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찾아서] 용태 형과 문화운동시대
1984년 6월26일 서울 경운동 아람미술관에서 열린 현실과 발언의 다섯번째 주제전 ‘6·25전’ 출품작으로 첫선을 보인 <디엠제트>는 작가 김용태의 대표 걸작이자 마지막 작품이다. 당시 사진콜라주라는 새로운 형식과 ‘기지촌 여성들과 미군의 사진’을 내건 강렬한 주제의식으로 문화계 안팎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사진은 훗날 재전시회 때 원본이 아니라 저장해놓은 사진 파일을 활용해 만든 것으로 사진작가 고 김영수가 찍었다.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의 16번째 이야기 ‘용태 형과 문화운동시대’는 지난 5월 작고한 김용태(그림) 전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이사장이 끝내지 못한 구술을 그와 더불어 한 시대를 헤쳐온 수많은 문화예술인들이 대신 들려주는 기획이다. 헌정 문집 <산포도 사랑, 용태 형>의 필진 가운데 20여명이 기꺼이 나섰다. 여섯번째로 조각가 이태호씨가 미술동인 ‘현실과 발언’의 주제전 ‘6·25전’에 출품해 큰 반향을 일으켰던 작가 김용태의 대표작 <디엠제트>(DMZ)를 소개한다. 이어 고영직, 문영태, 박인배, 심광현, 유홍준, 이애주, 이종률, 임진택, 조성우, 홍선웅, 황석영씨 등이 필진으로 참여할 예정이다.
사진 190장 콜라주 작품 ‘DMZ’
사진속 한국 여성과 미군 통해
휴전·분단이라는 우리의 현실을
호소력있게 구체적으로 표현했다
그는 훗날 “여성들에게 미안하다”며
사진들을 없애 원본은 이제 없다
‘DMZ’는 마치 불꽃놀이처럼
하늘위에서 폭발하고 사라졌다
■ ‘현실과 발언’의 청년시대
1980년은 내 생애에서 가장 흉흉하고, 불길하고, 우울했던 해로 기억된다. 기억 속에서는 내내 계엄령 아래서 살았던 것 같다. 5·18 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났지만, 그 엄청난 소식도 ‘카더라’와 소문에 의해 더듬더듬 알게 됐다. 김재규가 사형당하고, 친구들이 어디론가 잡혀갔고, 갑자기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했다. 이어 체육관 선거에 의해 새 대통령이 선출되는가 했더니, 곧바로 전두환 대통령이 등장했다.
그해 12월 말 밤늦은 귀갓길에서 나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다리가 부러져 두 달 가까이 깁스를 하고 지내야 했다. 병원에서 누워 있던 그때 ‘현실과 발언’의 최민과 성완경 두 분이 찾아왔다. 회원으로 같이 활동해보자 했다. 두 분의 방문 자체가 황송해 나는 앞뒤 생각도 없이 무조건 “예”라고 답했다.
‘미술은 현실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라는 게 당시 미술인 대부분이 인정하는 정답이었다. 미술은 냄새나고 구차스런 현실을 떠나 어떤 고상한 것, 어떤 아름다운 것과 함께 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하지만 ‘현발’은 그 이름에서부터 정답을 무시하고, ‘현실’ 뿐만 아니라, ‘발언’까지 들고 나온 미술그룹이어서 당연히 내 관심을 끌었다. 그런데 그 창립전이 ‘촛불전시회’가 되고, 결국 취소되는 사태를 겪은 뒤 나는 현발과 거리를 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나는 꼼짝없이 모더니즘에 의해 만들어진, 개인주의와 작가주의에 찌든, 이리저리 집단으로 몰려다니거나, 누굴 대표해 발언하거나, 또 그런 일로 쓸데없이 주위의 주목받는 것을 싫어하는, 나름 깐깐한 미술쟁이였으니까.
하지만 생각과 달리, 나는 현발과 함께하기 시작하면서 나도 모르게 완전히 빠져들었다. 그때 내가 참여하고 있던 여러 미술그룹 가운데, 현발은 확연히 달랐다. 거기에는 ‘학벌’이니 ‘동문’이니 하는 게 없었고, 강요되는 ‘선후배 서열’도 없었다. 아니, 그런 것이 없는 게 아니라, 그런 것보다 훨씬 중요한 주제들 앞에서 그런 것들의 존재감이 없었다고 하는 것이 보다 정확한 표현이다.
무엇보다도 현발은 재미있었고, 지적 자극과 도전이 있었다. 회원들은 음주가무에 있어서도 탁월했지만, 토론과 의견 개진에도 누구 하나 뒤처지는 일이 없었다. 특히 다른 곳에서는 만날 수 없는 ‘현실’에 대해 연구하는, 그리고 미술이 그것에 어떻게 대응하고 반영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모색하고 실천하는 연습장이자 경기장이었다.
나도 그러했지만, 많은 회원들이 당시 미친 듯한 속도로 ‘산업사회’로 변모하고 있는 한국사회 현실에 주목했다. 그리고 일부는 그러한 현실을 강요하거나 주도하는 정부 혹은 대기업 등 권력에 예리한 관찰의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현발의 주제전 ‘제2회 도시와 시각전’과 ‘제3회 행복의 모습전’은 그런 배경에서 가능했다.
그리고 4회전의 주제는 ‘6·25’로 정했다. 민족국가 형성 이후 6·25는 최대의 사건이었지만 한국 미술에서 그것을 다룬 작품은 실로 미미했다. 그러한 한국미술사의 기이한 현상을 두고 자성하는 의미의 토론을 하다가 ‘6·25’가 그 해 전시의 주제로 정해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 김용태의 작품 ‘디엠제트’의 폭발
그 ‘6·25전’에 김용태는 작품 <디엠제트>(DMZ)를 내놓았다. 이 작품은 단번에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김용태는 동두천과 의정부 등 미군부대 주변의 사진관을 찾아다니며 손님들이 촬영한 뒤 찾아가지 않고 있는 사진들을 구해 왔다. 그리고 검은색 배경 위에 그 사진들을 이어 붙여 영어 대문자로 ‘DMZ’를 만들었다. 모두 800여 장을 수거해 왔다는데, 최종적으로 작품에 사용된 사진은 180여장으로, 크기는 3×5에서 11×14인치까지 다양했다.
되돌아보니, 작품 ‘디엠제트’를 나는 3회에 걸쳐 각각 다른 장소와 시간에서 만났다. 맨 처음은 역시 현발의 <6·25전>이었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84년 인사동 아람미술관에서였다. 그리고 두번째는 88년 뉴욕의 아티스츠 스페이스에서 열린 <민중미술전>(민중 아트-어 뉴 컬처럴 무브먼트 프롬 코리아)에서였다. 바로 한국의 민중미술을 세계 미술의 중심부에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전시회였다. 그리고 마지막은 2012년 인사아트센터에서 열린 <현실과 발언-30년전>이었다.
여기서 작품 <디엠제트>의 특징과 내 느낌을 요약하면 이렇다.
첫째, 그 감동은 낯설고 도전적인 작품의 형식에서부터 시작된다. 그 사진들은 작가가 직접 촬영한 작품이 아니다. 또한 존 하트필드의 포토몽타주 작품처럼 작가가 이미지를 기술적으로 조작하거나 합성해서 만든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이미 누군가에 의해 제작된 사진을 김용태 작가가 발견해 수집한 것이다. 요즘 말로 하면 ‘발견된 사물’이다. 그 사진들은 원본 자체에는 아무런 조작 없이, 작가에 의해 디엠제트라는 글자로 배열됐을 뿐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차용’ 방식이다.
그 사진들이 한국에 있는 미군부대 주변의 사진관에서 제작됐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것은 80년대 한국이라는 독특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역사적, 장소적 맥락에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이런 점을 ‘장소 특정적’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말도 모더니즘의 ‘보편성’의 개념에 대응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용어라 할 수 있다.
둘째로는 작품의 주제와 내용이 지닌 호소력과 설득력이다. 그 작품은 물건으로서의 미술품이라기보다는 개념과 기호로 소통하고 공감을 나눈다. 그래서 작품 <디엠제트>는 일종의 ‘개념미술’이다. 그것은 한국의 당장의 현실을 얘기할 뿐만 아니라, ‘비무장지대’라는 추상어를 구체적 이미지로 보여준다. 전쟁이 끝나지 않은, 휴전과 분단 상태에 있는 우리를 일깨우는가 하면, 우리가 여전이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의존상태에 있음을 확인시킨다.
그 사진에서 우리의 시선은 미군 병사의 모습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과 함께 있는 한국의 여인들과, 병사의 배경에 있는 풍경들에 관심을 간다. 사진 배경에는 한국의 기와집과 초가집 등 그들에게 이국적인 풍경이 있는가 하면, 국적 불명의 고층 빌딩이 즐비한 대도시도 있다. 그야말로 모두 ‘키치’들이다.
하지만 그런 배경 앞의 미군 병사들이 비선택적으로 한국에 와서 삶의 한동안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이 미국의 시골 출신이 많다는 것을 고려하면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그리고 “나는 지옥에서 시간을 보냈으므로 천국에 갈 것을 확신한다”는 배경의 글에서 한국을 지옥이라 했다고 분노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데, 그것에도 나는 그리 대단한 의미가 있다고 보지 않는다. 그 글에서 한국은 우리가 사는 한국이 아니다. 군 복무로서 한동안 보내는 그들의 시간과 공간일 뿐이다. 솔직히, 우리들도 제대 뒤 흔히, 근무하던 부대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겠다고 말하지 않는가. 그런 차원일 것이다.
그 사진들이 내게 의미있는 이유는 병사들의 포즈나 배경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여기에 있어야만 하는 이 세계, 그 구조를 생각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사진들 중에 특별히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한 한국 여인이 흑인과 백인 아이를 함께 안고 있는 사진이다. 완전히 다른 피부색의 두 아이를 가진 그 여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생각하면서 가슴이 짓눌리는 듯한 통증을 느끼는 것은 결코 나만의 체험이 아닐 것이다.
지난 ‘현실과 발언 30년전’의 인터뷰에서 김용태 작가는 전시회 이후 생각해보니 자신이 그 사진에 나오는 여인들에게 몹쓸 짓을 한 것 같다고, 미안하다고, 그래서 그 사진들을 모두 없애버렸다고 말했다. 그래서 작품 ‘디엠제트’의 원본은 이제 세상에 없다. 그것은 불꽃놀이처럼 하늘 높이 날아올라 폭발한 뒤 사라졌다. 지금 우리가 보는 그의 작품은 사진작가 김영수의 사진 복사본이다. 이는 개념미술가로서의 김용태를 잘 드러내는 일면일지도 모른다. ‘작품=물건=상품=매매’라는 도식이 그의 머리에는 없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 ‘디엠제트’ 이후, 미술 현장을 떠났다. 그 대신 삶의 현장으로 갔다. 문화를 통한 사회변혁이 그가 추구하는 방향으로 보였다.
■ ‘디엠제트’를 입체작품으로 세우자
김용태 작가가 투병중일 때 나는 작가에게 작품 ‘디엠제트’를 입체로 제작해 세울 것을 제안했다. 그것은 미국의 팝아티스트 로버트 인디애나의 입체작품 <러브>(LOVE)를 보면서 갑자기 든 생각이었다. 그는 영어 ‘LOVE’란 글자를 회화로뿐만 아니라 입체작품으로도 만들어 세계 여기저기에 세워놓고 있었다. 작품으로서의 가치는 ‘디엠제트’가 ‘러브’보다 못할 게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래서 조각가인 내가 도와드릴 테니 어서 병석에서 일어나 함께 일도 하고 재밌게 살아보자는 취지에서 한 말이었다.
그런데 김용태 작가가 세상을 떠난 이제 이 제안은 수사를 넘어 하나의 필수 사업이 돼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는 꿈꾼다. 통일되는 그날을 위해 그의 작품 ‘디엠제트’가 기념비로 서는 것을, 그리고 마침내 통일이 되어, 철조망도 사라지고, 그래서 디엠제트도 사라진 뒤, 그 땅 한가운데에 김용태의 ‘디엠제트’ 기념비가 서는 것을.
이태호 / 현실과 발언 동인·경희대 교수
1984년 ‘6·25전’ 출품작 <디엠제트>에 쓰인 실사 사진 가운데 일부.
“우월감 젖은 미군의 점령군 행세 폭로한 것”
용태형이 말하는 ‘DMZ’
“다섯번째 주제전 ‘6·25’을 2개월 남짓 앞둔 1984년 4월의 어느 일요일, ‘현실과 발언’ 회원 일행은 동두천행 시외버스에 타고 있었다. 봄이었으나 을씨년스런 날씨였다. ‘동두천 기지촌’에라도 가보자는 한 회원의 제안에 따른 길이었다. ‘아직 많은 미군기지가 있는 곳이므로, 어쩌면 특수한 문화 형태를 볼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들을 품고서였다.”
미술작가로서 마지막 작품이자 대표작인 ‘디엠제트’(DMZ)의 창작 과정과 ‘6·25’전의 의미에 대해 고 김용태 선생이 직접 기고한 글의 한 대목이다.(<현실과 발언>, 열화당 펴냄
4월 동두천 기지촌 답사 때 처음 보고 충격을 받은 김용태 선생이 사진관을 순례하며 수집한 주한미군과 한국 여성들의 기념사진들이다.
사진속 체념한듯한 여성의 사진
뇌리에 깊게 남아 작품 만들어
미군 장교들이 사진 뜯어내기도
“진정한 작품 이해 없었다”고 회고
“버스에서 내려 약 15분간 걷다 보니 ‘내국인 출입 금함’이란 팻말이 붙어 있는 골목에 당도했다. … 우리의 시선을 유난히 끌었던 장면은 사진과 진열창 속의 많은 컬러사진이었다. … 그 사진들 중에서 국제결혼한 한 쌍의 부부를 볼 수 있었다. 사진 속의 두 사람은 웃고 있었으나 특히 여자의 표정은 삶을 체념한 듯한 우울한 느낌이었다. 이 느낌은 계속 나의 뇌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동두천을 다녀온 지 한달이 넘었으나 여전히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 어느 날 중앙청 앞 신호등에서 멈춘 출근 버스 속에서 본 풍경이 자꾸만 아롱거렸다. … 조선조 태조 4년에 창건된 광화문, 그 지붕의 잿빛 기와와 화려한 단청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이 쓴 ‘광화문’ 현판, 그 아래쪽 붉은 대문, 노랑머리의 키 큰 외국인과 곱슬머리의 젊은 한국 여인, 해태상, 동상마냥 서 있던 전투경찰의 자세, 일제 때 지어진 중앙청 건물, 그 뒤쪽의 장엄한 인왕산 등등. 오늘 내가 살고 있는 역사의 한 단면을 보는 듯한 충격이었다. 동두천 사진관에서 느꼈던 ‘분단의 현실’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날 이후 김용태는 혼자서 동두천을 여러 차례 오가며 진열창 속의 사진들을 하나둘씩 수집하기 시작했다. 때로는 사진관 주인과 장기·바둑·화투를 놀아 주고 때로는 막걸리를 대접하며, 한 장에 300~500원씩 흥정하거나 1천~2천원까지 지불하며 모두 800장을 모았고, 그 가운데 190여장을 골라 출품했다.
마침내 그해 6월26일 아람미술관에서 열린 ‘6·25’ 주제전에서 당시로는 파격적인 사진 콜라주 형식의 ‘디엠제트’는 전례없는 “대박”이 났다. 하지만 정작 김용태는 관객의 반응을 두고 “내 작품에 대한 진정한 이해와 관심은 없었던 것으로 판단되었다. 다만, 왜 이런 사진들이 미술전시회에 나와 있는가란 의구심과 6·25란 역사적 주제와 이 사진과의 관계는 무엇이냐라는 질문은 많이 받았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에이에프케이엔>(AFKN)의 프로듀서였던 테리 크라우제의 제안으로, 85년 2월 한달간 미8군 영내에서 ‘2인전’이 열렸는데 첫날부터 일부 미군 장교와 대부분 한국인인 그 부인들의 항의로 사진들이 떨어져 나갔고, 특히 미8군 최고층은 “미국인이나 한국인이나 서로 좋은 이미지를 줄 수 없을 것”이라고 불쾌해했다고 전해지기도 했다.
김용태는 “동두천 사진들은 그들이 우월감에 젖은, 즉 점령군이란 명목 아래 과시해온 많은 행위들 중에 하나의 표시를 폭로하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라고 기고문을 마무리지었다.
[한겨레신문]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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