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먹어 늙어가는 거야 서럽지만,
경자년이 왔는데 그냥 넘어 갈 수야 없지 않은가?
기해년 간다고 마시고 경자년 온다고 마시니, 이러다 술로 가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
갈 땐 가더라도 ‘먹고 죽은 귀신 화색도 좋다’지 않더냐.
정초부터 연 이어 술 복이 터졌다.
정월 초하루에는 녹번동 정영신씨 집에서 아침 겸 점심을 얻어 먹는데,
인사동에서 ‘유목민’을 운영하는 전활철씨가 찾아왔다.
소주와 장어를 등짐에 넣어 왔는데, 어찌 술을 마다 하겠는가?
빵을 좋아 하는건 어떻게 알았는지, 빵도 잔뜩 사 왔더라.
동자동 살면서 배급주는 빵 맛에 길들었는데, 이젠 빼도 박도 못할 처지가 되었다.
양놈도 아닌 주제에 밥보다 빵을 더 많이 먹는 편인데, 술 안주로도 괜찮다.
빵 안주는 술도 취하고 배도 부르니, 도랑치고 게 잡는 격이 아닌가?
소주가 모자라 꼬불쳐 둔 상황버섯 술을 꺼내 마셨다.
그 다음 날은 여섯시에 모임이 있다는 정영신씨의 전갈을 받았다.
예술인협동조합을 준비하는 서인형씨가 마련한, 시무식을 겸한 술자리란다.
서인형씨를 만나 구산동 ‘싸리골’에 갔더니, '서울민예총' 사무국장 황경하씨가 와 있었다.
뒤늦게 미술평론가 최석태씨가 나타났는데, 일을 추진할 사무실도 곧 차린다고 했다.
삼겹살에다 갈비까지, 정초부터 육고기로 배를 채웠는데,
금주령이 해제된 서인형씨가 많이 마시는 바람에 덩달아 취해버렸다.
이차 가자는 걸 줄행랑쳤는데, 녹번동까지 따라 온 것이다.
술 귀신이 따로 없었다.
방이 좁아, 겨울에는 사용하지도 않는 다락방에 술상을 차린 것이다.
추워 떨며 마시니 좀 덜 취하는 것 같았다.
아들 햇님이 까지 찿아 와, 동자동에서 가져 온 초코파이 한 상자를 손녀 하랑이 주라고 선물했다.
이 술 저 술 닥치는 대로 마시다보니, 죽을 때나 마실 작정인 ‘불사주’까지 나와버렸다.
그 날은 술이 취해 맛도 모르고 마셨는데, 남은 술로 아침 해장을 하니, 정말 좋은 술이더라.
올 해는 술독에 빠져 아무래도 제 명에 죽기는 틀린 것 같다.
다들 고마웠어요. 새해에는 만사형통하길 바랍니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황경하 /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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