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문호사진판/사진 이야기

박영달 회고전-사진예술과 휴머니즘

만지산할배 2016. 8. 13. 19:39

추당 박영달 회고전-사진예술과 휴머니즘


박영달展 / PARKYOUNGDAL / 朴英達 / photography
2016_0714 ▶ 2016_1002 / 월요일 휴관



박영달_하선_디지털 재인화_28×43cm_1956~58
박영달_어장_디지털 재인화_40×50cm_1954~57

초대일시 / 2016_0714_목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월요일 휴관



포항시립미술관Pohang Museum of Steel Art

경북 포항시 북구 환호공원길 10

Tel. +82.54.250.6000

www.poma.kr



포항시립미술관은 우리나라 사진예술에 큰 발자취를 남긴 것은 물론 우리 지역 문화예술 발전을 위해 공헌한 추당 박영달(秋塘 朴英達)의 사진예술과 생애를 조명해 보는 회고전을 마련하였다. 이번 전시는 지역미술사 정립을 위해 마련되었으며, 우리 지역 사진예술의 태동과 발전을 가늠해볼 수 있다. 또한, 추당 박영달의 '사실주의(Realism)' 사진예술과 생애를 조명하고, 옛 포항의 생생한 삶의 현장과 우리 시민의 생활상을 담은 사진작품 속에 진한 '휴머니티'를 느낄 수 있는 전시이다. ● 박영달은 1913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1938년 대구일보 포항지사에 기자로 부임한 이후 48년간 포항을 지키며 활동한 사진작가이다. 박영달은 6.25 직후 포항에 '사진DP'점(店)을 낸 계기로 사진을 시작하였으며, 구왕삼(1909~1977)과 활발한 교류활동으로 사진의 이론적 토대를 다졌다. 해방 이후 구왕삼은 일제강점기에 형성된 소위 "회화적 서정성이 가미된 공모전 위주의 자연관조적 살롱사진"1) 을 비판하였으며, 리얼리즘 사진론과 비평을 자주적 입장에서 제시하여 대구사진의 중요한 맥락을 형성하였다. 구왕삼에 의하면 사실주의 사진은 "인간(人間)의 본질(本質)에 대(對)한 진실(眞實)하고 열정적(熱情的)인 탐구(探求)와 생동적(生動的)인 역사적(歷史的) 현실(現實)을 「카메라」로 형상화"2) 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한편, 박영달은 사진이 가진 조형성과 사실성은 물론 회화성과 문학성까지도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사진은 조형예술의 한 분야이지만, '인생의 주제'를 담아야 한다고 믿었으며, 사진미학은 "많은 예술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완성된다."3) 라고 말한다.


박영달_풍선_디지털 재인화_61×78cm_1963_제23회 아사히국제사진쌀롱 입선작


박영달_길동무_디지털 재인화_92×61cm_1963_제23회 아사히국제사진쌀롱 입선작


박영달_노도의 위험을 뚫고_디지털 재인화_40×62cm_1967_제5회 동아사진콘테스트 입상작


박영달은 1958년과 1963년에 '조일국제사진공모전'에서 입선하였으며, 1965년 국전 제1회 사진부와 1966년, 1967년 '동아사진콘테스트', 1973년 '국제사진공모전' 등 당시에 명성이 높았던 국제사진공모전에서도 입상하면서 사진예술의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박영달은 1957년 대구 미문화원에서 제1회 사진개인전을 개최하였다. 당시 사진만으로 개인전을 개최하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것으로 우리나라 사진예술사에서 화젯거리이자 선각자로서 높이 평가한다. 또한, 사진예술의 한계성을 극복하기 위하여 조형예술의 본질론에 근거하면서도 현대성을 찾는 다양한 방법을 연구하였으며, 꾸준한 연구발표를 통해 사진예술 이론가로서의 면모도 보여주었다.


박영달_꼬마야구_디지털 재인화_40×52cm_1957


박영달_율동_디지털 재인화_28×37cm_1960년대


박영달_젊은 인어들_디지털 재인화_40×51cm_1960


박영달은 1952년부터 1966년까지 '청포도 다방'을 운영하였다. 우리 지역 문화예술의 사랑방 역할과 함께 시민에게 오랫동안 사랑받는 장소였던 청포도 다방은 일명 '청포도 살롱시대'라고 불리며 포항의 르네상스를 일컫는 용어로 사용된다. 이곳에서는 미술 관련 전시뿐만 아니라 문화예술인들의 토론 장소, 음악감상실로 활용되었다. 특히 박영달은 우리 지역의 첫 문화예술단체인 '흐름회'를 1960년에 조직하여 문화예술 발전에 공헌했다. 박영달이 이렇게 우리 지역에서 다양한 역할을 겸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그 자신이 왕성한 활동가였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당시의 시대적 요청이었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황무지나 다름없었던 당시 포항문화예술계는 신념과 열정을 갖춘 선각자가 필요했다. 박영달은 포항에 살면서 문화운동가이며 화가인 이명석(1904~1979, 포항초대문화원장)과 수필가인 한흑구(1909~1979) 등과 깊은 교분을 맺고 이들과 함께 포항의 문화예술 운동을 일으켜 준 우리 지역의 선각자이다. 이들에 의해 포항이 다른 지역과의 교류와 소통 각 장르의 문화예술에 대한 인식의 저변확대와 교류가 이루어지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면모들은 포항문화원과 포항예총이 탄생하는데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박영달_무제_디지털 재인화_40×52cm_1960


박영달_부두의 생태_디지털 재인화_40×51cm_1957


박영달_휴식_디지털 재인화_55×40cm_1960년대


박영달은 풍경이나 정물보다 인물을 주로 주제로 삼았다. 어린이, 학생, 부부, 노인, 어부 등 당시의 생생한 삶의 현장을 고스란히 그의 카메라에 담았다. 이 사진에는 시대성과 생명력 넘치는 표현으로 있는 그대로의 우리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자연스럽게 '인간다움'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진한 '휴머니즘(Humanism)'이 배어 있다. 이번 '추당 박영달 회고전 - 사진예술과 휴머니즘'으로 우리 지역 사진예술의 태동을 알 수 있는 것은 물론 카메라로 바라본 시대적 상황과 예술적 표현, 현대성 등 포항 사진의 역사 정립에 중요한 단초를 이루게 될 것이다. ■ 장정렬


* 주석1) 김태욱, 대구 근대사진의 형성과 전개 - 사진공모전과 이론적 비평을 중심으로, 한국학논집 제49집, 2012, p. 300.2) 김태욱, 1930-50년대 대구ㆍ경북사진의 특성, 한국컨텐츠학회논문지 제12권 제7호, 한국컨텐츠학회, 2012, pp. 83~843) 대구문화예술회관, 사실주의 vs 조형주의 1950, 60년대 대구의 사진논쟁, 2009. 7. 14. ~ 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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