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년 만에 다시 삼청동에 이르니
푸르른 숲 사이 한 줄기 물소리
산천은 옛모습 그대로지만
풍류는 지난 날 그 정 그대로 아닌 것을
十年今復到三淸
萬綠林間一水聲
可奈山川依舊觀
風流非復昔時情
-장지연(張志淵),「삼청동(三淸洞)」,『장지연전집』
미상, 옥호정도, 19세기, 크기 미상, 개인 소장
황산(黃山) 김유근(金逌根, 1785-1840)은 삼청동 133-1번지 일대에 널따란 집터를 마련하고 집을 지었다. 이곳은 종로구 삼청동 백련봉(白蓮峯)아래 삼청공원 길 건너편 백악산 동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누가 그렸는지 모르지만 <옥호정도(玉壺亭圖)>를 보면 상단에 백련암이 있고 하단 오른쪽에 냇물이 흐르는데 그 지형으로 미루어 삼청동천(三淸洞川)이다. 삼청동천은 백악산 동쪽 기슭에서 시작해 금융연수원 앞으로 해서 지금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과 동십자각을 지나 미국대사관과 종로구청 사이를 지나 교보문고 뒷길을 빠져 청계천으로 흘러드는 기나긴 하천이다. 지금 삼청동천은 시멘트로 뒤덮인 채 길 아래 굴이 되어버린 복개천이어서 겉으론 흔적조차 없다.
삼청동 일대는 워낙 바위가 많아 계곡이 발달했고 우물도 많다. 칠성당에 제사를 올릴 때 퍼올리던 성제(星祭)바위 아래 성제우물, 병풍바위 밑 양푼처럼 파인 양푼우물과 칠성에 제사 지내던 백련암, 영월암(影月岩), 기천석(祈天石), 말바위, 민바위, 부엉바위 그리고 바위와 물길이 어울리는 동간(東磵)과 서간(西磵), 영수곡(靈水谷), 운장곡(雲藏谷)이 즐비한 곳이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한양 도성의 명승 가운데 제일경으로 손꼽았던 게다.
김유근은 이곳 옥호정에서 김좌근(金左根, 1797-1869)과 더불어 사족 예원집단 백련사(白蓮社)를 경영했다. 백련사는 아버지 김조순(金祖淳, 1765-1831)의 벗들인 김이양(金履陽, 1755-1845), 이명오(李明五, 1750-1836), 김이교(金履喬, 1764-1832), 이복현(李復鉉, 1767-1853), 김려(金鑢, 1766-1821)와 같은 당대 사족 문인집단으로 이들은 대체로 당대 예원맹주 신위(申緯, 1769-1847)와 동료들이다. 이 백련사는 문예집단의 활력이 중인예원으로 옮겨가던 시절, 사족예원 최후의 집단이었으며 바로 저 <옥호정도>는 백련사의 보금자리가 어떠했는지를 알려주는 풍경화다.
<옥호정도>는 하나의 정자인 옥호정만 그린 게 아니다. 옥호정이 포함된 집터 전체와 북쪽으로는 백련봉, 동쪽으로는 삼청동천을 그린 지도인 셈이다. 김유근이 별세한 뒤 그 집이 황량해짐에 따라 이 땅은 1960년대까지 아주 오랫동안 ‘황산(黃山)터’라 불렸다. 그래서 이 터가 김유근의 집터로 알려졌지만 사실 첫 주인은 김유근의 아버지이자 세도정권의 집정자 김조순이다. 그가 김유근에게 물려준 땅인 것이다.
그보다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이 땅의 주인은 다른 이였던 것 같다. 이 땅의 진산인 백련봉은 그 모양이 흰[白] 연꽃[蓮] 같다고 해서 그렇게 부르는 데 백련봉 아래 쪽에 바위벽이 있고 그곳엔‘영월암(影月岩)’이란 커다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달빛 그림자 비치는 바위란 뜻인데 이 글씨는 청백리(淸白吏)로 만년에 벼슬을 마다하고 학문에 탐닉하며 살아간 은자 연봉(蓮峯) 이기설(李基卨, 1558-1622)이 새겼다고 한다. 이기설의 아호인 연봉도 바로 저 백련봉에서 따 온 것으로 그는 도시에서 사는 은일지사였다. 그러니까 이 땅의 주인은 아무래도 이기설이 아닌가 한다.
장지연(張志淵, 1864-1921)은「유삼청동기(遊三淸洞記)」란 글에서 “삼청동 골짜기는 바위와 비탈이 깎아지른 듯 나무도 그윽이 우거진 속으로 높은 데서 흐르는 물이 깊은 연못을 짓고 다시 물은 돌바닥 위로 졸졸 흘러 이곳저곳에서 가느다란 폭포를 이루며 물구슬마저 튀기곤 하여 여름철에도 서늘한 기운이 감돌아서 해마다 한여름이면 장안의 놀이꾼 선비는 말할 것도 없고 아낙네들까지도 꾸역꾸역 모여들어 서로 어깨를 비빌 만큼 발자국 소리도 요란하였다.”고 했다. 그러니까 장지연이 살던 1921년 이전까지 삼청동은 도시의 계곡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고 사회가 해체되는 가운데 삼청동에 살림집이 들어앉기 시작했고 이제는 그 풍경까지 사라지고 말았다. 지금 삼청동은 음식점과 옷가게 천지라 문예와 풍류는 커녕 잡동사니 시장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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