_182×91cm_2017

동일한 규격(28×58cm)의 캔버스에 그려진 108점, 244×122cm 크기의 작품, 91×181cm 크기의 6점 작품 등 모든 전시작품의 회화적 이미지는 시간의 어떤 순간을 그대로 담은 듯한 사진 이미지처럼 현재성을 띠고 있다. 그러나 이 현재란 실제로는 공간적으로 '여기와 저기'(here and there), 시간적으로 '이미와 아직'(yet and not yet)의 사이에서 규정되지 못하고 긴장 속에 존재한다. 김재홍의 그림은 현재성에 담긴 이중 구조를 하나로 통합하지 않고 오히려 각도와 구성, 화면배치를 통하여 관람자들이 균열의 긴장을 느낄 수 있도록, 균열의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균열의 단면을 만질 수 있도록 배려한다. 그의 배려는 균열적 성격을 극대화하거 나 강화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훼손되거나 약화되지 않도록 적정수준을 가늠하는 일이다. 그래서 화면은 동적이며 정적이다. 균열의 방향이 화면 바깥의 외부를 향하기도 하고, 화면 안, 내부로도 향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균열의 정도가 크거나 깊지 않아서인지 잠재적으로 내비치는 불안한 감각은 때때로 안정과 지속의 가짜 현실을 좇아 균열의 긴장을 완화시키려 하거나 균열을 봉합하고자 한다. ● 화가는 닭의 몸통을 성적으로 모호한 모습으로 그렸다. 닭이건 사람이건 동물의 몸통을 비틀어 생식기가 관람자를 향해 정면에서 보이도록 배치했다. 몸에는 공공연한 털이 남아 있지 않고, 성기는 다리 사이로 길게 뽑혀져 있거나 두툼한살 사이에 베어져 들어가 있다. 때로는 양 성징(수탉과 암탉, 여자와 남자)이 함께 드러난 몸을 그렸고, 생물학적 성이 비워진 몸을 그렸다. 화가는 몸을 권력의 작동방식에 따라 함락당하는 수동적 육체의 궤적으로 드러내면서, 몸을 죽음, 폐기, 말소, 비어있음에 소속시켜 육체적 접촉이 차단당한 분리된 개별 이미지로 보여준다. 몸의 움직임이 생물학적 활동의 원리로서 중요성을 가지면 서야, 움직임의 자유로움은 생물을 자극하는 육체의 새로운 상으로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김재홍의 몸(살)의 이미지가 감각의 자극적인 교란(이것을 종교에서는 쾌락이라 부르지만)을 배제하고 죽어버린 시간에 갇혀버린다면, 흐르는 현재, 언제나 변화하는 현재, 미미하기 이를 데 없는 순간적인 운동, 작고 작은 순간적인 시간의 존재를 느끼는 것이 가능 할까를 묻게 된다. ● 화가 김재홍이 현실에서 취한 소재는 화가가 그것을 통해 전달하고 싶은 해석적인 의도에 봉사하면서 변형되었고, 결국 생생하게 살아있는 소재(현실 소재)는 화가의 의도 속에 소멸되어 버린 것이다. 닭들이 공장식으로 사육된다 해도 숨 쉬고, 알을 품고, 모이를 쪼아 먹고, 소리 내고, 심지어 날기도 한다. 작품의 완성과 함께 소재에 해당하는 현실은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닭들의 몸이 화가의 의도를 따라 변형되어 하나의 동질적 전체에 포괄되어서 관람자들의 놀라움과 감탄을 일으킨다 하더라도, 현실에서 '다른' 현실의 생성은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닭의 몸, 닭 껍질, 닭 피부 등의 소재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결코 보지 못하고 지나친 세계를 촉각적 표면으로 가시화해 준다는 점에서, 전통적 리얼리즘 회화에서는 기대할 수 없었던 감각적 표현의 의미화 과정을 새롭게 만나게 한다.



김재홍_Undressed_캔버스에 유채_182×91cm×3_2017


육식문화에 공고하게 다져진 특별한 관계는 여러 시기에 걸쳐 여러 장소에서 결합하였고, 모든 사회의 생태환경적·정치경제적·사회문화적인 원동력 형성에 도움이 되는 정교한 네트워크를 구축하였으며, 그 네트워크의 다양한 경로는 우리의 삶과 세계관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도축(살)장, 자동화된 공장형 비육장, 거대 축산단지 형성과 문화적·역사적 세력들과의 독특한 결합, 그리고 그것으로 초래되는 환경적 위협과 생태계 파괴, 인간을 위한 식량에서 가축을 위한 사료로 전환된 전 세계 곡물 등 김재홍의 전시 주제는 우리의 삶을 사회의 제반 현상과 연관시킨다. 시간성이 개입할 수 없는 회화의 매체적 한계 때문에 회화적 주제는 이미지를 읽기 대상으로 만들면서도, 이미지를 읽기에 저항하는 대상으로도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이미지는 이중 계열, 또는 상반된 두 흐름의 지속적인 긴장관계 안에 서만, 흐르는 시간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육식의 종말'이라는 주제는 어느 한쪽으로 파악될 때 더 올바르다거나 더 정확하다고 파악되는 것이 아니어서 중첩과 분리의 이중성을 이미지로 표현하기에 적합하다. 김재홍의 작업에서는 주제가 두 흐름으로 다루어지기는 하지만, 때때로 화가 자신이 내린 올바름의 판단이 흐름 간의 이동을 방해한다. 그러나 그의 그림-이미지 안에는 언제나 이질적인 두 흐름이 존재하고 어떤 흐름도 제거하지 않으며, 하나로 통합되지 않는다. ■ 임정희


김재홍_동행-4_캔버스에 유채_122×244cm_2017


살(생·사·육) ● 가축. 인간에 의해 생명을 얻은 후, 더럽고 비좁은 공장식 사육환경과 천의를 무시한 인공사료로 미쳐가고, 오로지 인간의 먹거리인 맛있는 고기로서만 살찌 워지는데 그 존재 의미가 강제지워진다. 뿐인가, 최소한의 생명윤리조차 배제된 도살로 생이 마감된다. 죽어서도 스스로가 아닌, 인간의 살이나 배설물이 된 뒤 에야 비로소 흙으로 돌아갈 수 있는 운명. '살-연작' 108개 중 가축형상은 인체가 연상되어지게 그렸고, 여러 개의 인체 도 가축과 혼돈되어지게 배치했는데, 지배자(인간)와 피지배자(가축)를 동등 하게 보도록 의도한 것이다. Undressed ● 털과 가죽을 벗긴 후 드러난 살을 보는 순간, 온갖 치장과 위선의 거죽 밑에 가 려져 있는, 가축의 그것과 다를 것 없는 인간의 본질이 오버랩 된다. 그 벗겨지 는 가죽은 인간의 옷 같다. 제복, 발레리나 무용복, 드레스… 등. 이런 인간과 가축간의 비윤리적이고 참혹한 '지배/피지배자의 관계', '식/육'의 관계가 인간과 인간사이에서도 마찬가지로 깊고 넓게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 그 비극성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동행 ● 우주에서 볼 때, 극히 미미한 존재인 인간이 지배하는 이 세상은 매우 우스꽝스 러울 게다. 티끌보다 못한 지배욕구가 가진 비윤리성의 크기가 끝이 없어서다. 만약 내가 신이라면, 이 폭력적 권력자와 힘없는 약자의 위치를 동등하게 해 주고 싶다. 인간의 힘은 낮추고, 지배 당하는 생명들의 지위는 높게 해서 같은 계급을 갖게끔. 그래서 그려본 것이 둘이 공평하게 뒤섞인 새로운 종으로서의 생명체다. 人과 獸의 경계가 사라진 존재. 그리고 인간 ● 인간은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선택적 살생을 넘어, 더 많이 먹고·저장하고·이 윤을 추구하기 위해 타 생명체들의 살륙을 합리화한다. 진짜 인간적 야만과 폭 력은 바로 이 지점부터 시작한다. 모든 죽임의 목적이 잉여자본의 힘으로 타자 에 군림하려는 탐욕, 즉, 과대욕망과 폭력성으로 진화하고 질주하는 신자유주 의와 같은 제도가 웃고 있는 바로 여기…, 말이다. ■ 김재홍



Vol.20180218a | 김재홍展 / KIMJAEHONG / 金宰弘 / pain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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