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ople] ‘달항아리’ 도예가 박부원 명장
1956년 열여덟 살 소년은 고향 전북 김제를 떠나 무작정 상경 길에 올랐다. 밀양 박씨 종손 집안에서 모자람 없이 자란 그였다. 하지만 가세(家勢)가 기울더니 유난히 아끼고 보듬어 주시던 할아버지마저 돌아가셨다. 혈혈단신으로 도시로 올라간 소년은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야학에서 공부했다. 강도 높은 노동에 학업까지 병행하려니 몸이 남아나질 않았다. 불광동과 구파발을 잇는 도로공사 현장에서 돌을 지고 가다 굴러 떨어져 죽을 뻔한 적도 있다. 그러던 그는 스물넷이 되던 해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서울 인사동 길을 걷다 쇼윈도에서 우연히 본, 고(故) 도암 지순탁 선생의 도자기가 그의 영혼을 건드렸다.
“그 그릇을 보고는 도자기에 단단히 미쳤죠. 수소문 끝에 지순탁 선생을 찾아가 도예에 몸 담은 지가 어느덧 반세기가 지났네요.”
광주 왕실 도자기 초대 명장인 지당 박부원 명장의 이야기다. 올해로 도력(陶歷) 52년에 접어든 그는 명실상부 대한민국 최고의 도예가로 불린다.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지난 7월24일,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도원요에서 박 명장을 만났다. 백발의 노(老) 도예가는 곧은 자세로 앉아 자신의 다기(茶器)에 차(茶)를 달였다. 찻잔을 건네받아 두 손으로 감싸니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주위에는 명장의 대표작인 달항아리를 비롯한 도자기들이 전시돼있었다.
둥그스름한 형태가 보름달처럼 생겼다 해 이름 붙여진 달항아리는 17세기 후반 숙종 때부터 18세기 영·정조 때까지 많이 만들어졌다. 18세기가 ‘조선의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것도 도예를 비롯한 예술이 융성했기 때문이다. 특히 달항아리는 중국과 일본에는 없고 오직 한국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그래서 문화적 가치가 크다. 완벽한 원형이 아니라 약간 불균형하게 왜곡된 미(美)도 달항아리만의 맛이다.
박부원 명장이 자신의 작품 ‘주동채용천 달항아리’를 바라보고 있다. 그는 “작품에 표현된 빛깔은
요변(窯變) 과정에서 만들어졌다”며 “자연과 인간이 함께 만든 색상”이라고 말했다.
대한민국 도예 정수 ‘달항아리’ 대가
박 명장은 달항아리 대가다. 그는 조선 달항아리를 재현한 것은 물론, 이를 한층 더 발전시켰다는 평을 받고 있다. 특히 새로운 시도를 하기로 유명하다. ‘분청귀얄암각문항아리(粉靑刷毛目岩刻文壺)’에는 울산 반구대 암각화에서 영감을 받아 수천 년 세월 속에서 풍화된 바위의 모습을 담았다. 그런가 하면 지난 5월에 열린 전주대학교 개교 50주년 초대전에서는 다양한 빛깔의 달항아리를 선보여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는 “18세기 분원의 달항아리는 그 시대의 문화와 정서를 표현하고 있다. 전통 정신을 계승하되 21세기 시대상에 걸맞은 작품이 나와야 한다는 생각으로 색이 들어간 달항아리를 만들었다”고 제작 배경을 설명했다.
그중에서도 ‘주동채용천(朱銅彩溶川) 달항아리’는 그가 특히 애착을 갖는 작품이다. 넉넉한 원형이 아닌 마름모 형태로 빚어졌으며, 가마 안에서 산화동 유약이 요변(窯變·도자기를 구울 때, 불꽃의 성질이나 잿물의 상태 따위로 가마 속에서 변화가 생겨 도자기가 예기치 못한 색깔과 상태를 나타내거나 모양이 변형되는 일)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푸른 바탕 위에 붉은 빛이 갈라지는 모습의 달항아리가 탄생했다. 이 작품을 보고 전광식 고신대 총장은 “전통 항아리의 질박미를 뛰어 넘는다”며 “혼돈과 공허가 깨지면서 천지가 만들어지는 창조의 장엄한 순간이 보인다”고 격찬했다. 화려한 색상에 익숙한 중국 도예가들조차 “이처럼 신비로운 색은 중국에서도 만들지 못한 빛깔”이라며 감탄할 정도였다.
박 명장은 자연과 호흡하는 자세가 좋은 도자기를 만든다고 말한다.
“도예는 자연과의 소통입니다. 저는 흙을 빚고 불을 때지만, 가마 안에서는 전적으로 자연의 몫이죠. 도자기가 구워지면서 요변이 일어나기 때문에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몰라요. 그뿐인가요. 계절과 기후마다 가마 불 색깔이 달라요. 여름엔 탁하고 봄·가을엔 밝죠. 도자기를 굽고 싶다고 해서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에요. 절기를 기다리고 때를 맞춰야 하죠. 마치 추수 때를 기다리는 농부와 같습니다.”
그가 자연을 이해하는 데는 시골에서 보낸 유년시절이 영향을 미쳤다. 그는 어릴 적 김제평야가 황금빛으로 물드는 과정을 보면서 자랐다. 서리 내릴 무렵엔 메뚜기며 참게를 잡으러 다녔다. 친구들과 동진, 신포바닷가 개펄에서 맨발로 뛰어놀기도 좋아했다. 그 기억을 되살려 만든 작품이 어릴 적 뛰놀던 서해 개펄을 표현한 ‘개펄 다완’이다.
전통도자를 재현하며 기본을 다졌던 경험도 창작의 밑거름이 됐다. 지난 1962년 박 명장은 도암 지순탁 선생 문하생으로 들어가 강원도 홍천군 두촌면에서 1세대 도예가들과 함께 재현 작업에 참여했다. 일제 침략으로 맥이 끊긴 전통도예를 되살리는 일은 한국 도예 부흥을 위한 숙명이었다. 그는 “춥고 배고픈 와중에도 뭔가에 씐 사람마냥 계속 도자기를 만들었다”며 “밥을 못 먹어 얼굴이 붓고 동상으로 고생도 했지만 그래도 좋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렇게 열정을 쏟은 결과, 2년 6개월 동안 청자와 백자, 분청사기까지 모두 재현할 수 있었다. 작업 성공 이후에도 10년간 도암 아래에서 더 배우며 전통도예를 익혔다. 1974년엔 독립해 나와 도원요를 설립했지만 여전히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불 다루기가 쉽지 않아 가스 가마로 돌아선 도예가도 있었어요. 하지만 저는 한 눈 팔지 않고 전통 가마만을 고집했습니다. 전통적 바탕 위에 새로움을 심어낼 때 깊이 있는 작품이 나온다고 생각했어요. 옛 것을 모방만 하는 일도 창작이라고 할 수 없고, 기본 바탕 없이 새로움만 추구해서는 작품의 격조를 높일 수 없죠.” 그의 대답에서 법고창신(法古創新·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함)이라는 단어가 떠오르는 건 왜일까.
도자기 만드는 일은 설레임의 연속
만 76세. 은퇴를 생각할 법한 나이지만 박 명장은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 도자기를 만들고 있다. 앞으로는 손 위에 올려놓고 감상할 수 있는 소물(小物)도 선보일 예정이다.
“도자기를 만들면서 잠시도 지루했던 적이 없어요. 이번엔 어떤 녀석이 나올지 생각하면 무척 설레거든요. 50년 넘게 설렌다는 건 행복한 일이죠.”
말하는 그의 얼굴에 순간, 엷은 미소가 번졌다.
▒ 지당 박부원 명장은…
1938년 11월 12일 전북 김제 출생, 62년 도암 지순탁 선생 문하로 도예 입문, 74년 도원요 설립, 2008년 광주 왕실 도자기 초대 명장, 2012년~현재 광주 백자 공모전 심사위원·광주 왕실 명장 심사위원
[이코노미조선 / 이수빈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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