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광수 미술칼럼
장리석, 그늘의 노인, 1958, 캔버스에 유채, 158×110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제주도립미술관에서 ‘장리석, 백수의 화필’전(3.4 - 5.11)이 열렸다. 백수란 99세를 가리킨다.(100세 이상을 상수라 한다). 놀라운 일이다. 백세에 이르기 까지 화필을 놓지 않았다는 사실은 개인의 경우에 머물지 않고 미술계의 경사라 하겠다. 이번 전시가 회고전으로서의 성격을 띠는만큼 그의 생애에 걸친 화력이 펼쳐지고 있다. 1951년 피난시절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60년이 넘는 세월이 한 편의 드라마처럼 펼쳐지고 있다. 그 가운데 흥미로운 것은 동란 중 그린 적지 않은 스케치들이다. 신산하고 처연했던 한 시대의 정황이 생생하게 기록된 이들 현장 스케치는 새삼스러운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남부여대(男負女戴)한 피난민들이 화물차의 지붕에까지 빽빽하게 실려있는 모습은 그 어떤 기록보다도 생생하다. 엄청난 역사적 사건임에도 의외로 이를 기록한 그림은 적은 편이다. 너무 끔찍해서 멀리하고 싶어서였을까. 아니면 그럴 정황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을까. 종군화가 단원들에 의한 단편적인 스케치들이 남아있을 뿐 이를 한편의 역사적 드라마로 구현한 작품은 없다. 그런 점에서 장리석 화백의 현장 스케치는 대단히 귀중한 기록화가 아닐 수 없다.
장리석 화백은 스스로 강조하고 있듯이 서민의 애환을 그리는데 집중한다고 했는데 그러한 관심이 이번 회고전을 통해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1958년 ‘국전’ 대통령상 수상작인 <그늘의 노인>을 비롯해 <복덕방 노인>, <조롱과 노인> 등 일련의 서민들의 생활상을 다룬 작품들은 한 시대의 정감을 리얼하게 표상해주고 있다. 급격하게 변화되어가는 시대의 물결에 하릴없이 휩쓸려가는 무력한 인간의 모습이 애잔한 연민의 가정으로 다가온다. 무엇보다도 서민의 애환을 화폭에 담으려고 했던 그의 시선은 제주라는 특정한 지역의 풍물에 쏠리면서 더욱 무르익어가는 정감을 품어낸다. 제주의 풍물은 제주 출신 화가들에 의해 다루어지는가 하면 제주를 찾아들었던 외지인들에 의해 다루어진 두 예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변시지를 중심으로 김택화, 권영우, 강요배 등이 전자를 대표한다고 하면, 이중섭, 장리석, 이왈종 등은 후자를 대표한다 할 수 있다. 흥미롭게도 전자의 경우, 이 지역이 갖는 인고의 세월이 주는 회한이 적지 않게 반영되는데 반해 후자는 건강한 풍토와 남국적 정서에 집중되고 있는 점이다.
장리석의 제주풍물
동란 중 제주로 피난 온 미술가들 가운데는 이중섭, 최영림, 홍종명, 장리석 등 이 있다. 이들 가운데 장리석은 4년 가깝게 여기 머물렀을 뿐 아니라 서울로 이주한 이후에도 수시로 찾아왔다. 그의 작품 가운데 단연 제주의 풍물이 많은 양을 차지하는 요인도 이 같은 인연에 기인함이다. 그는 제주를 모티브로 한 작품을 중심으로 많은 작품을 제주에 기증하였다. 제주도립미술관은 그의 작품을 담을 특별실을 마련했으며 이번 회고전도 이런 사정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제주의 자연과 인간의 생활이 중심을 이루는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것은 현장에서 걷잡은 해녀들의 모습이다. 해녀들의 생활상은 제주의 독특한 풍물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들의 모습에서 건강한 원시적 아름다움, 순후한 정서를 기록하고 있다는데 의미를 더해 준다. 근대화를 통해 피폐해져가는 도시의 삶을 떠나 멀리 남태평양 타히티로 떠났던 고갱의 정황과 비길 만하다. 해녀라는 모티브 상의 특이함보다 해녀를 통해 제주만이 지닌 건강한 삶의 모습, 때묻지 않은 원생의 풋풋한 정감을 다루려는 데서 그의 작화의 내면을 엿볼 수 있을 것 같다. 단순한 모델로서의 누드가 아닌 생에 대한 애착이 터질 것 같은 육체를 통해 구현되고 있다는 점이야말로 그가 다루려는 화인이 아닌가 생각된다. 해녀들의 모습이 단순한 호기심의 모델이 아니라 독특한 실존의 화신으로 다가오는 요인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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