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가 유홍준씨를 비롯하여 서양화가 강요배, 류연복, 박흥순, 이인철, 이강군, 장경호씨 등 여러 명이 어울려 땅바닥에 술상을 차린 것 까지는 좋으나 제주에서 올라온 강요배씨는 술이 취해 땅바닥에 드러눕기까지 하였다. 안쓰럽게 지켜보던 장경호씨가 초코렛 한 조각을 전해주자 그걸 먹고 벌떡 일어나서는 힘자랑에 나선 것이다. 옆에 있던 가로등을 뽑겠다고 설치다 가로등이 꼼짝달싹 않으니 이젠 산비탈에 올라가 큰 소나무를 뽑겠다고 난리를 피웠다. 중국 심양에 사는 이강군씨가 걱정스러워 데려오긴 했으나, 직성이 풀리지 않았는지 씩씩거렸다.
천하의 강장사께서 술만 마시지 않았더라면 그까짓 가로등 쯤이야 간단히 뽑았겠지. 그러나 술 취한게 천만다행이야.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서 떠난 '용태형' 운구행열은 서소문 배제학당을 한바퀴 돌아 인사동으로 들어왔다. 오래전 문화운동의 본거지였던 '그림마당 민' 앞에서, 그 시절을 회억하는 유홍준선생의 이야기를 들어며 고인의 넋을 기리기도 했다. 그리고는 망자의 가게였던 '낭만'으로 자리를 옮겨 노제를 올렸다.
“용태 형! 기어이 가셨군요! 지난달 16일, 세월호가 침몰한 바로 그날 다시 병원으로 들어가면서 “난 이제 마음의 준비가 됐어요”라고 달관한 노스님처럼 말할 때만 해도 불사조 같은 용태 형은 아마도 일주일만 지나면 인사동에 다시 나타나 뒷골목에서 담배를 피우다 마주치면 “야, 이 사람 누구야”라며 반갑게 손을 내밀 줄로 알았답니다.
한달 조금 더 된 3월26일이었지요. 문화예술인 46명이 <산포도 사랑, 용태 형>을 내고, 선후배 화가 43명이 100여점을 출품해 ‘함께 가는 길’ 전시회를 열었던 바로 그날, 당신과 한생을 같이 살았던 사람들이 빠짐없이 모여 한결같이 “용태 형, 벌떡 일어나시오”라고 했을 때 “그래, 그래”라고만 답하면서 보내던 그 정감 어린 미소가 지워지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김용태’(사진)라는 인물이 누구인지 잘 모를 것이다. 그러나 미술, 문학, 연극, 춤, 가요에서 ‘민족’ 두 글자가 매김씨로 들어가는 민족예술판에서 그는 ‘용태 형’이라는 이름으로 통했다.
그는 민족예술의 마당을 일구어낸 큰 일꾼이었다. <현실과 발언> 창립회원(1979), 민중문화운동협의회 운영위원(1984), 민족미술협의회(민미협) 초대 사무국장(1985)이었고, ‘그림마당 민’ 초대 총무(1986), 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초대 사무처장(1988)이었다. 그 모두가 ‘초대’였고,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처리하는 심부름꾼이었다.
용태 형은 ‘맨날 똑같은 얘기를 하는 리론가’보다 바닥부터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을 사랑했다. 대토론회가 열릴 때면 그는 돌아다니며 재떨이 비우는 게 일이었고 뒤풀이에서 애창곡 ‘산포도 처녀’를 힘차게 부르는 것으로 자신을 말했다. 그는 언제나 인간됨이 우선이었고 우리의 따뜻한 서정을 잃지 않고 하나됨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이라 믿었다. 화가 강요배는 그의 이런 모습을 담은 <용태 형>을 그리기도 했다.
그는 현실을 떠난 예술, 민주적 당면 과제를 외면한 예술은 허울일 뿐이라며 민주화운동과 민족예술을 견고하게 묶어냈다. 1987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집행위원장, 백기완 대통령 후보 비서실장으로 격동의 세월을 온몸으로 살았다. 그해 6월항쟁과 뒤이은 민주화운동·노동운동·농민운동의 수많은 집회에서 춤, 노래, 걸개그림, 낭송시로 무대를 꾸밀 때면 언제나 그가 있었다. 화가 신학철 역시 그런 그의 모습을 <용태 형>으로 남겼다.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를 거치면서 용태 형은 온 정열을 통일에의 길에 바쳤다. ‘코리아통일미술전’ 남측 단장(1993), 6·15 공동선언 남측위원회 공동대표(2005)를 맡으면서 예술과 정치와 재야가 하나로 묶일 수 있는 연결 고리가 되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상임이사, 민예총 이사장까지 맡으면서 민주화와 민족예술에 온몸을 바치느라 정작 화가로서 남긴 작품이라고는 동두천 기지촌 여성과 미군 병사들의 사진을 모아 콜라주한 <디엠제트>(DMZ)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 백기완 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용태 형은 마땅히 들풀임을 살아왔다. 그의 삶, 그의 투쟁, 그의 역사가 곧 거대한 예술이 아니던가.”
용태 형! 어제 그제 사람들이 모여 이렇게 말하더군요. 참으로 잘 산 인생이라고, 당신과 한생을 같이 보내 따뜻했고, 너무도 고마웠다고, 그래서 많이 그리워하게 될 거라고 말입니다.
가슴 따뜻했던 서양화가 여 운의 유작전이 열린다는 신문기사를 보았다. 세월 참 빠르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일 년이 되었던가 보다. 그를 추억하며 술이라도 한 잔 나누고 싶었으나, 모두들 미망인 보기싫어 참석하지 않겠단다.
전시회 오라는 연락도 없었지만 여 운 그리워 들린 전시장을 보고 깜짝 놀랐다.
설마했는데, 모두 약속 한 것처럼 아무도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아는 분이라고는 백낙청, 유홍준, 이해찬, 이도윤씨 정도였으나 그마저 빠져 나가기 시작했고, 단상에는 황석영씨가 나와 고인의 술버릇을 이야기하며 여운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여 운과는 인사동에서 만나 술은 마셨지만, 자택에 간 적이 없어 미망인을 잘 몰랐다.
주변의 이런 저런 좋지않은 얘기들이 들렸으나, 여 운이 악처를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했다. 그렇게 친구 좋아하고 술 좋아하는 친구가 집에서 잘 하기란 기대할 수 없었던 터다. 대개 남자가 착하면 여자는 독해지기 마련인데, 오죽하면 오여사가 “병상에서 비로소 지아비로 돌아왔다”고 말했을까?
그러나 일년 전 여운이 세상을 떠나던 날, 장례식장에 입고 나온 미망인의 옷을 보고 의아한 적은 있었다.
갈색 외투와 무늬 있는 목도리를 걸치고 나왔는데, 상주의 복장치고는 좀 낯설었다.
여운을 만난지는 10여년 밖에 되지않았다. 인사동에서 김용태씨 소개로 처음 알게되었는데,
동년배인데다 소탈한 그의 모습에 호감이 갔다. 서로 인사동을 떠돌아 다녔으나 인연이 늦게 맺어졌던 것이다.
그 뒤부터 만나기만 하면 술을 샀는데, ‘산타페’에서는 아예 양주병을 맡겨두고 술을 마셨다.
그는 정이 너무 많은 친구였다. 벌이도 없는 내 처지가 안스러운지 만나기만 하면 걱정했다.
“사돈 남말 하네”라며 웃고 넘겼지만, 때로는 그의 마음 씀씀이에 코끝이 찡할 때도 있었다.
몇 년 전 대학로에서 그를 우연히 만난 적이 있다. ‘사람’이란 주제의 사진기획전 협의를 위해 '사진협회'에 들려 오다, 그를 만난 것이다.
복잡한 내부사정을 듣고는 '문예진흥원'으로 나를 데리고 간 것이다.
당시 김정헌씨가 이사장으로 있을 때라 기획안이 좋으니 한 번 부탁해 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모든 일은 절차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말을 꺼내지 못하게 했다.
나보다 더 안타까워하던 그 때의 모습이 자꾸만 떠오른다.
그렇게 가슴 따뜻하고 마음여렸던 친구가 이제 세상을 떠나고 없는 것이다. 친구를 좋아했던 여운이었기에 넋이라도 전시장을 찾았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인사동의 그 많은 친구들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망자에 대한 배려보다는 살아있는 자들의 이기주의적 처신들이 너무 안타깝고 슬펐다. 행사장을 기록하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지만 마지못해 찍은 사진마저 촛점이 흐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