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재단(이사장 최열)에서 개최한 ‘글로벌 에코캠퍼스’ 설립을 위한 기금 마련 전 “아이 러브 에코(I LOVE ECO) 작가전”

개막식이 지난 21일 오후4시30분 ‘인사아트센터’5층 전시장에서 열렸다.


신학철작

글로벌 에코캠퍼스는 국내외 정부, 기업, 시민사회, 전문가를 잇는 환경운동의 거점을 목표로 서울 종로 누하동에 들어설 예정이다.

건축가 승효상씨가 설계·건축을 맡아 내년 겨울 완공을 목표로 추진 중이라 한다.



김정헌작


이번 전시에는 김정헌, 민정기, 신학철, 심정수, 이종구, 이철수, 임옥상, 황재형씨 등 우리나라 민중미술의 거목들이 대거 참여하였으며,

음악인, 평론가, 갤러리스트 등 문화예술계 인사 14명이 자신이 제작했거나 소장한 미술품 48점을 내놓았다.


임옥상작


작가 임옥상씨는 신작 ‘세상의 물이 되어' 2점을 출품했으며 민정기씨도 신작 ‘수성동'을 선보였다.

그 외에도 가수 장사익씨의 서예작품을 비롯하여 나전칠기 명인 김영준, 임창열, 오치균, ‘평화의 소녀상' 조각가 김운성, 김서경부부 등

많은 작가들이 출품하였고 ’갤러리 현대‘ 박명자 회장과 미술사학자 유홍준 교수는 각자 소장품을 내놓기도 했다.



인사말하는 최열 이사장


개회사에서 최열 환경재단 이사장은“환경과 문화, 예술이 결합이 되어서 물질적인 욕망을 문화로 전환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 관심을 갖고 있는 많은 분이 함께 하고 시민이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인 글로벌 에코캠퍼스를 만들고자 한다고 전시 취지를 밝혔다.


공동추진위원장 유홍준씨가 인사말을 하고있다.


전시 추진 공동위원장인 유홍준씨는 “ 많은 작가들이 호응해줘 잘 진행할 수 있었다”고 말했고,

또 한분의 공동위원장인 임옥상씨는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고 했다.


공동추진위원장 임옥상씨가 인사말을 하고있다.


그 외에도 신학철, 심정수, 민정기, 장사익, 이종구, 임진택, 박재갑, 서명숙, 김종규, 김운성, 김서경씨 등

많은 분들이 성황을 이루었다.


민정기작


이 전시는 26일까지 열린다.

사진,글 / 조문호

황재형작

이철수작

이종구작

장사익작

김창열작

오치균작

심정수작







































물이 줄고 흐르지 않아 얼음이 꽁꽁 언다오
많은 인부들이 떠낸 얼음 짝 강 위에 산같이 쌓이니
강 위에 놓인 두 빙고의 얼음더미가 십리만큼 서로 바라다 보이는구나

水渴不流氷大至于是
斬氷萬夫出鑿之如山江上
置江上兩氷庫相望十許里

-김창흡,「벌빙가(伐氷歌)」,『삼연집(三淵集)』

 

강세황, 서빙고, 1784, 종이, 49×64㎝, 조선미술박물관 소장


지금 서빙고동 옆 동빙고동은 서빙고의 동쪽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그렇게 불렀을 뿐, 실제의 동빙고는 옥수동에 있었다. 동빙고(東氷庫), 서빙고(西氷庫)는 모두 관청에서 운영하는 관설빙고였고 이에 대응하여 민간에서도 얼음 창고를 운영하였다. 별도의 기록이 없지만 많을 때는 30여 개의 사설빙고가 즐비하였고 아마도 이게 지금의 동빙고동에 몰려 있었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1786년 얼음 창고 업자들의 조합인 빙계중(氷契中)에서 사설빙고를 모두 없애고 8개만을 남겨두었다. 이에 따라 장안의 얼음 값이 폭등하여 창고업자들은 폭리를 취하였고 얼음이 필요한 어물(魚物) 상인들은 재앙을 당하는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유사 이래 최초의 빙고사건이라 이를만한 사건이었다.

동빙고의 얼음은 종묘와 사직의 제사 때만 사용했으므로 규모도 매우 작았지만 서빙고의 얼음은 궁궐부터 주요 관청에 공급했기 때문에 동빙고 규모의 8배 가량이 컸고 저장하는 얼음의 규모는 무려 13배나 많았다. 관리하는 관원의 숫자도 동빙고는 10명이었지만 서빙고에는 40명을 배치해 두었다. 하지만 그 의미로는 종묘와 사직의 제사가 훨씬 중요했으므로 동빙고 쪽에 사한단( 司寒壇)을 설치해 두고 얼음과 관련한 제사(祭祀)를 올렸다. 그러나 동빙고건 서빙고건 그 일대에 부군당(符君堂)을 설치하고 귀중한 얼음 창고를 지키려 했던 건 마찬가지였다. 

 

해동 강서시파의 한 사람인 성현(成俔, 1439-1504)은『용재총화(傭齋叢話)』에서 얼음 창고 운영에 대해 자세히 써 두었는데 한강 물이 네 치의 두께로 얼면 대규모 군인들이 파견을 나와 얼음을 채취하였다. 이미 여름에 오리섬[鴨島*난지도 또는 저자도]의 갈대를 수도 없이 베어다 창고 안 바닥과 천정, 사방 벽을 온통 막아두는데 볏짚과 솔가지를 포함하여 저 갈대는 창고 안의 온도를 유지시켜 녹지 않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강변에 장작불을 여기저기 피워놓고 침몰과 동상에 대비하였고 의약품과 의원들도 갖추어놓았다. 얼음 채취를 말하는 벌빙(伐氷)은 칡으로 꼰 새끼줄을 얼음 위에 깔아 두고 미끄러지는 것을 막기도 하고 또 끌어당기기도 하며 이뤄졌는데 그렇게 많은 군인들이라고 해도 쉽지 않았으므로 인근 익숙한 민간인들이 캐낸 얼음을 구입해서 할당량을 채우기조차 했다. 얼음 채취 기간은 아주 짧았다. 녹아버리기 때문이었는데 그 짧은 몇일 동안의 저 풍경은 얼음판 위로 펼쳐지는 기이한 장관이었다. 
서빙고 땅은 세조가 대군시절 꿈을 키운 요람이었다. 나루터 위쪽 강변에 창회정(蒼檜亭)이 있는데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이곳에 자주 놀러와 머물곤 했다. 어느 때인가 여기서 권람(權擥, 1416-1465)이란 인물을 만나 신임하였는데 권람이 한명회(韓明澮, 1415-1487)를 소개하여 이들의 지략으로 끝내 왕위에 등극할 수 있었으니 이곳 서빙고는 세조에게 특별한 땅이었다. 그래서 왕이 된 뒤 창고 앞쪽 강변 모래사장이 펼쳐진 곳에서 군대의 훈련 상태를 점검하는 열병(閱兵)을 여러 번 되풀이 하였다.

빙고사건이 일어나기 두 해 전인 1784년 3월 어느 날 강세황이 그린 <서빙고>는 서빙고 앞 나루에서 있었던 모임을 그린 작품이다. 험준한 모습의 남산을 빼고는 모두 편안하기 그지없는 풍경이다. 언덕의 기와집이며 분지에 옹기종기 모인 초가지붕들, 그 사이에 너울대는 버드나무가 평화롭다. <벌빙가(伐氷歌)>를 지어 그 모습을 노래한 시인 김창흡(金昌翕, 1653-1722)의 시대에도 얼음 채취의 장관은 그처럼 평화로웠을 거다.



 

십 년 만에 다시 삼청동에 이르니
푸르른 숲 사이 한 줄기 물소리
산천은 옛모습 그대로지만
풍류는 지난 날 그 정 그대로 아닌 것을


十年今復到三淸
萬綠林間一水聲
可奈山川依舊觀
風流非復昔時情

-장지연(張志淵),「삼청동(三淸洞)」,『장지연전집』

 

 

미상, 옥호정도, 19세기, 크기 미상, 개인 소장


황산(黃山) 김유근(金逌根, 1785-1840)은 삼청동 133-1번지 일대에 널따란 집터를 마련하고 집을 지었다. 이곳은 종로구 삼청동 백련봉(白蓮峯)아래 삼청공원 길 건너편 백악산 동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누가 그렸는지 모르지만 <옥호정도(玉壺亭圖)>를 보면 상단에 백련암이 있고 하단 오른쪽에 냇물이 흐르는데 그 지형으로 미루어 삼청동천(三淸洞川)이다. 삼청동천은 백악산 동쪽 기슭에서 시작해 금융연수원 앞으로 해서 지금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과 동십자각을 지나 미국대사관과 종로구청 사이를 지나 교보문고 뒷길을 빠져 청계천으로 흘러드는 기나긴 하천이다. 지금 삼청동천은 시멘트로 뒤덮인 채 길 아래 굴이 되어버린 복개천이어서 겉으론 흔적조차 없다.

삼청동 일대는 워낙 바위가 많아 계곡이 발달했고 우물도 많다. 칠성당에 제사를 올릴 때 퍼올리던 성제(星祭)바위 아래 성제우물, 병풍바위 밑 양푼처럼 파인 양푼우물과 칠성에 제사 지내던 백련암, 영월암(影月岩), 기천석(祈天石), 말바위, 민바위, 부엉바위 그리고 바위와 물길이 어울리는 동간(東磵)과 서간(西磵), 영수곡(靈水谷), 운장곡(雲藏谷)이 즐비한 곳이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한양 도성의 명승 가운데 제일경으로 손꼽았던 게다.

김유근은 이곳 옥호정에서 김좌근(金左根, 1797-1869)과 더불어 사족 예원집단 백련사(白蓮社)를 경영했다. 백련사는 아버지 김조순(金祖淳, 1765-1831)의 벗들인 김이양(金履陽, 1755-1845), 이명오(李明五, 1750-1836), 김이교(金履喬, 1764-1832), 이복현(李復鉉, 1767-1853), 김려(金鑢, 1766-1821)와 같은 당대 사족 문인집단으로 이들은 대체로 당대 예원맹주 신위(申緯, 1769-1847)와 동료들이다. 이 백련사는 문예집단의 활력이 중인예원으로 옮겨가던 시절, 사족예원 최후의 집단이었으며 바로 저 <옥호정도>는 백련사의 보금자리가 어떠했는지를 알려주는 풍경화다.

<옥호정도>는 하나의 정자인 옥호정만 그린 게 아니다. 옥호정이 포함된 집터 전체와 북쪽으로는 백련봉, 동쪽으로는 삼청동천을 그린 지도인 셈이다. 김유근이 별세한 뒤 그 집이 황량해짐에 따라 이 땅은 1960년대까지 아주 오랫동안 ‘황산(黃山)터’라 불렸다. 그래서 이 터가 김유근의 집터로 알려졌지만 사실 첫 주인은 김유근의 아버지이자 세도정권의 집정자 김조순이다. 그가 김유근에게 물려준 땅인 것이다.

그보다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이 땅의 주인은 다른 이였던 것 같다. 이 땅의 진산인 백련봉은 그 모양이 흰[白] 연꽃[蓮] 같다고 해서 그렇게 부르는 데 백련봉 아래 쪽에 바위벽이 있고 그곳엔‘영월암(影月岩)’이란 커다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달빛 그림자 비치는 바위란 뜻인데 이 글씨는 청백리(淸白吏)로 만년에 벼슬을 마다하고 학문에 탐닉하며 살아간 은자 연봉(蓮峯) 이기설(李基卨, 1558-1622)이 새겼다고 한다. 이기설의 아호인 연봉도 바로 저 백련봉에서 따 온 것으로 그는 도시에서 사는 은일지사였다. 그러니까 이 땅의 주인은 아무래도 이기설이 아닌가 한다. 

장지연(張志淵, 1864-1921)은「유삼청동기(遊三淸洞記)」란 글에서 “삼청동 골짜기는 바위와 비탈이 깎아지른 듯 나무도 그윽이 우거진 속으로 높은 데서 흐르는 물이 깊은 연못을 짓고 다시 물은 돌바닥 위로 졸졸 흘러 이곳저곳에서 가느다란 폭포를 이루며 물구슬마저 튀기곤 하여 여름철에도 서늘한 기운이 감돌아서 해마다 한여름이면 장안의 놀이꾼 선비는 말할 것도 없고 아낙네들까지도 꾸역꾸역 모여들어 서로 어깨를 비빌 만큼 발자국 소리도 요란하였다.”고 했다. 그러니까 장지연이 살던 1921년 이전까지 삼청동은 도시의 계곡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고 사회가 해체되는 가운데 삼청동에 살림집이 들어앉기 시작했고 이제는 그 풍경까지 사라지고 말았다. 지금 삼청동은 음식점과 옷가게 천지라 문예와 풍류는 커녕 잡동사니 시장터다.





 

한 구비 시냇물은 말고 얕은데 一曲溪流淺
삼경이라 달 그림자 저물었구나 三更月影殘
손님네 어서 와서 옥피리 불어라 客來吹玉篴
홀로 서서 추위를 이기지 못하니 獨立不勝寒

- 정도전(鄭道傳),「 매화를 읊다[詠梅]」,『 삼봉집(三峰集)』

 

 

정선, 백악부아암, 종이, 39.4×23cm, 개인 소장


경복궁 뒤쪽에 우뚝 솟아오른 백악산(白岳山)의 행정 지명으로는 북악산(北岳山)이다. 그래서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의 『서울지명사전』이나 국토지리정보원의 『한국의 산지』에서는 북악산만 있을 뿐 백악산은 찾아볼 수가 없다. 그 이름은 백악(白岳, 白嶽), 북악(北岳, 北嶽), 면악(面岳) 또는 공극산(拱極山)이라고 불렀는데 『동국여지승람』이나『 문헌비고』,『 한경지략』에서 섞어서 썼으면서도 주로는 백악이라 했다. 나는 백악이란 낱말이 좋다. 역사성도 그렇지만 백악이라는 낱말이 풍기는 소리 느낌이 좋아서다.

백악산은 고려시대 이래 왕의 기운[王氣]이 서린 땅으로 알려졌고 실제로 태조 이성계가 이 산 아래 도읍했다. 지금 광화문 앞 세종로라 부르는 육조대로 네거리에서 보면 뾰쪽한 모습이 너무도 신기하다. 그런데 네거리의 고종황제 칭경기념비각 → 이순신장군 동상 → 해치상 → 광화문 → 청와대 → 백악산이 직선으로 올곧지 않다. 이렇게 중심축을 조금 틀어놓은 까닭은 불의 산인 관악산 불덩이가 경복궁에 미치지 않도록 처음부터 그렇게 설계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틀어 놓고 보니 광화문이며 청와대 지붕은 물론 세모진 백악산 모습이 훤히 잘 보인다. 그러고 보면 불기운을 방어하는 까닭도 있겠지만, 시야를 가리지 않고 자연과 인공이 조화를 이루도록 설계한 게 아닌가 싶다.

천년왕국 도읍 한양의 진산이자 경복궁의 주산인 백악산은 높이 343.4m의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세월이 흐르다 보니 여기저기 나무들이 자라서 푸른 빛을 갖추고 있지만 들여다보면 여전히 화강암 덩어리다. 아마도 수수만년 전에는 흰 산이었을 게다. 실제로 산의 서쪽은 흰 바위 속살을 드러낸 채 가파르게 기운 절벽이다.

북악산의 남쪽에는 주로 소나무를 심었다. <동궐도>나 옛 그림들에 소나무 숲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 그렇다. 소나무는 참나무와 같은 활엽수와 나란히 심지 않는다. 함께 있으면 이기지 못하므로 소나무만 따로 심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일제가 1930년대에 소나무를 대량으로 베어내 버렸고 그 뒤로 갈참나무, 굴참나무와 같은 참나무 숲으로 뒤바뀌고 말았다.

북악산 북서쪽 부암동 54번지 일대는 400년 전 개성에서 가져온 능금 씨앗을 뿌려 능금나무 단지를 만들었던 장소가 있다. 창의문에서 북악산길로 가다 보면 아래쪽이다. 이곳의 토질이 미사토여서 능금이 잘 자라는데 궁궐 수라간에 공급하기 위한 것이었다. 처음엔 그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지만, 뒷날 무려 40만 평이나 되는 거대한 능금 과수원이 조성되었다고 한다. 신기한 건 이곳 능금나무는 다른 곳으로 이식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왕의 기운이 서린 백악산에서만 가능했던 왕의 능금이었던 셈이다. 북악산 동남쪽에는 갈참나무, 아카시아, 벚나무가 울창한데 1930년대 소나무 숲 제거사건으로 그렇게 바뀌고 말았다. 하지만 충청도 세종시로 내려가기 전까지만 해도 국무총리가 사용하던 삼청동 공관 터에는 오래된 등나무, 측백나무가 자라고 있다. 천연기념물인 이들 나무 가운데 등나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나무이고 측백나무는 대체로 키가 작은데 이 나무만은 유난히 그 높이가 11m나 되어 가장 크다. 이 역시 왕의 기운을 한껏 받아 그런 것일 게다.

북악 일대는 한양 명승지가 모여있는 땅이다. 산은 작아도 깊은 땅이어서 서쪽 궁정동엔 대은암, 맷돌바위, 병풍바위가 만리뢰, 박우물을 거느리고 있고 또 동쪽 삼청동엔 기천석, 말바위, 민바위, 부엉바위, 영월암과 같은 바위며, 성제정, 양푼우물, 영수곡과 같은 우물이 즐비하다. 그러므로 『동국여지비고』에서 백악 기슭이야말로 산 맑고[山淸] 물 맑고[水淸] 사람까지 맑아[人淸]세 가지가 맑은 삼청(三淸)이라 했던 게다. 조선시대로 말하자면 왕인 오늘의 대통령 또한 그렇게 맑은 곳에서 맑은 기운으로 맑게 다스리길 간절히 소망한다. 태조와 더불어 천년왕국의 설계자였 던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이 매화 보며 읊조린 노래처럼 당신 홀로 외롭지 않기를 말이다.

 

 
글 / 최 열


그림의 뜻 / 정선 - <백악산>

​최 열 / 인물미술사학회 회장

산새는 울음 그치고 꽃은 져서 날아간다 山禽啼盡落花飛
나그네는 못가도 봄은 벌써 가버렸지 客子未歸春巳歸
갑자기 남녘 바람 정을 불러 일으키니 忽有南風情思在
뜰을 휩쓸어라 고운 풀 우거졌네 解吹庭草也依依

 

- 정도전(鄭道傳), 「사월초하루」, 『삼봉집(三峰集)』

                                      정선, 백악산, 종이,44×33.5cm, 개인 소장


정선은 백악산을 여러 폭 그렸는데 이 작품 <백악산 취미대>는 취미대가 아니라 백악산 전경을 그린 작품이다. 우뚝 솟은 백악의 위용이 대단한데 하단을 받쳐주는 구름 물결이 좌우로 장강처럼 흐르니 마치 하늘에 뜬 산처럼 보인다. 재미있는 것은 구름 물결 아래 검푸른 숲이다. 경복궁 북쪽 담장쯤일 터이다. 그렇게 경복궁을 감춰두고 구름 물결 위쪽에 가파르게 취미대 터를 배치함으로써 이 땅이 신비한 장소임을 드러내고 싶어 했던 모양이다. 실제로 이 백악산에는 백악신사(白岳神祠)만이 아니라 저 삼각산의 신령까지 모시는 삼각신사(三角神祠)까지 자리하고 있었으므로 신령스런 땅이었다.

그림에 구름 물결 흐르는 장소는 오늘날 청와대 터다. 이 땅의 내력은 다음과 같다. 이 터에 처음으로 궁궐이 들어선 때는
『고려사』에 나오듯이 고려 숙종 6년째인 1101년 9월 남경(南京) 궁궐을 개창하면서이다. 그때 이곳을 답사한 신하들은 다음처럼 아뢰었다.
“저희들이 노원역, 해촌, 용산에 가서 산수를 살펴본 즉 도읍을 정하기에 합당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삼각산 면악(面嶽)의 남쪽 산수 형세가 옛 문헌의 기록에 부합되오니 청컨대 삼각산 주룡의 중심 지점인 남향관에 그 지형대로 도읍을 건설하소서라고 하니 왕이 좋다고 하였다.”(『고려사』, 숙종 6년 10월)

그러니까 지금 청와대가 들어앉은 자리는 고려 남경궁궐 터인 셈이다. 그렇게 300년을 내려오다가 조선을 개창한 태조 이성계가 천도를 위해 권중화(權仲和)로 하여금 궁궐터를 조사하라고 하였더니 『태조실록』 1394년 9월에 아뢰기를 고려 때의 남경 궁궐터가 너무 좁으므로 그 남쪽으로 내려와 개창할 것을 아뢰었고 그렇게 해서 건설한 것이 바로 오늘의 경복궁이다. 이렇게 되자 남경 궁궐터를 후원(後苑)으로 삼아 여러 정자를 지었고 또 상림원(上林苑)을 두어 기화요초를 기르는 식물원으로 가꾸었다. 또한, 농번기 때면 왕과 왕비가 친히 이곳에서 모심기하는 친경(親耕)의 현장이었으며 대원군 때는 후원 둘레에 담장을 설치하고서 문무 대과를 치르는 시험장소로 사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1910년대까지만 해도 호랑이가 출몰하였으므로 ‘금호방(禁虎榜)’이라고 쓴 팻말이 붙어 있어 민간인의 출입이 자유롭지 않은 곳이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기간 내내 그러한 땅이었다가 1939년 9월에 접어들어 이곳에 조선총독 관저가 들어섰다. 경복궁을 헐어내고 1926년 조선총독부를 완공한 때로부터 무려 14년이나 지난 뒤인데 그때까지 총독관저는 남산 밑 필동 2가에 위치한 화장대(和將臺)였다. 조선총독은 이곳 관저로 이주해 오면서 건물 이름을 경무대(景武臺)라고 불렀다. 경무대는 지하 1층, 지상 2층으로 철근콘크리트에 백색 타일을 발랐는데 무엇보다도 지붕이 광채 나는 청색(靑色)으로 아주 먼 거리에서도 그 색깔이 눈에 띌만했다고 한다.

6년이 지난 1945년 해방이 되고 9월 미 군정이 시작됨에 따라 군정장관 Hodge 중장,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더불어 이승만 대통령이 차례로 사용했다. 일본인 통치자가 사용하던 이름인 경무대라는 이름을 청와대(靑瓦臺)로 바꾼 것은 4·19혁명 이후 윤보선 대통령이다. 물론 이 건물은 1993년 10월 철거해 버렸고 지금의 청와대 건물은 1992년에 지은 것이다. 고려 숙종이며 조선 태조는 물론 일제 총독, 미 군정 장관, 대한민국 대통령이 그 땅과 그 건물의 주인이라고 하지만 시대가 바뀌고 세월이 흐르면 모두 이슬처럼 사라지고 만다. 오직 유구한 것은 저처럼 우뚝한 산, 백악의 자태요, 흐르는 구름일 뿐. 요즘 남녘 바다 세월호의 비참으로 힘겨운 나날인데 정말이지 청와대가 평안하기를 소망하며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이 「사월초하루」에 불렀던 슬픈 노래 읊조린다 .

춤추는 허리마냥 가늘다 하더니 皆言舞腰細
푸른 눈썹이 길다 또 일러주네 復道翠眉長
만약 한번 씽긋 웃어 준다면 若敎能一笑
남의 애를 끊는다 알만도 하지 應解斷人腸

- 정도전(鄭道傳), 「버들 노래[詠柳]」, 『삼봉집(三峰集)』


 

엄치욱, 백악산, 종이, 39×28cm, 간송미술관 소장



조선의 진산(鎭山)이자 한양성곽의 주산(主山)인 백악산을 그린 화가는 훨씬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남아 있는 백악산 그림은 정선(鄭敾, 1676-1759), 김윤겸(金允謙, 1711-1775), 정황(鄭榥, 1737-19세기 초), 김득신(金得臣, 1754-1822)과 엄치욱(嚴致郁, 1770 무렵-?) 이렇게 다섯 화가의 작품 뿐이다. 그 가운데 가장 빼어난 작품은 김윤겸이 그린 것이다. 산의 양쪽에 날개를 달아 둔 것처럼 광활하게 펼쳐나가는 형상이어서 훨씬 장엄해 보이고 또 하늘 여백엔 글씨로 꽉 채워 조형의 맛을 크게 살리고 있는 까닭이다. 하지만 다른 화가들의 백악산은 본래의 생김새인 삼각형에 충실하여 웅장하되 단아한 모습을 보여주는 데서 멈추고 있다.


엄치욱의 <백악산>은 다섯 작품 가운데 가장 곱고 아름답다. 그가 이처럼 부드럽고 곱게 그릴 수 있었던 까닭을 생각해 보면 백악산을 그리기에 앞서서 세상에 널리 소문난 바처럼 그 산의 모습이 활짝 펴기 직전 한껏 부풀어 올라 곧 터질 것만 같은 모란꽃 봉오리와도 같다는 이야기를 충분히 새겼음을 알려준다. 실제로 봉우리를 왼쪽으로 치우치게 배치하고 한쪽은 가파르게, 한쪽은 굴곡의 깊은 맛이 솟구칠 듯 가파르면서도 완만하게 처리하였다.

또 두툼한 산 주름이 꿈틀거리면서 휘어지듯 반복함에 따라 마치 살아 있는 기운이 샘솟는다. 그리고 태점(苔點)을 전면에 흩뿌리듯 찍음으로써 눈 내리듯, 잎이 날리는 듯 활기가 넘치는데 무엇보다 듬성듬성 자리하고 있는 바위와 나무숲이 저 태점과 어울려 변화의 울림을 크게 북돋운다. 끝으로 이 그림이 다른 백악산 그림과 다른 점은 능선 양쪽에다가 성곽을 띠처럼 그려넣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해서 이 산이 한양을 수호하는 주인임을 천명하고 있다. 유본예는 『한경지략』 「백악(白嶽)」에서 다음처럼 찬양했다.

“도성 북쪽에 있다. 평지에 솟아 있다. 경복궁이 그 밑에 있고 서울을 둘러싼 여러 산 가운데 이 산이 정북을 가로막았다. 개국 초기에 궁궐을 짓고 이 산을 진산으로 한 것이 잘 되었다.”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 한성부의 「면악(面嶽)」에서는 고려 숙종 때 이곳을 조사한 기록을 보면 백악산이야말로 산형수세(山形水勢)가 옛글에 부합한다고 지적하고 바로 이곳 백악산이야말로 주류골간의 중심지로 남쪽을 향하는 곳이니 이러한 형세에 따라 도읍으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견해를 따른 이는 태조 이성계였고 그의 왕국은 오백 년 성세를 누리기에 이르렀으며 그 뒤로도 일백 년을 훨씬 넘겨 지금에 이르기까지 수도의 위용을 과시하는 중이다.


왕기(王氣)를 뿜어내는 백악산의 기운을 조절하는 백악신사(白嶽神社)가 고종 때인 1863년 이후 편찬한 『동국여지비고』에도 기록되어 있듯이 오백 년 동안을 존재해 왔다. 아마도 그 신사의 주인인 정녀부인(貞女夫人)이 그곳에 머무르며 백악의 기운을 모란꽃처럼 곱디곱게 다스린 건 아니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1863년 이후 언젠가 신사를 철폐하고부터 왕국은 난국에 빠졌다. 흥미로운 사실은 여신이 다스리는 산악이라서였던지 풍기(風氣)를 어지럽히는 자들이 침범하곤 했다. 1461년 그러니까 세조가 조카 단종을 폐위시키고 끝내 죽여버린 뒤 세상인심이 들끓는 가운데 이곳 백악의 곳곳에서도 흉흉한 기운이 끊이질 않았다. 한성부의 단속에도 불구하고 매일 밤 불을 켜 촛불시위 하듯 하는 스님이 그치질 않았으며 그 거점인 초암(草庵), 굴암(窟庵)이며 또한 연산왕을 쫓아내고 왕위에 오른 중종 때인 1508년에도 높고 깊은 바위가 있는 밀덕(密德)에서 양반집 부녀나 잡인들의 질탕한 놀이인 유연(遊宴)을 펼쳐대곤 해서 이를 금지하는 조처를 내리기까지 하였다. 그 놀이는 천년왕국을 설계했던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이 보고 읊었던 「버들 노래」 풍경 같은 것이었을까. 모를 일이다.


 

그림의 뜻 /  <장동김문 세거지>

봄이 다 가도록 마을에 찾아오는 사람 없어 經春門巷斷來尋
버들 꽃이 다 떨어진 한 정원은 깊숙하네 落盡揚花一院深
주렴 밖에 해 높을 때 잠에서 막 깨어나니 簾外日高初睡起
건너편 숲 꾀꼬리가 맑은 소리 보내오네 隔林黃鳥送淸音

- 김상헌, 「봄이 다 지나간다[經春]」,『 청음집(淸陰集)』 제 2권

                                                    작자미상, 장동김문 세거지-청풍계첩 중, 1620, 종이, 38×51cm, 여주이씨 정산종택 소장


1620년 봄 어느 날 인왕산 자락의 김상용 집 태고정에서 일곱 명의 문인들이 시회를 벌였다. 그 일곱은 병조판서 이상의(李尙毅, 1560-1624), 판돈녕부사 민형남(閔馨男, 1564-1659), 예조판서 이덕형(李德泂, 1566-1645), 형조판서 이경전(李慶全, 1567-1644), 호조판서 김신국(金藎國, 1572-1657) 그리고 이필영(李必榮, 1573-1645 이후), 최희남(崔喜男) 같은 이들이었으니까 대신들의 꽃놀이였던 셈이다. 그런데 이들의 모임은 심상치 않은 바가 있다. 더구나 그 7인은 당시 권력을 둘러싸고 치열하게 대립, 경쟁하고 있던 대북당과 소북당 인물들이요, 그 모임 장소는 뜻밖에도 서인당의 영수라 할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의 집이라는 사실이 그러하다.

이들의 모임이 열린 1620년 봄날이라면 전쟁영웅이자 1608년 왕에 즉위한 광해왕(光海王)의 눈부신 정책으로 임진왜란의 황폐함을 딛고 국가 재건의 발걸음에 박차를 가하던 무렵이었다. 한편으로 대비폐위 논쟁이 극심하던 1617년 3월 9일 당대의 권력자들 셋이 장원서(掌苑署)에서 모였다.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대북당의 일원으로 인목대비를 폐위시키자는 이이첨, 유희분과 이를 극력 반대하는 박승종이 그들이다. 하지만 모임은 결렬되었고 다음해 1618년 1월 29일 대비를 서궁(西宮)으로 폐위하였다.

대비 폐위사건 두 해 뒤에 열린 7인 모임에 참가한 형조판서 이경전이 대북당인이었고 호조판서 김신국, 예조판서 이덕형이 소북당인이었으며 병조판서 이상의가 남인당원이었다. 특이한 건 그 집 주인 김상용이 집에 없었다는 점인데 김상용은 서인당원으로 지난 1617년 인목대비 폐모론이 일어남에 벼슬을 버리고 원주로 물러나 은신하던 중이었다. 이렇듯 정쟁이 치열한 시절, 주인도 없는 집에 그것도 소속당이 다른 이들이 모여 정치토론도 아닌, 꽃놀이를 즐긴다는 건 기이한 장면이다. 이들은 태연히 시를 읊고 그 장면을 그림으로 그려 책을 엮었다. 그 책이 바로 『청풍계첩(淸風溪帖)』이다.

『청풍계첩』에 끼워져 있는 단 한 장의 그림에 묘사된 풍경은 바로 저 김상용의 집이다. 이 집은 장동 일대를 거의 차지할 만큼 넓었는데 바로 장동김문(壯洞金門) 세거지다. 김상용은 1608년부터 주변 일대에 별업(別業)을 조성해 나갔는데 이 조경사업은 상당한 규모여서 와유암(臥遊菴), 청풍각(淸風閣), 태고정(太古亭), 회심대(會心臺)를 새로이 건축하는 것이었다. 이 가운데 와유암은 아주 특별한 곳이다. 김상헌이 자신의 저서 『청음집(淸陰集)』에 쓰기를 명화, 고적(古蹟)을 진열하고 감상하는 곳이 와유암이라고 하면서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창임절간문유수(窓臨絶磵聞流水)>라는 서예작품이 걸려 있었다고 특별히 기록해 둘 정도였다.

화폭 복판에 세 개의 연못이 있고 오른쪽에 기와지붕, 왼쪽에 태고정이 자리 잡고 있다. 태고정 서쪽으로 계곡 물줄기가 폭포처럼 흐르고 그 뒤로 인왕산이 겹겹이 쌓여 어깨를 펼치는데 오른쪽으로 조선의 진산 백악산이 치솟아 꼭대기만 내보이고 있다. 시원스런 공간감각이 눈부신 이 풍경화를 보고 있노라면 7인 모임에 가담한 이들이 세 해 뒤 인조정변을 계기로 엇갈린 운명이며 제집을 비우고 몸을 숨겼던 김상용이 정변 뒤 우의정까지 오른 이래 그야말로 솟구쳐 오르는 가문의 위세란 게 무엇인지 싶다. 무려 15명의 정승(政丞), 35명의 판서(判書), 3명의 왕비(王妃)를 배출한 그 땅이 인간의 운명을 가르는 것일까. 이곳의 작은 주인 김상헌이 부르는 봄 노래 ‘봄이 다 지나가다’를 새겨보면 느긋한 풍경이지만 그들 가문의 눈부신 미래를 예고하는 듯 설렌다.

 

최  열

김용태씨를 돕기 위한 “산포도 사랑, 용태 형” 출판기념회 및 “함께 가는 길” 전시회 개막식이

지난 26일 오후5시부터 '가나아트센트'에서 열렸다.

 

“산포도 사랑, 용태 형”은 민중미술의 핵심 인사 45명이 '용태 형'에 대한 경험담을 털어 놓았고,

“함께 가는 길”은 지난 시절 '용태 형'에게 빚 진 민중미술가 43명의 작품을 추렴해 갖는 자선전이다.
‘김용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결성해 살아있는 이를 위한 회고집을 내고 전시회를 갖게 된 것은

병상에 누운 ‘용태 형’을 돕기 위한 자리였지만, 뿔뿔이 흩어진 옛 전사들의 결집이었다.

투병 중이라 개막식에 나오지 못할 줄 알았던 ‘용태 형’의 멀쩡한 등장에 깜짝 놀랐다.

모처럼 때 빼고 광냈겠지만, 전혀 간암 말기의 환자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개막식장에는 80년대 민중예술을 이끌었던 역전의 용사들이 총집결했다.
김정헌, 민정기, 박진화, 성완경, 신경림, 임옥상, 신학철, 박재동, 박불똥, 정동석, 주재환, 강요배, 김준권, 문영태, 신학철,

심정수, 이애주, 임진택, 장경호, 최석태씨 등의 내노라하는 작가들과 백기완, 문재인, 이부영, 이재오씨 등의 정치인,

시인 신경림, 소설가 황석영, 언론인 임재경, 이도윤, 가수 최백호, 환경운동가 최 열, 연극배우 이명희, 사진가 정인숙, 곽명우, 무도인 하태웅, 김태서, 임계재, 편근희, 유재만, 노광래씨 등 많은 분들이 참석하여 '용태 형'의 쾌유를 바라며 전의를 다졌다.

임진택씨의 사회로 진행된 개막식 첫머리에 최백호씨가 나와 “보고 싶은 얼굴”을 불렀다.

그 노랫말들이 새록 새록 지난 시절을 떠올리게 했는데, 나에게는 보고 싶은 얼굴이 몇 명이나 될까 하는 씁쓸한 생각도 들었다.

이왕이면 “산포도 익어 가는 고향 산길에, 산포도 따다 주던 산포도 처녀”로 시작되는 ‘용태 형’의 십팔번 “산포도 처녀”를 들었

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이어 문재인, 황석영, 이부영, 백기완씨의 인사말이 이어졌다.

백기완씨는 “술도 마셔야 하고, 할 일이 많은데, 빨리 일어나라”며 꾸짖듯 말해 자리를 숙연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애주씨의 살풀이 춤으로 행사는 마무리되었으나, 오랜만에 반가운 분들 만나고 사진찍느라 정작 보아야 할

전시작품들을 놓쳤다. 

뒤풀이 집으로 자리를 옮겨서는 “나도 막걸리 한 잔 도오!”라며 “용태 형”이 술잔을 들었다.

하기야 전투를 지휘할 사령관이 자기 몸 생각으로 꽁무니 뺄 위인은 아니지만, 좀 걱정되었다.

‘괜찮다’를 연발하는 ‘용태 형’의 밝은 모습에서 다시 살아 난 맹장의 모습을 보는듯 했다.

민중미술로 민주화 운동에 불을 지핀 옛 전사들의 결집 자체가 '용태 형'의 부활을 의미했다.

 

손님들이 너무 많아 뒤풀이 집을 두 군데나 잡았으나 여전히 자리가 부족했다.
신학철, 문영태, 장경호, 이명희씨를 비롯한 몇 명은 인사동 ‘노마드’로 자리를 옮겨,

신학철씨의 작품 '물레방아 도는 내력'을 들었다.

 

사진,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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