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니투데이 박정태 경제칼럼니스트
헨리 8세의 두 번째 부인이었던 앤 불린이 부정(不貞)의 누명을 쓰고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기 전 마지막으로 한 말은 “아, 오월이군요!”였다. 계절의 여왕답지 않게 올해는 좀 무겁고 우울한 오월이 돼 버렸지만 나무 이파리는 여전히 푸르고 봄바람은 향기롭기만 하다.
내가 10년 넘게 다녔던 신문사를 그만둔 것도 오월이었다. 사직서를 제출하고 일찍 퇴근하던 날, 조계사를 지나 인사동으로 가는데 햇볕은 유난히 밝게 비추고 꽃들은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아직 30대여서 그랬는지, 불안감보다는 오랫동안 넘지 못했던 선을 훌쩍 뛰어넘었다는 시원함이 더 컸던 것 같다.
그때 나를 사로잡았던 생각은 길들여진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규칙적인 삶, 무한히 반복되는 일상을 이어가다 어느 날 나도 모르게 흉측한 벌레가 되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상상 말이다. 굳이 카프카의 소설 ‘변신’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기계적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무가치한 존재를 넘어 공포의 대상으로 변할 수 있다.
사실 벌레로 변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변신의 원인이나 이유를 찾으려 하지 않고 그렇게 변한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것이다. ‘변신’의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도 벌레로 변해버린 자신의 운명을 되돌아보거나 다시 인간으로 돌아가기 위한 노력을 조금도 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고된 직업과 나쁜 식사 탓에 이렇게 됐다고 한탄할 뿐이다.
그러면서 출근이 늦으면 직장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고 걱정한다. 그레고르는 가족들의 생계비를 책임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5~6년 동안 갚아나가야 할 빚까지 있다. 그는 가족의 차가운 시선과 냉대에도 불구하고 꾸역꾸역 벌레로서의 삶을 이어가고 자기가 없으면 살아가지 못할 줄 알았던 아버지와 어머니, 여동생은 다들 새 직장을 잡는다. 소설은 그레고르의 죽음과 함께 끝나고, 가족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교외로 소풍을 떠나는데 전차 안으로 따뜻한 봄 햇볕이 들어온다.
길들여진다는 건 이런 것이다. 아니 한 걸음 더 나갈 수도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미완성 소설 ‘악어’는 아주 기이한 이야기인데, 이반 마뜨베이치라는한 평범한 관리가 전시장에 갔다가 악어에게 잡아 먹히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반의 친구가 구조를 요청하자 전시장 사장은 전례가 없는 데다 사유재산이라는 이유로 악어의 배를 가를 수 없다고 한다. 악어에 의해 삼켜진 이반 역시 죽지 않고 오히려 악어 뱃속에 자리잡은 채 그곳에서의 삶에 익숙해지고 만족스러워하기조차 한다. 관람객이 몇 배로 몰려들고 인기를 끌자 자신의 빛나는 성공을 기대한다며 우쭐댈 정도다.
만일 그레고르가 이반의 경우를 따르고자 했다면, 그의 가족들은 벌레로 변신한 그레고르를 데리고 방송에도 나가고 전세계를 돌며 엄청난 돈을 벌었을지도 모른다. 말을 알아듣고 심지어 바이올린 연주에 눈물까지 흘릴 줄 아는 벌레라니! 벌레 매니지먼트회사를 차려 벌레 캐릭터를 게임회사에 팔지도 모른다.
비현실적이고 황당한 이야기라고 웃어 넘겨버릴 수도 있지만 주변을 돌아보면 현실 세계에서도 다들 이렇게 살아간다. 그게 기업가 정신이고 그러면 돈벌이가 되니까. 그레고르는 비록 허우적거리며 힘겹게 버텨나가다 죽어버렸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반처럼 뻔뻔할 정도로 세상살이에 적응해간다. 길들여진 인간, 호모 도메스티쿠스(Homo Domesticus)는 사실 이처럼 스스로 길들여가는 것이다.
현대 사회는 개인들의 이기적인 욕구가 없이는 돌아가지 못한다. 누구나 살아가기 위해서는 돈벌이를 해야 하고, 합리적인 이윤 추구는 정당한 것으로 인정된다. 그러나 돈벌이를 자신의 물질적 생활을 영위해가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목적 자체로 여겨서는 안 된다.
호모 도메스티쿠스의 비극은 여기서 출발한다. 목적이 아니라 수단에 길들여지다 보면 인생의 의미를, 왜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지 그 이유를 찾을 수 없게 된다. 길들여짐의 반대는 낯섦이다. 어느 날 벌레 같은 존재가 된 자신을 발견하고 싶지 않다면 밖으로 나가오월의 낯섦을 느껴보라. 오월도 이제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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