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떠한 고통이 따르더라도 그림을 버리고 싶은 생각을 한번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좀더 좋은 그림을 남들이 모방할 수 없는 나의 그림을 그리고 우리나라 사람이 친할 수 있는 그림을 그리려고 애써왔다”
–양달석, 자서전에서
지금까지 우리에게 양달석은 한국의 대표적인 목가적 풍경화가로 알려져 있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소와 목동, 천진난만한 아이들과 초원은 동심과 추억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그의 화업(畵業) 인생을 살펴보면, 그가 이 땅에 민중화(民衆畵)를 제일 먼저 그려낸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1940년대 일제치하 조선미술전람회 출품작을 비롯한 여러 작품에서 조선 민중의 고달픈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당시 농촌 생활의 일상을 그린 ‘휴식’은 거친 필선으로 강인한 민초들의 일상을 잘 표현하고 있다. 1950-60년대는 부산 판자촌에서 생활하는 피난민들의 곤궁한 모습을 주로 그렸는데, 항구의 일꾼들과 리어카에서 좌판을 펼친 거리장사꾼들이 그 대상 이었다. ‘생선장수’에서 보듯이 여인의 억센 표정에서 우리는 고단하지만 강인한 민중들의 생명력을 읽을 수 있다.
민중을 보는 양달석의 시선은 기본적으로 따뜻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그림은 민중들의 생활이 나아지고 희망을 보여주는 밝고 평온한 모습으로 변해갔다.
한국화단의 화풍은 해방이전에는 국내화가들 대부분이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그림을 배워오던 시기였기로 어떻게 그리느냐가 주된 문제였고, 해방 이후에는 무엇을 그릴까 하는 주제가 문제였다. 양달석은 독학으로 이 두 문제를 모두 소화하여 서양화를 동양화처럼 그려내는 자신의 독창적인 화풍을 개척함으로써 사람들이 그의 그림에서 위안을 얻고 소장하도록 만들었다.
휴식, 38x28cm, 1942 : 점심을 먹는 장면. 지금은 쉽게 볼 수 없는 지게와 가족 같은 황소가 나무 사이로 내다보는 모습이 정겹다.
거제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의고 백부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며 소를 치는 목동으로 소년기를 보냈다. 그러나 그림에 대한 열정이 남달라 전 일본 중등학교 미전에 <농가>로 특선하고 화가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이 후 조선미술전람회에(11,17,18회) 세 차례나 입선하고 고학으로 일본유학을 하여 동경 독립미술협회전(11, 12회)에서도 두 차례 입선했다. 귀국해서는 부산 경남 지역에서 활동하다 6.25전쟁 이후 좌익으로 몰려 고초를 겪었으며 국전작품을 준비하던 중 아들을 잃고도 작업에 매진하여 입선(6회)하였다. 그 후 국전 추천작가(23,24,25,26,27회), 국전초대작가(29회)로 활발히 활동했다. 말년에 중풍으로 고생하면서도 손에 붓을 묶어 화혼을 불태운 그의 일대기는 한편의 드라마 같다.
붓 한 자루로 가족생계를 책임지고, 작업한 작품 3천여점을 모두 판매한 한국화단의 전무후무한 기록을 보여주는 양달석은 그의 고집대로 ‘나는 그림을 전시하는 목적은 반드시 그림을 팔기 위해서다’라는 철저한 프로의식을 가진 진정한 민중화가였다. 예나 지금이나 양달석의 그 많은 그림이 시중에서 보기 어려운 것은 소장가들이 그의 그림을 통해 어린 시절 고향모습을 그리워하며 외부에 유출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민중화가란 어느 특정집단이나 특정지역에 편중되는 그림이 아닌 모든 민중이 그 그림들을 좋아하고 함께 호흡하며 자신의 사무실이나 가정에 꼭 걸고 싶어하는 그림을 그리는 작가라고 말하고 싶다.
지금까지 민중미술은 1980년대와 1990년대를 거치면서 군부독재를 비판하고 사회의 불의에 항거하는 특정집단이나 특정지역의 전유물로 비쳐지고 있다. 하지만 이제 시대가 변했다. 당시의 암울했던 과거가 지나고 누구나 현실에 참여하고 비판할 수 있는 시대가 열렸는데, 아직도 과거에 갇혀있는 민중화가, 미술사가 그리고 비평가들이 여전히 우리 주위에서 활동하고 있다면 그들이 그 당시 시대상황과 사회를 비판하고 자신들의 의견을 거리낌 없이 표현 했듯이 이젠 그들도 후배들로부터 비평을 받는 기성세대가 되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 시점에서 진정한 민중미술은 공산치하에서 고통 받고 있는 북녘 동포의 아픔을 외면해서는 안될 것이다. 또 이 시대를 공감하는 모든 이에게 사랑 받고, 우리 국민들 모두가 이해하는 미술이어야 되지 않을까?
- 김의균(1964- ) ㈜카이로켐 대표이사, 서강대, 동대학원 유기합성화학 전공, 독일 Th.Goldschmidt AG 중앙연구소와 프랑스 Rhone-Poulenc 중앙연구소에서 계면화학 연구. LG기술원 연구원과 프랑스 CLC Technologie 연구소 한국법인 대표이사를 역임 후, 화학 벤처기업인 ㈜카이로켐(ChiroChem)을 창업. 양달석 화백 평전작업을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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