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여종 자료 분석한 '이중섭 실록'
지인들 엇갈린 증언 통해 왜곡 찾아내… 과장·미화된 이중섭의 삶 바로잡아
이중섭 평전|최열 지음|돌베개|932쪽|4만8000원
이중섭. 이 세 글자는 '한국 미술'로 치환될 만큼 위력적이다. 시류 따라 수없이 개정된 미술 교과서에서도 이중섭의 소는 꿋꿋이 그 자리를 지켜왔다. 최근 서울과 부산에서 열린 블록버스터 전시 '명화를 만나다―한국근현대회화 100선'에서 관객 50만명의 발길을 끌어당긴 지남철(指南鐵)도 이중섭이었다.
이토록 열렬한 이중섭에 대한 한국민의 사랑엔 대하소설 주인공의 그것만큼이나 파란만장한 이중섭의 인생사가 분명 한몫한다. 1916년 평남 평원의 부잣집에서 태어나 1956년 서울 서대문 적십자병원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하기까지 그의 삶엔 온갖 극적 요소가 관통했다. 세상과 연이 닿은 고작 마흔 해 동안 해방 전후와 한국전쟁이라는 질곡의 한국사를 거쳤다. 부잣집 도련님으로 일본 유학을 갔다. 훤칠한 키에 조각 같은 외모,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가곡도 곧잘 뽑았고, 보들레르의 시도 줄줄 외웠다. 식민지 조선의 남자가 일본 여자와 결혼했고, 전쟁 후 아내와 두 아이를 일본에 보낸 뒤 정신 이상을 겪으며 홀로 죽는다. 이 모든 조건은 그를 단순한 화가 이상의 존재로 미화하기에 충분했다.
이 책은 공고해진 '이중섭 신화'에 용기 있게 도전한다. 미술평론가이자 미술사학자인 저자는 '영웅 만들기' 때문에 되레 이중섭의 예술 세계가 손해 봤다고 주장한다. 난세(亂世)는 영웅을 필요로 했고, 이중섭 지인들은 기억에 의존해 그를 과장·미화시킴으로써 이중섭의 작품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데 저해가 됐다는 논리다. '신화에 빠진 이중섭 구하기.' 어쩌면 이게 책의 숨겨진 부제일지 모르겠다. 저자는 사실에 기반한 '이중섭 실록(實錄)'을 만들겠다는 포부를 실현하기 위해 500여종이 넘는 문헌과 기록을 모아 5년간 집필했다.
출생에서부터 사망까지 연대기 순으로, 평원·평양·정주·도쿄·원산·서울·부산·서귀포·통영·대구 등 이중섭이 유랑했던 지역을 따라 구성됐다. 시인 고은, 조카 이영진, 친구 김병기·구상·박고석·한묵, 부인 야마모토 마사코(한국명 이남덕) 등의 엇갈린 증언을 추적해 보여주는 형식을 취한다. 그 과정에서 잘못 알려진 사실들이 자연스레 바로잡혔다.
이중섭이 다녔던 제국미술학교 학적부를 발굴해 4월 10일로 알려졌던 이중섭 생일을 9월 16일로 바꿨고, 유학 시절 제국미술학교에서 문화학원으로 학교를 옮기게 된 현실적인 이유는 성적 부진으로 인한 '정학'이었음을 밝혔다. 부인의 증언을 토대로, 정확하지 않았던 서귀포 피란 기간을 11개월로 바로잡았다.
- (위 왼쪽 사진)평양 종로공립보통학교 졸업식(앞줄 오른쪽). (위 오른쪽 사진)1954년 통영 호삼다방에서 유강렬 등과 연 4인전 당시. (아래 왼쪽 사진)1945년 5월 원산에서 열린 결혼식. (아래 오른쪽 사진)1940년 일본 문화학원 시절(오른쪽). /돌베개 제공
그렇다고 무미건조하진 않다. 해방 후 소를 그리려고 남의 집 소를 너무 열심히 관찰하다 소도둑으로 몰려 잡혀간 일, 턱이 길어 턱을 뜻하는 일본어 '아고(顎)'에 성씨 이(李)가 붙어 '아고리'란 별명이 생긴 얘기, 남자 혼자 사는 도쿄 하숙방 한가운데에 늘 난초가 있었던 얘기 등 신변잡기가 양념처럼 곁들여 있다.
200여쪽의 부록은 이 책의 진가를 더한다. 주요 연보, 도판과 함께 이중섭의 주변 인물까지 상세히 정리했다. 이만하면 '실록'이란 단어를 붙여도 손색없을 듯하다. 여러 증언과 자료를 그러모았기에 이음매가 때로 성글다. 그러나 그 어떤 미사여구로도 이길 수 없는 것이 팩트의 힘임을 보여주는 역작이다. 이중섭은 "예술은 진실의 힘이 비바람을 이긴 기록"이라 했다. 책은 기록이 만든 진실의 힘 위에 이중섭의 예술을 새로 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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