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비엔날레의 최초의 도전
 
지금의 휘트니비엔날레 전신은 휘트니미술관이 1932년에 처음으로 미국의 젊은 작가들을 발굴해 소개하기 위해 시작했던 연간행사(따라서 명칭은 휘트니 애뉴얼)였다. 좀 더 탄탄한 기획을 위해 1973년부터 격년제 행사로 바뀌며 휘트니비엔날레가 된 것. 하지만 지금의 명성을 얻게 된 건 1993년 미술사적으로 의미 깊은 문제적이고 정치적인 비엔날레를 개최하면서부터다. 그 후로 20여 년간 휘트니비엔날레는 그 기대를 충족시키기도 하고 실패를 하기도 하면서 꾸준히 운영돼 왔다. 이제 이 비엔날레의 역사에 또 한 번의 전환이 이뤄지게 된다. 지금의 어퍼이스트사이드 지역을 떠나 첼시로 공간을 옮겨, 새 건물에서 2015년 그랜드오픈을 예정에 두고 있는 것. 이번 2014휘트니비엔날레(3.7 - 5.25)는 업타운 건물에서 열리는 마지막 비엔날레인 셈이다.

이 기념할만한 비엔날레를 위해 휘트니측은 항상 미술관의 스탭으로 운영하던 비엔날레 형식을 깨고 외부 큐레이터의 힘을 빌려보기로 했다. 게다가 3명의 큐레이터가 각각 미술관의 한 층씩을 맡아 큐레이터끼리의 별다른 소통 없이 독립적으로 작가를 선정해 전시하는 방식이다. 일단 이 영리한 시도의 효과는 일석삼조. 한 비엔날레에 세 개의 전시를 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 각 전시의 담당자는 미셸 그래브너(Michelle Grabner), 스튜어트 코머(Stuart Comer), 앤소니 엘름스(Anthony Elms).

 

그래브너는 아트인스티트튜트오브시카고와 예일대에서 교편을 잡는 동시에 개념미술과 회화 작가로 활동한다. 그래브너가 이번 전시에 주력한 부분은 여성 추상미술작가와 개념미술의 새 방법을 제시하는 작가를 추리는 것이었다. 한 층에 52명의 작가를 모은 통에 다소 어수선해졌으나 좋게 보자면 그만큼 볼거리가 풍성하다. 두 면에 바느질한 추상 캔버스를 선보인 도나 넬슨(Dona Nelson) 등 기획자의 의도에 걸맞은 여성 추상회화작가에 주목할 만하다.

3층을 담당한 코머는 얼마전 모마로 자리를 옮기기 전엔 런던의 테이트미술관에서 필름비디오아트의 큐레이터로 일했다. 그가 이번 전시기획에 초점을 맞춘 부분은 혼종성을 이용하고 드러내는 작업들로 참여작가는 27명이다. 대쉬 맨리(Dash Manley)의 트레일러 사이즈로 제작돼 걸어 다닐 수 있도록 한 나무와 철판 구조물이 전시의 시작을 연다. 화가이자 글작가이기도 한 에텔 아드난(Etel Adnan)의 아코디언처럼 펼쳐지는 노트에 기록한 풍경화는 한 편의 시같다. 

엘름스는 필라델피아의 현대미술관(ICA)의 큐레이터이자 평론가, 작가다. 미술과 문학, 음악 등과의 관계를 정의하는 전시를 꾸렸다. 본격적인 태도로 크로스오버를 구현하는 것으로 참여작가는 총 24명이다. 작곡가 샬레만 팔레스타인(Charlemagne Palestein)의 소리설치를 층계참마다 설치한 시도가 있었다. 개리 인디애나(Gary Indiana)는 소설가와 연극감독 등을 겸업하는 작가로 그의 활동반경 자체가 하이브리디티와 크로스오버를 대표할만하다 하겠다. 

각 층을 쭉 살펴보면서 감지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층마다 다른 이가 기획한 완전히 다른 전시지만, 결국 세 전시 모두 다양한 장르를 예술의 이름하에 통합하는 시도와 지역과 장르의 혼종성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성격을 갖고 있는 것이다. 결국 휘트니비엔날레가 업타운의 마지막 전시를 통해 말하고 있는 바는 통합과 수용의 메시지가 아닐까. 그 메시지를 극대화하기 위해 결국 세 명의 외부기획자에 의한 세 개의 전시가 필수불가결한 요소였던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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