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없으나 평소 많은 전시회를 찾아다닌 덕에 제법 눈썰미가 있다는 소리를 듣는 편이다. 물론 도슨트의 전문적인 해설과 함께하며 작품을 관람하는 것도 즐기지만 성격 탓인지 조용히 혼자 그림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는 것을 좋아한다. 대부분의 지인들이 나의 이런 문화 활동을 직업과 관련짓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음악회와 전시회만큼은 머릿속이 복잡할 때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생각에 잠기고 싶어 찾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박은숙 화백의 그림은 그런 성향을 가진 나의 발걸음을 정확히 멈춰 서게 만드는 힘을 가진 작품이다. 언뜻 보기에 특별한 주제가 없는 듯 보이지만 선명한 선과 아련한 배경이 묘한 경계 속에서 조화를 이루어 낸다. 마치 현실과 이데아가 공존하는 느낌이다. 멀리서 그림을 감상할 때는 사실적이지만 작품 가까이로 다가갈수록 3차원적인 입체감을 느끼게 된다. 하단의 또렷한 표현과는 대조를 이루는 상단의 추상적인 이미지는 마치 별빛을 쏟아내는 밤하늘을 연상케 한다. 박은숙 화백의 작품이 ‘근원(Origin)’이라는 주제를 회화적으로 천착하는데 쏟아온 집념이 작품 속에서 살아 숨 쉬는 듯하다. 독실한 크리스찬인 박은숙 화백이 예찬하고자 하는 건 말할 것 없이 보이지 않는 근원의 세계다. 그녀에게서 ‘근원’이란 세계의 최초의 것으로 간주되는 ‘신의 나라’라고 한다.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오묘한 패턴의 단위들은 멈추어 서 있는 것 같지만 서로 포개어져 대화를 하고 있는 듯한 전체상을 빚어낸다. 동일한 형상 같지만 제각각 개성을 가지고 있으며 서로 무관심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지만 뒤엉켜 있는 모습에서는 따뜻함을 느낄 수가 있다. 광활한 미지의 공간, 차가운 파도가 치는 푸른 하늘을 표현하기도 하고 뜨거운 용암에 녹아내릴 것 같은 강렬한 세상을 그리기도 한다.
박은숙, 근원-빛으로1, 2013, 91x72.6cm
박은숙, 그림은 음악이다
홍익대 서양학과를 나온 박 화백의 작품은 추상화이지만 회화의 기본기가 단단히 배어있다. 형태의 결합은 난해하고 비합리적으로 보이기도 하고 차가움과 따뜻함을 대조시켜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박 화백의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칸딘스키(Kandinsky)를 떠올렸다. 그는 일찍부터 ‘그림은 음악과 같다’라고 생각했다. 음악이 순수한 소리로만 인간의 희로애락을 표현하는 것처럼 미술 역시 가장 순수한 조형요소인 색과 형태만으로 감성을 표현할 수있다고 생각했다. 칸딘스키의 이런 생각은 곧 ‘추상(抽象)’을 뜻하는 것이다. 박은숙 화백의 작품 역시 추상화이다. 그녀는 사실적이고 구체적으로 표현해 내는 ‘구상(具象)화’와는 달리 보는 이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추상화가 더욱 좋다고 했다. 정적인 것 같지만 어디에선가 음악이 흘러나오는 것 같고, 가만히 서 있는 듯 보이지만 춤을 추고 있는 것 같은 리드미컬한 그녀의 그림은 웅장한 오케스트라를 연상케 한다.
그녀가 화폭에 담은 ‘빛’의 세계는 작가의 순수한 영혼과 결합하여 완벽한 ‘추상’을 담아낸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을 신의 영역이라 한다면 아마도 박은숙 화백은 자신의 깊은 신앙세계에 대한 성찰을 화폭위에 마치 ‘고해성사’처럼 담아낸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밤하늘의 유성 같은 그녀의 그림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수고하고 짐진 인간세상을 따스하게 껴안은 신의 품속에 들어 와 있는 것만 같다.
- 이종덕(1935- ) 연세대 사학과 졸업. 문화공보부 정책연구관, 한국문화예술 진흥원 상임·기획이사, 서울예술단 이사장, 예술의전당 사장, 세종문화회관 사장, 성남아트센터 사장 역임. 현재 KBS교향악단 이사장, 단국대 문화예술대학원장, 충무아트홀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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