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길의 사진공책

픽셀 Pixel, 하트 Heart ⓒ황규태,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호모’로 시작되는 인간에 대한 작명은 다양하다. 생각하는 인간 ‘호모 사피엔스’, 도구를 사용하는 ‘호모 파베르’, 놀이하는 ‘호모 루덴스’ 등의 고전적 이름들은 지금도 인간에 대한 본질을 적절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 우후죽순 생겨난 신조어들은 복잡한 현대사회의 일면들을 좀 더 세밀하게 반영하는 듯하다. 정보화 시대의 인간을 뜻하는 ‘호모 인포매티쿠스’, 디지털 시대의 ‘호모 디지쿠스’, 소비하는 인간 ‘호모 콘수머스’, 플라스틱 없이 살 수 없는 ‘호모 플라스티쿠스’, 스마트폰을 손에 든 ‘호모 모빌리스’, 그리고 사진을 찍는 인간 ‘호모 포토쿠스’.

 

한국을 대표하는 호모 포토쿠스 네 명의 모습이 담긴 사진 한 장이 있다. 1996년 강운구 작가가 서울 인사동 한 찻집에 있던 세 명의 호모 포토쿠스를 찍은 흑백 사진이다. 한정식, 김기찬, 그리고 황규태. 사진을 찍은 이는 찻집 유리에 반사된 실루엣으로 등장한다. 앞에 두 사람은 세상을 떠났다. 강운구 작가는 “시간은 시계 속에 그대로이고 사람들은 지나갔다”며 그의 사진집 <사람의 그때>에 아쉬움을 적었다. 황규태 작가는 2년 전 강 작가의 사진전이 열렸던 부산 고은미술관에서 회고전 <사진에 반-하다>를 열고 있다. 1960년대의 ‘흑백 스트레이트’ 사진에서 시작해 사진의 경계를 넘어서는 최근 작품들을 펼쳐 놓았다. 전시는 아쉽게도 내일(12일)이 마지막이다. 기사를 남겨서 황규태 작가의 작품들을 계속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놓자는 생각이 들었다. 황규태라는 호모 포토쿠스는 두고두고 곱씹어봐야 할 사진의 화두를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에 반-하다>는 앞서 말했듯 사진의 경계를 넘어서려는 몸부림을 보여준다. 그래서 ‘반-하다’의 ‘반’은 사진이라는 매체에 반대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물론, 사진에 홀딱 반했다는 뜻도 품고 있다. ‘열화당’ 사진 문고에 적어놓은 황규태 작가의 표현은 이렇다. “사진의 모든 것이 사진이고 모든 것이 사진이 아니다. 복사기도 스캐너도 모두 카메라이다.” 첫 문장은 알쏭달쏭하다. 그러나 두 번째 문장은 그가 아무래도 우리가 생각하는 통념과 다른 사진을 추구한다는 점을 확실히 알 수 있게 한다.

 

사진에 대한 정의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우리는 대개 사진의 기원을 프랑스의 루이 다게르가 1939년에 발명했다고 선언한 사진술에서 찾는다. 요오드 용액을 이용한 은도금 동판에 상을 맺히게 하는 은판사진술로 ‘다게레오타이프’로 불린다. 하지만 당시의 사진술은 다게레오타이프 뿐만 아니라 다양한 타입이 존재했다. 그와 같은 나라에 살았던 이폴리트 바야르와 영국의 폭스 탤벗은 종이를 이용한 ‘칼로타이프’를 발명했다. 다게르의 사진술도 독자적인 발명은 아니었다. 그는 역청을 바른 백랍판을 이용해 1826년 경 창밖 풍경을 찍은 발명가 니에프스의 사진술을 참고했다. 이들 이외에도 감광성 표면 위에 이미지를 정착시키려는 사진술을 고민했던 사람들은 많았다. 1790년부터 1839년까지 24명에 달했는데, <사진의 고고학>을 쓴 미술사가 제프리 베첸은 이들을 ‘원시 사진가’로 부른다. 그의 조사에 따르면 사진술의 기원은 특정할 수 없다. 다만 비슷한 시기에 사진을 향한 욕망이 여기저기서 출현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사진의 기원은 물론 단일한 사진의 정체성도 없다. 빅터 버긴, 존 탁 등 포스트모던 비평가들의 주장이다. 이들은 “의미는 맥락에 의해 결정되므로 사진 자체라고 할 만한 정체성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사진은 미술관에 걸리면 예술이 되고, 과학자의 진리를 뒷받침하고, 범죄의 증거가 되며,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보도사진이 된다. 따라서 그들은 ‘사진이 아니라 사진들’을 거론할 수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황규태 작가의 사진은 이러한 맥락에서 포스트모던하다고 할 수 있다. 황 작가는 “복사기도 스캐너도 모두 카메라”라고 말했다. 묵직한 독일 카메라로 찍어야만 작품 사진인 것은 아니다. 그는 빛에 반응하는 이미지를 움켜잡으려는 모든 장치들을 활용한다. 세기말에는 디지털 사진이 과연 사진인가라는 논란도 있었다. 하지만 디지털 사진 역시 사진의 맥락에 자리 잡을 수 있다. 필름 대신 센서에 닿은 빛에 대한 반응을 디지털 정보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는 인화된 사진조차도 디지털로 스캔하고 복원해 스마트 기기를 통해 바라보는 호모 디지쿠스가 아니던가.

 

흑백 Black and White ⓒ황규태,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호모 포토쿠스로서의 본격적인 삶은 1960년대에 시작됐다. 1963년 황규태는 경향신문사 사진기자가 된다. 이형록, 전몽각 등 걸출한 사진가들이 활동했던 현대사진연구회에도 몸담았다. 이 시절 남겨놓은 흑백 사진 중에는 초현실적인 장면들이 많다. 가장 대표적인 사진이 검정 원피스를 입은 여인을 찍은 사진이다. 그녀의 허벅지와 오른손은 프레임 밖으로 잘려 나갔다. 구도가 역동적이다. 초점은 흐리다. 앵글은 다소 높다. 그래서 우리는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다. 무릎을 구부리며 수줍게 인사하는 장면이라고 상상해보지만,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궁금증은 풀리지 않는다. 어떤 내용이었는지 떠오르지 않고 오로지 한 장면만 기억에 남아 있는 꿈속의 찰나 같은 느낌이랄까. 짝사랑에 빠진 사내의 개운치 않은 백일몽의 한 장면 말이다.

 

아메리칸 드림을 찾아 나섰던 것일까? 1965년 황규태는 미국으로 건너간다. 호모 포토쿠스로서의 정체성은 타국에서도 변하지 않았다. 컬러사진 현상소에서 돈을 벌었다. 기술자로 안주하기에는 호기심이 너무 강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실험정신으로 가득 찬 테라(tera)급 바이오칩이 심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황규태는 사진과의 놀이를 시작했다. 필름을 태우고, 오리고, 붙이고, 겹치고, 합성하고, 확대하고…. 정통 사진을 고수하는 사람들 눈에는 불경스러운 짓이었지만, 그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전위적이라며 ‘아방가르드’라는 예술 용어를 헌사했다.

 

버노그라피 Burnography, 녹아 내리는 태양, Melting the Sun (왼쪽) / 포토몽타주 Photo Montage, 크리스티나의 세계 Christina&lsquo;s World - 앤드류 와이어스 이후 After Andrew Wyeth ⓒ황규태,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버노그라피(burnography). 필름을 태워(burn) 만든 사진(photography)이라고 작명한 황규태의 사진술이다. 그가 원조는 아니었다. 1930년대 초현실주의 화가 라울 위박이 처음으로 흑백 필름을 태웠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황규태의 필름은 컬러였다. 컬러에서는 그가 원조라지만, 이제 기원이나 원조에 관한 이야기는 그만하자. 앞서 말했듯이 사진의 의미는 맥락에 의해 결정된다. ‘녹아내리는 태양(Melting the Sun)’은 태양을 찍은 필름에 열을 가해 뒤틀린 이미지를 인화한 사진이다.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사진을 가능하게 하는 빛의 근원인 태양을 불태운다는 아티스트로서의 실험 정신, 그리고 지구 온난화에 대한 우려감이다. 이즈음 그는 맥락이 다른 사진들을 합성한 몽타주 작품들도 내놓았다. 핵무기의 위험성과 문명 비판적인 메시지가 담긴 포토몽타주였다.

블로우업 Blow up ⓒ황규태, 고은사진미술관

블로우 업(Blow Up). 이것은 사진술이라기보다는 극단적인 크로핑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초기 흑백 사진들의 세부를 2000년대에 확대(blow up)한 작품들이다. 부인하는 작가들도 있지만, 사진가는 자기가 찍는 장면을 완벽하게 파악하며 셔터를 누르는 것은 아니다. 화가는 장님이라고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이야기했다. 그려야 할 대상을 바라보던 화가는 캔버스 위에 실제로 그림을 그리는 그 순간만큼은 실재의 대상을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는 사진에도 해당한다. 뷰파인더를 통해 피사체를 바라보던 사진가는 셔터를 누르는 순간에 셔터막이 닫히기에 피사체를 볼 수 없게 된다. 아주 짧은 찰나이기에 사진가들은 이를 체감하지 못할 뿐이다. 황규태 작가는 자기가 찍어놓고 몰랐던 사진의 부분들을 극단적으로 확대한다. 결과물은 그의 초기 흑백 사진과 마찬가지로 초현실적이다. 상체가 잘려 나간 한 여인의 걷는 모습은 오싹한 느낌이다. 한마디로 악몽이다.

 

사진의 세부를 현미경처럼 들여다보려는 욕망은 오래됐다. 발터 벤야민과 함께 ‘원시 사진비평가’라 부를 수 있는 지크프리트 크라카우어는 1927년 독일 신문에 실린 영화 스타의 사진을 보며 다음과 같이 썼다. “돋보기를 대고 들여다보면 그녀, 곡선, 호텔이 수백만 개의 작은 망점과 그리드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이미지는 망점들의 모자이크가 아닌 리도의 살아 있는 스타다.” 황규태 작가가 들여다본 것은 신문 사진이 아니라 TV 화면이었다. 루페(돋보기)를 통해 확대된 모니터의 세부는 반복되는 사각 무늬였다. 그는 모니터를 접사해 찍고, 그 결과물을 또 접사해 찍는 작업을 반복했다. 이렇게 확대를 반복한 끝에 목격한 픽셀의 어떤 이미지는 자기 머릿속에 심어진 바이오칩과 닮은꼴이었다.

픽셀 Pixel, 반복과 차이 Repetition and Difference - 질 들뢰즈 Gilles Deleuze. ⓒ황규태,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반복과 차이(Repetition and Difference)’. 철학자 들뢰즈의 말을 차용한 픽셀 사진의 제목이다. 차이는 반복을 통해 얻어지는 감각이라는 것인데, 기존의 사전적 단어 풀이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현대 철학의 논리이다. 반복되는데 어떻게 달라진단 말인가? 하지만 황규태의 픽셀 시리즈 사진을 본다면 들뢰즈의 사유를 짐작하게 한다. 힐끗 쳐다본다면 황 작가의 픽셀 사진은 반도체 형태가 동일하게 반복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꼼꼼히 들여다보면 반복되는 패턴에서 서로 다른 세부 형태들을 발견하게 된다. 단 한 번이라도 반복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단 하나의 이미지로서는 비교될 대상이 없기에 동일성이나 차이점도 따져볼 수 없다. 그래서 차이는 반복되어야 생성될 수 있는 것이다.

 

세부와 전체의 관계는 어떨까? 크라카우어는 ‘작은 망점들의 전체는 모자이크의 합이 아니라 살아있는 여배우의 얼굴’이라고 했다. 그에게 세부는 전체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황규태가 발견한 사진의 세계는 다르다. 이미지의 기본 단위인 픽셀이 그 자체로 하나의 형태로 나타난다. 반복되는 픽셀의 집합은 우연히 ‘하트(Heart)’ 모양이 되고, ‘육각형 생삭코드 그라데이션(Hex Color code gradation)’이 되며, 셜록홈즈 머리 모양이 된다. 황 작가는 셜록홈즈의 실루엣으로 나타난 픽셀 사진을 ‘게슈탈트(Gestalt)’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부분과 전체의 형태에 대한 감각을 뜻하는 독일어다.

픽셀 Pixel, 게슈탈트 Gestalt - 형태심리학 Configurationism (왼쪽) / 픽셀 Pixel, 육각형 색상코드 그라데이션 Hex Color code gradation ⓒ황규태,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황규태 작가의 근황을 물었다. 허리가 고장이 나서 치료를 받고 있다고 했다. 온종일 컴퓨터를 들여다본 결과였다. 그의 작업실에는 컴퓨터는 있지만, 카메라는 없단다. 그래서 20여 년 전, 그가 그렇게 말했던 거였다. 복사기도 스캐너도 모두 카메라라고. 요즘은 스마트폰으로 밤하늘의 별도 찍을 수 있는 세상이 아니던가. 무엇을 어떻게 찍느냐도 중요하지만, 도처에 넘쳐나는 사진들을 어떻게 바라보는지가 더 중요할 수 있다. 누군가 무심히 찍은 단 한 장의 사진 속에 우주의 모든 것들이 담겨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황규태라는 이름의 호모 포토쿠스는 그렇게 사진의 우주를 탐사하고 있다.

 

경향신문 / 김창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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